빛을 증거할 용기와 의지마저도

사랑마저, 열망마저, 의지마저, 용기마저, 힘마저, 그리고 행(行)마저도

by 생명의 언어

진실한 나의 형제들이라면 모두 다 알고 있는 사실이 있다. 우리들이 그분을 사랑하는 마음은 세상으로 말미암는 것과 같지 않다는 것, 그분의 의지(WILL)를 동경하고 열망하여 미약한 수준에서나마 닮아가고자 하는 마음을 늘 가슴 속에 간직한다는 것, 그분으로 인하여 감동 받고, 경외하고, 그분과 동행하는 나날들이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깊어져만 간다는 것, 그리하여 세상으로부터 오해 받고 멸시당하고 비난을 사더라도, 어쩔 수 없이 이 "미친" 사랑이 갈수록 은밀하고 아름다워져만 간다는 것, 그분과 동행하는 나날들이 이어질수록, 그분과 나 사이에서만 공유하는 작고 비밀한 역사들이 여기저기 꽃을 피운다는 것, 그리스도와 나의 관계가 더 이상 죽은 것이 아니라, 나의 영혼과 내면과 삶 속에서 매 순간 살아 있다는 것, 그리고 영원히 산다는 것, 그분과 점점 더 친밀해져 갈수록, 그분의 의지와 뜻과 마음과 그 모든 것들이 너무도 경이롭고 고귀하고 찬란하여서, 갈수록 그분의 말씀을 내가 실로 목숨 바쳐 영접하게 된다는 것, 그분의 사소한 말씀 하나조차도 내가 절대 허투루 그냥 듣지 않게 된다는 것, 그 말씀으로 말미암아 "그분께서 기뻐하시는 모습"대로 변화하고 성장하고 살아가고자 하는 충성과 열망이 갈수록 높아져만 간다는 것.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아이와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마18:3)


그분의 말씀을 내가 결코 허투루 그냥 넘길 수가 없다는 것. 나의 영(Spirit)이 이 말씀을 엎드려 영접하게 된다는 것. 그리하여 자기를 돌아보되, 나는 정말로 어린아이와 같은가? 그 아이들이 한 치의 감춤도 숨김도 부끄러움도 없이,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아버지 앞에서 드러내되, 아버지께서 그들의 순수함으로 인하여 크게 기뻐하시는 바와 같이, 내가 삶의 모든 순간마다 아버지를 사랑하는 마음이 정말로 한 점 부끄럼이 없단 말인가? 나의 사랑이, 나의 열망이, 나의 기쁨이,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거룩하신 이름 앞에서 감히 돌아보건대, 하늘에서 내려온지 얼마 되지 않은 저 순결하고도 찬란한 영들과 같단 말인가? 그리하여, 나는 오늘도 깨닫는 것이다. 그분은 분명히 말씀하셨다는 것 : "결단코", "결단코" 라고. 그 말씀은 즉, "어른은 절대로 천국에 못 간다"는 것이다. 아, 큰일났구나. 나의 마음과 나의 내면과 나의 정신이 육에 물들고 오염되고 변질되어서, 어린아이와 같지 못하구나. 그러므로 내가 어른의 마음으로 어린아이를 내려다보는 것을 크게 경계하되, 오직 저 아이들에게서, 순수한 영혼에게서, 주님을 영접하고 사랑하고 그분의 품 안에 안기는 것 하나하나를 배워야만 하겠구나. 그러한 마음으로, 말씀을 영접한다는 것.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니." (마18:5)


어른은 어린아이를 "내려다본다." 그들의 동심을 바라보면서 귀여워하고 예뻐하지만, 그것 자체가 곧 "미숙한" 존재를 바라보는 깊은 무의식적인 시선이다. 나는 이것을 뼈저리게 느꼈다. 어른은 어린아이를 예뻐하지만, 어린아이를 "경외"하지 않는다. 경외란, 오직 신에게만 바치는 것이기 때문이다. 어른은 어린아이로 인하여 "경이로움"을 느끼지 않는다. 그리하여 어른은 어린아이를 마치 "그분"을 보는 듯이, 엎드려서 경배하고 찬양하려는 마음을 품지 않는다. "내려다보는" 것에 익숙해졌기 때문이다. 어른의 껍데기에, 육에, 익숙해졌기 때문이다. 아, 이것이 얼마나 귀중한 말씀이란 말인가. 나는 진정으로 "미숙한" 존재를 내려다보는 그 어른의 시선이 한 점도 없다고 할 수 있는가? 나의 부끄러움이, 그분의 이름으로 저들을 영접하게 할 만큼 진실한 것인가. 이 모든 것은 아주 간단한 문제 하나 때문으로 말미암는다 : 어른은 "그분께서 어디에 계시는지", "그분께서 누구와 함께하시는지", "누구로, 무엇으로 인하여 크게 기뻐하시는지", "누구로, 무엇으로 인하여 사랑하시는지"를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영의 눈을 뜬 자는, 모든 것을 알 수 있다. 그분께서 누구의 곁에서 동행하고 계신지, 그분께서 어디에는 계시고 어디에는 계시지 않는지. 말하건대, 세상에 속한 자들이야 그분을 영접치 아니하더라도, 감히 우리들이 그분께서 계시고 함께하시는 앞에서 경외하지 않을 수 있을 것인가. 그토록 "내려다보는" 시선에 길들여진 나머지, 풀잎 하나, 꽃잎 하나, 나뭇잎 하나, 이슬 하나, 햇빛 하나조차도 그분께서 이루시지 않은 것이 없거늘, 감히 내가 그 모든 생명들을 오만한 시선으로 내려다보는구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라." (마25:40)


우리들은 이 말씀을 그저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수준의 그저 그런 교훈 따위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나는 이 말씀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고 있노라고 감히 말한다. 또한 그분은 말씀하셨다 : "세리들과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리라."(마21:31) 그 순간, 나는 사람의 언어로는 차마 다 담아낼 수 없는 거대한 부끄러움을 느끼고 마는 것이다.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는 이 에고(ego)의 교만함이 극에 달하여서, 그분께서 사랑하시고 함께하시는 자들을 내 발 아래에 두려고 하는 본능적인 오만함과 교만함이 여전히 내 안에 남았구나. 지금의 나의 존재가, 나의 모습이, 나의 내면이, 나의 영혼이, 나의 삶이, 나의 일상들이, 그분께서 보시기에 "세리들이나 창녀들"보다 낫다고 하실 것인가? 아, 이 얼마나 말도 안 되는 교만함이란 말인가. 나의 모든 순간들이 다 빛을 사랑하고, 빛을 증거하노라고,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이" 말할 수 있을 것인가. 나의 어두움이, 죄가, 악이, 여전히 살아서는 넘실거리되, 끊임없이 나보다 낮은 자가 어디에 없나, 어서 찾아서 저놈을 내 발 아래에 두어서 내가 저보다 더 높아져야지, 하는 시선이 살아서는 꿈틀거리는 모습을 고요히 지켜본다. 천상의 권좌에 앉아 계신 근엄하고 신성한 그분께는 찬양하고 경배하는 주제에, 그분께서 정작 함께하시고 사랑하시는 자들을 볼 때에는 내려다보고, 깔보고, 무시함으로 말미암아, 감히 그들에게 "봉사"해야겠다는 생각 따위를 하게 된다. 봉사? 무슨 봉사? 병자가 주제도 모르고서 누가 누구를 고치려 든단 말인가?


헤아릴 수조차도 없다. 내가 인용하는 그분의 말씀들은, 널리 잘 알려진 유명한 것들밖에 없다. 결국 이 모든 말씀들을 영이 영접하매, 나의 입에서부터 이 한 마디가 흘러나오는 것이다 : "큰일 났다. 정말 큰일났다." 사태의 시급성을 내가 절실히 느끼는 것이다. 사람은 언젠가 죽는다. 나는 반드시 죽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언제 죽을지 알 수가 없다. 오늘 죽을지, 내일 죽을지, 그리고 그 죽음의 순간을 그 누구도 대신해주지 않을 것이며, 나는 홀로 죽음을 마주하여야만 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치 다 깨달은 것처럼", "마치 구원을 맡겨놓기라도 한 것처럼", "영원히 죽지 않기라도 할 것처럼", 그리 살아가는구나. 나의 오늘이 마지막이라면, 아무 생각 없이 산 오늘 하루로 말미암아, 과연 내가 천국에 입성할 수 있을 것인가. 아니, 천국은 고사하고서라도, 내가 그토록 사랑하고 열망하는 그분께서 보시기에, "아무 생각 없이 산 나의 하루"로 말미암아 기뻐하실 것인가. 죽음이라는 실존하는 인간의 근원적인 시험을 정면으로 마주하여 통과한 형제들은, 안으로 깊어진다. 조용해진다. 고요해진다. 그리하여 그들은 마침내 기도하지 않는다. 삶의 모든 순간들이 기도가 되기 때문이다. 마침내 우리들은 묵상하지 않는다. 살아서의 모든 순간들이 묵상이기 때문이다. 마침내 우리들은 찬양하지 않는다. 내 안에서 매 순간 흘러나오는 모든 생각과 감정들이 전부 다 그분을 향한 찬양으로 흘러나오기 때문이다. 나의 정신은 선명히 그분께로 집중된다. 나의 의식은 선명히 깨어서 그분 안에 거한다. 나의 내면은 오로지 그분을 사랑하고 또 사랑하고 또 사랑하는 것으로 가득하다. 그리하여 일상 속에서 마주하는 모든 것들로 말미암아 그분의 음성을 듣고, 그분의 가르침을 영접하고, 그분의 인도하심을 배운다. 마침내, "인생이라는 이름의 허상을 버리고, 삶(Life; 생명)이라는 이름의 진리"와 하나가 된다.



참된 신앙의 길을 걸어가는 모든 영혼들은, 종교 불문하고 전부 다 나의 형제이자 그분의 형제들이다. 나는 형제들을 위하여 나의 자그마한 노하우 하나를 꺼내어 바치고자 한다 :


"나의 이름으로 하려고 하지 마라. 나의 힘으로 하려고 하지 마라. 나의 의지로, 나의 용기로 하려고 하지 마라. 내가 실천하여 행하려고 하지 마라."


영혼의 어두운 밤을 통과하면서, 내가 감히 그분의 겟세마네의 기도를 흉내내었다. 미천한 수준으로. "아버지, 저는 여기서 어떻게든 하루하루 버틸 터이니, 제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고귀하고 의로우신 뜻을 이루소서." 감히 그 기도의 무게가 얼마나 무거운지 상상조차 하지 못한 주제에, 그분을 사랑하는 어리석고 순결한 마음 하나로, 어두움 전체와 맞서 싸우느라 기진맥진한 매일의 새벽의 끝에서, 잠들기 전에, 그리 고백하였다. 마음이 답답하여 잠들지 못하는 밤, 공허함과 쓸쓸함과 외로움과 오래된 고통과 슬픔과, 그러한 것들로 인하여 오래 잠들지 못하는 순간들과, 그럼에도 영은 선명히 깨어서는 하루가 영원 같은 그 적막과 고요를 살아서 통과하면서, 나는 죽지 않기 위해서 아버지를 찾았고, 나는 살기 위해서 그분의 이름을 붙들었으며, 나는 시험에서 버려지지 않기 위해서 어떻게든 기어서라도 처참한 모습으로라도 성령의 인도하심을 붙들었다. 나는 그 모든 밤들을 선명히 기억한다. 지금도, 지금까지도. 매일 새벽을 무사히 살아서 통과할 것이란 자신이 없었다. 죽지 않고 살 것이라는 확신도 없었다. 영원히 지나지 않을 것 같은, 이 고요한 지옥을, 무사히 살아서 통과할 것이라는 생각이 얼마나 오만하고 어리석은지를 절실히 깨달았다. 그리 하늘을 향하여 올렸던 기도들로 말미암아, 나는 점점 더 그분과 사랑에 빠지게 되었고, 그분과 한 걸음씩 친밀해져갔으며, 그리 걸어가는 걸음들 속에서 나는 마침내 서서히 그분의 빛을 "헤아리게" 되었다. 아, 아버지께서는 "해결해주십사" 하는 나의 기도는 모두 들어주지 않으시면서, 오직 내가 시험을 통과할 수 있도록, 내 안에 보이지 않는 "생명"을 그때마다 채워주사, 어두움 가운데에서 어두움에 속지 않고, 더욱 빛을 사랑하고, 더욱 빛을 증거할 수 있도록,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한"(요14:27) 평화와 기쁨과 담대함을 채워주시는구나. 보이는 것은 주지 않으셔서 나의 에고를 낮추시고, 보이지 않는 생명은 가득 채우셔서 나의 영혼을 영원히 살리시고자 하시는구나. 이것이, 하늘에 계신 나의 아버지의 고귀하신 뜻이구나. 내가 그토록 사랑하고 열망하는 그리스도께서 홀로 너무도 외롭게 걸어가신 길이구나.


나의 힘으로 되는 건 아무것도 없다. 그러나 오히려 그 가운데에서 내가 절실히 "신을 사랑하고, 신성을 열망하면서" 하루하루를 몰입해갈수록, 어느 순간 나는 한 고비를 넘기었고, 무너질 것만 같은 처참한 순간 가운데에서도 평화로웠으며, 절대로 그리될 수 없을 것 같은 삶의 순간 순간마다의 시련과 고난 가운데에서 놀랍게도 그분 안에 거하고 그분과 교제함으로 말미암아 "기쁠" 수 있었다. 나는 이것이 기적이라는 것을 잘 알았다. 이것이 내 힘으로 절대 가능힌 일이 아님을 뼈저리게 겪고 또 겪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가장 기뻤던 순간이 언제인지 아는가?


단 한 명의 영혼에게라도 "음성"을 전하기 위하여, 육적인 시선으로 보기에는 가망이 없는 수업과 강의들을 이어갈 적에, 나는 그 한 명의 학생에게 나의 모든 것을 걸었다. 나는 숨기지 않았다. 나는 그럴듯한 지식과 이론으로 학생 분을 "가르치지" 않았다. 다만 내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으로 인하여 기뻐하며, 삶의 모든 순간마다 그분과 동행하는 걸음 걸음들을 그저 보여주었다. 나의 사랑을, 나의 열망을, 나의 기쁨을, 못생긴 손짓 발짓으로 노래했다. 찬양했다. 증거했다. 고백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진심으로 노래하는 것뿐이었기에. 내가 그리 사는 모습들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것뿐이었기에.


그러던 어느 날, 수업을 마치고 어느 카페에서 그 학생 분과 영적인 대화를 이어가던 중에, 나는 무어라 말로 설명하기 힘든 기묘한 것을 느꼈다. 내 앞에 마주한 것은 그 학생 분이었는데, 학생 분의 눈동자 너머에서, 나를 깊이 들여다보시는 주님의 시선을, 내가 분명히 느꼈다. 눈동자 너머의 눈동자였다. 시선 너머의 시선이었다. 나는 선명히 느낄 수 있었다. 그분께서는, 마치 "기특하다"는 듯이, "자랑스럽다"는 듯이, 그리고 일견 "장난스러움이 느껴지는" 참 뭐라 말하기 힘든 시선으로, 한동안 나를 들여다보셨다. 그 순간은 짧았다. 나는 본능적으로 알았다. 아, 내가 알아차렸으니 이제 곧 떠나시겠구나. 그리하여 나는, 학생 분에게 하는 말이지만, 사실은 그분께 고백하는 마음으로, 말했다 : "신을 사랑하는 것, 오직 그것만이 전부입니다. 그것만이 모든 것입니다."


나의 모든 삶의 순간들이, 생애가, 그 모든 순간들을 내가 어떠한 마음가짐으로 지났는지, 그 모든 순간들마다 내가 어떠한 생각과 감정으로 통과하였는지, 온 세상이 다 모르더라도 오직 그분만은 알고 계시리라, 그리 충성하며 통과하였던 날들이었다. 그날, 그분의 시선은 분명히 내게 마지막 하나의 응답을 전하고 가셨다 : "내가 너로 인하여 기뻐한다." 그분께 기쁨이 되었다는 것이, 얼마나 큰 감동인지, 영혼을 얼마나 살게 하는지, 아마도 세상에 속한 사람들은 모를 것이다. 우리들만이 아는 비밀인 것이다. 비밀 아닌 비밀.



내가 생계를 해결하기 위하여 잠시 수업을 내려놓고 아르바이트를 구했을 때, 나는 일에 빠르게 적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능숙해졌다. 시작한지 2주째 되는 어느 날에, 이십대 초반 즈음 되는 외국인 소녀가 왔다. 어느 낯선 이국의 아이가, 돈을 벌겠다고, 그리 곱지 않은 일을 시작한다는 것이었다. 물론 나는 최선을 다했다. 소위 "동남아" 출신이라고 하여 무시하거나 내려다본다는 것은 내게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분께서 누구와 어떻게 함께하시는지를 내가 다 알건대, 어떻게 감히 그럴 수가 있겠는가. 그러나 "죄"를 짓지 않았다고 해서, 부끄럽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나는 내 할 일에 바빠서, 그 아이의 일을 더욱 도울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먼저 움직이지 않았다. 실천하여 행하지 않았다. 낮아지지 않았다. "너희 형제 중 가장 작은 자 하나"를, 그분을 영접하듯이, 그분을 모시듯이, 그분을 섬기듯이, 그리 온전히 행하지는 않았다. 그날, 나는 무척이나 부끄러웠다. 너무나도 부끄러웠다. 내가 여직 살아 있는 이유가, 나와 그분밖에는 모르는 이 모질고 고통스러운 나의 시험이 지금까지 계속 이어지는 이유를, 앞으로도 계속 이어져야만 하는 이유를, 그날 알았다. 아직 나는 죽을 수가 없었다. 죽기에는, 내 안에 부끄러움이 너무나 많았기에.


그리고서 며칠이 지난 어느 날, 일을 끝내고 그 아이가 퇴근하는 길에 인사를 주고받을 적에, 나는 또 한 번의 너무나도 귀중한 응답을 받았다. 그 아이의 눈동자는 나를 익숙해하고 편안해한다는 듯이, 그리 편안한 미소를 지으면서, 나에게 짧게 고개를 꾸벅이고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갔다. 나는 그 순간의 짧은 인사에서 또 한 번 그분의 응답을 들을 수 있었다. 오히려 나의 부끄러움으로 인하여 그분께서 기뻐하셨다는 것을. 그분은 진실로 "낮은 자를 그분을 대하듯이" 하지 못한 나의 부끄러움을, 용서하신 것도 모자라 그 마음 하나로 인하여 크게 기뻐하노라고, 잘 가고 있다고, 그대로만 가라고 말씀해주셨다. 그날, 나는 잠을 이루지 못했다. 자정이 지난 새벽 차를 타고 돌아오는 내내 벅찬 감동에 젖었다. 아, 이것이 그분께서 일하시는 방식이구나.


그리고 또 한 번의 가르침이 있었다. 그 아이가 혼자서 평소보다 더 많은 부담을 져야 하는 날이 있었다. 그 전날, 나는 "사장님이 지시하지 않으셨으니까", 대가를 바라지 않고 일찍 출근해서 도와야 한다는 영혼의 울림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망설였다. 물론 현실적인 이유들은 많았다. 출퇴근 거리가 멀진 않았어도 짧지도 않았고, 오전에 출근시간을 앞당기면 중간이 너무 크게 비었고, 기타 등등. 그러나 그것들은 죄다 변명일 뿐이었다. 또 한 번, 나는 부끄러웠다. 그분의 음성을 들었음에도 실천하지 못하는 모습이. 그러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2시간 일찍 출근해서 그 아이의 일을 도우라"는 사장님의 지시를 받은 것이다. 내가 먼저 청하지도 않았고, 다른 그 어떤 것도 없었는데도. 나는 알 수 있었다. 그분께서 심지어 내게 "실천할 수 있는 기회"까지도 먼저 마련해주셨구나. 나는 "숟가락으로 받아먹기만" 하면 되는구나. 선을 행할 의지도 일으켜주셨고, 실천할 용기도 마음도 일으켜주셨는데, 심지어 실천할 기회와 여건까지도 먼저 만들어주셨구나. 천상의 모든 권세와 영광을 다 가지신 분께서, 나 하나를 위해서, 내가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여" 천국에 입성토록 하기 위하여, 이토록이나 먼저 일하시고 움직이시는구나. 이것이 그분께서 일하시는 방식이로구나. 일찍이 알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분의 신성은 너무나도 고귀하고 아름답고 찬란했다.



하나만 하면 된다. 딱 하나만 하면 된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


그것 하나만 하면, 사랑할 마음도, 열망할 마음도, 기뻐할 마음도, 실천할 의지도, 의지를 따를 용기도, 용기를 펼칠 기회도, 모두 다 마련해주신다. 모든 순간에 모든 것들을 이끌어주신다. 성장할 수 있도록.


그리 나아가는 걸음 걸음들마다, 나는 점점 더 "그분께서 기뻐하시고 영광을 받으시는 아름다운 모습"대로 변화하고 성장해나갈 것이다. 나는 이제 이것을 온전히 믿는다. 그리하여 나의 부끄러움과 부족함으로 말미암아, 그분께서 일하시고 이루시는 것을 경외하고 열망하며 충성한다. 나를 통하여 이루시는 모든 은밀하고 아름다운 역사들로 인하여 기뻐한다.


"신성한 수동태."


내가 하는 것이 아니다.

나를 통하여 "신께서 이루시는 것"이다.

내가 유일하게 잘한 것 하나는, 오직 신을 사랑한 것 하나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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