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어 있음이 아닌 가득 차 넘쳐 흐름으로
모던 타로의 세계관에서, 타로카드는 메이저 아르카나 0번이 아닌 1번으로 시작한다. 이는 서양 오컬트 및 신비주의 세계관에서 근본적으로 마법(Magic)이란 의지(will)를 통하여 이루어지는 것이며, 바로 그 의지력을 자유자재로 능숙하게 통제함으로써 시공간마저 초월하는 것을 근본적인 목적의식으로 삼기 때문이다. 따라서 많이들 알려진 바와 다르게, 타로카드는 바보로 시작되는 것이 아니며, 애초에 그럴 수가 없다. 바보(Fool)는 "질료"이자 "모든 것 안에 내재한 신의 숨결"이며, 그것이 곧 펼쳐지고 이루어지고 드러나기 위해서는 "전문가"의 존재가 필연적이다. 즉, 질료 그 자체가 스스로 모습을 드러낼 수는 없다는 것이다. 신의 뜻은 위에서와 같이 "아래에서도" 이루어지는 것으로써 완성되며, 이를 위해서는 반드시 "통로"의 존재를 필요로 한다. 달리 말해서, 존재자는 존재를 통하여 완성되는 것이지만, 반대로 존재 역시도 존재자를 통하여 현현되는 것이기도 하다는 의미이다. 오히려 전자보다도 후자 쪽이 우주의 창조의 근본적인 본질에 가깝다고 해야 할 것이다. 바로 이 점에서, 결국 영지주의와 같은 이단들이 왜 근원적 진리에 가 닿을 수 없었는지가 밝혀지며, 오늘날의 기독교가 그리스도적 복음의 순수성을 잃어버린 이유 역시도 바로 이 성육신의 교리에 대한 필수불가결한 오해에서 비롯한다는 것을 우리는 이해할 수 있다. 그분의 최측근에서, 성경에 기록되지 않은 가장 은밀하고도 귀중한 가르침들을 남김없이 다 들었을, "저" 빌립마저도 마지막 순간에 그분께 한다는 질문이 "하나님을 (눈으로)보여주소서 그리하면 믿겠나이다"(요14:8) 였다. 이 말이 무슨 뜻인가? "(우리들이 이해 가능한 수준의 어떠한 특정한 형태와 모양 등을 지닌)신성이 그 자체로 객관적으로 존재한다"(물론, 이때의 '존재한다'의 의미는, 영적인 의미로서가 아니라, 전형적인 육적인 의미로서이다)는 인간의 폐쇄적이고 배타적인 관념적 인식체계 안에서의 이해 방식을 고스란히 나타내는 것이다. 결국, 영과 육은 서로 필수불가결한 관계에 있다. 영의 본질은 육의 현상을 통하여 현현되고 완성되는 것이며, 육의 현상은 영의 본질을 통하여 "성화"되는 것이다. 바로 이 점에서, (어떠한 원형적인 존재가 그 자체로 모습을 드러냄으로써)최초의 창조로 인하여 모든 것이 하나의 선형적 시간 구조 상에서 이루어진 결과, 라는 우리들의 인식 자체가 어떤 의미에서 세계를 "(인간 수준에서의)시간과 공간의 틀" 안에 가두려고 드는, 전형적인 죄성의 근본일지도 모른다는 말을, 나는 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는 반대로 이해되어야만 한다. 바보에서 마법사로 나아가는 과정이 아니라, 마법사가 바보를 다룸으로써, 현상 안에 깃든 본질을 "끄집어내는" 과정이어야 하는 것이다. 애초에 우리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실재가 보이는 현상으로 "전개"되는 과정과 원리, 곧 "(아버지의)창조"를 "눈으로 볼 수 없기 때문"인 것이다. 결국 이 말을 그분께서는 가장 자비로운 (빌립의 질문에 대한)응답으로 은유하셨다 : "네가 수 년간 나와 지냈을진대 어찌하여 나를 모른다고 하느냐? 나를 본 자는 내 아버지도 본 것이다."(요14:9)
이것은 무슨 말인가? 결국 탐구의 과정이 "아버지의 시선"에서 출발해서는 안 되며, 영적 여정의 시작이자 근본은 곧 "인간의 시선"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0번에서 여정이 시작된다는 것은 곧 (완전한 무無로부터)"빛이 있으라"고 말씀하심으로써 천지를 창조하신 아버지의 관점을 "내가" 이해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 즉, 인간의 인식체계 하에서 십자가의 죄성의 시간과 공간 중 가로축에 해당하는 시간축 자체가, 선형적 시간 구조 상에서의 과거에서 시작하여, 현재를 거쳐, 미래로 흘러가는 것이라고 인식하는 그 인간 특유의 "지향적 구조"를 띠고 있으며, 이 자체가 매우 큰 오류라는 것이다. 애초에 우리는 "과거"를 "경험"한 적이 없다. 시간은 오직 현재일 뿐이며, 그 현재를 기점으로, 과거는 저장된 기억이고, (그 기억이 기억이라는 형태로써 의식 안에 저장되고 재생되는 한)과거가 "실재"라는 증거는 이제 이 세계 어디에도 없다. 마찬가지의 관점에서, 미래 역시도 "상상된" 가능성의 차원일 뿐이며, 이때의 가능성은 곧 모든 존재, 사건, 현상들의 "잠재적 가능태"로써의 "아버지의 뜻"으로서의 가능성과는(오쇼젠 타로 불 2번 카드 참고) 전혀 다른 것이다. 전자는 에고적인 것이고 후자는 신적인 것이다. 마법은 애초에 "현상계"로부터 시작되어, 그 현상계를 초월하려는 "의지"의 구현임을 명심해야 한다. 마법을 통하여 "위에서부터 아래로" 내려오려는 것이 아니다. 이런 관점을 지니는 순간, 마법사의 의지력은 "통로"가 아니라 "(망상에 사로잡힌)괴물"이 된다. 따라서, 메이저 아르카나의 진행 과정들은 언뜻 보면 "시작에서 끝으로" 향하는 것처럼 보이나, 애초에 카발라의 생명나무의 상징체계 상에서 전체 세피로트를 "동시에, 완벽하게, 완전하게" 이해하는 것은 오직 신만이 가능할 뿐, 인간의 의식의 한계상으로는 각 세피로트(=마이너 아르카나의 각 숫자 카드들)들과, 그 세피로트 간의 연결성(=메이저 아르카나 22장)을 "초점화"하여 부분적으로(달리 말해, "현재적으로") 이해하는 것만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즉, 메이저 아르카나가 0번으로 시작되지 않고 1번으로 시작되는 것은, "신의 창조"를 이해하고자 하는 오컬트적 관점이면서 동시에, "이미 현현된 것을 역추적함으로써 신의 숨결을 끄집어내고 재가공하려는" 전통적-신비주의적 관점을 반영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는 엄밀히 말해서 모던 타로의 세계관이기에 가능한 일이기도 하다. 오쇼젠 타로의 메이저 아르카나를 "영적 진화의 본질적 과정"으로 이해할 때, 이는 수행자(=존재)의 능동적이고 의지적인 작업으로써 "비워짐"(=바보)이 이루어지는 것이 결코 아니라는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애초에 "비운다"는 개념 자체가 존재한다는 것이 바보의 경지에 도달하지 못했다는 증거다. "비움"이라는 목적을 가지고 수행한다는 것에는, 곧 "비움과 채움"이라는 이원성의 언어를 기반으로 한 인식체계 하에 의식이 구조지어져 있으며, 이러한 보이지 않는 거대한 망상적 실체에 의하여 나의 존재(이때, 수행자는 에고이며, 따라서 에고의 '존재성'은 영적 실재가 아니라 인식, 관념에 의존한다)가 결정지어져 있다는 보이지 않는 "감추어진" 죄성이 내재되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오쇼젠 타로의 영적 여정에서는, 1번이 아니라 0번으로 시작됨이 옳다. 깨달음이란 "완성"을 지향하는 것이며, 이는 "순환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며, "위에서 아래로" 내려오는 것이며(임재), "단 한 번의 절대적인 자각과 이로 인한 근본적 전환"이며, 이것은 한 번 이루어진 것은 곧 영원히 이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즉, 영원성 안에 순환이 있고, 순환 자체가 곧 영원성인, 이러한 영과 육의 관계, 위와 아래의 관계에 대한 완전히 새로운 "인식체계"(사실, 이 자체가 옳지 않은 표현이다, 그나마 "존재-체계"라고 해야 할지도 모른다)가 열리는 것, 그 시작 자체가 "전혀 예상하지 않은 때에, 전혀 통제되지 않은 형태와 조건과 방식으로" 나타나고 시작된다는 것을, 오쇼젠의 바보 카드가 상징하기 때문이다. 즉, 모던 타로의 세계관에서는 어찌 됐든 "우주적 법칙"으로서의 수동태 자체는 인정하면서도("위에서와 같이 아래에서도"), 이를 위한 실천적, 수행적 방법론으로써는 "능동태적" 접근 방식을 취하는 것이지만(이는 마법 자체의 특성이기도 하며, 어떤 의미에서는 필수불가결한 것이다, 모든 지식과 체계는 애초에 능동태적으로만 갖춰지는 법이다, 수동태는 애초에 지식이 필요하지 않다), 오쇼젠의 세계관에서는 그와는 정 반대로, 우주적 법칙 자체가 "본래적 의미에서의 참된 나 자신"이며("나는 내가 아니요, 오직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진정한 나다, 그러므로 나는 죽음을 맞이하지만, 이를 통하여 나는 영원히 산다"), 그것이 이루어지는 과정과 형태와 방법 역시도 "참-나"에 의한 "신성한 수동태"로써만 이루어진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즉, 애초에 오쇼젠 타로는 "방법론"이 아니다. 그저 "실재"이며, 그 실재를 묘사하는 "바람"(요3:8)일 뿐, "손가락"이 아닌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는 타로라는 도구 자체가 바로 그 손가락을 해결하기 위하여 존재하는 일종의 고육지책일지도 모른다. 아마 그런 것치고는 제법(꽤나) 효과적인 도구일 것이다.
모던 타로의 세계관에서 바보는 사실상 "잠재성", "(가능성 있는)신인", "행운" 등의 긍정적인 의미로 애써 포장하려 하지만, 그 실재는, "잠재성"이란 곧 "불확실성, 공포"와 같은 의미이며, "신인"이라는 것은 곧 "상식 밖의 돌연변이"와 같은 뜻이고, "행운"이라는 것은 돌발, 불안정성, 통제 불가능함 등을 의미한다. 즉, "미친" 것이다. 바보는 곧 미침이다. 통제를 벗어나는 것이 곧 바보의 핵심이다. 바보에게 재능과 자질이라는 것은 애초에 안정적으로 통제된 것이 아니다. 완성된 것이 아니라는 의미다. 그리고 "인간"에게, 완성되지 않은 것은 없느니만 못하다. 예를 들어보자. "신의 음성을 듣는 재능"이 충분히 준비된 수행자에게 주어진다면 그것은 축복과도 같겠지만, 하루 벌어 하루 사는 일용직 노동자에게 간다면, 그는 오히려 그것으로 인하여 온갖 골치아픈 일들을 겪을 것이며, 어떤 경우에는 매우 위험해질 수도 있다. 즉, "영혼"과 "신성"에 대해서 이해할 때, 우리들의 근본 죄성이라는 것은 곧 "넘어선" 것에 대해서조차도 "인간적인 수준"과 같은 "평등한 관점"에서 보려고 하는 착각이며, 곧 "위"에 속한 것에 대해서 다루고 이해할 때조차도 감히 "이해"라는 표현을 쓴다는 것 자체가 문제다. 신성이라는 글자와, 신성이라는 개념을 떠올리는 주제에, 정말로 "(언어, 지식, 관념으로)신성을 가리키고 표현하고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이 무의식 안에 깊이 자리잡고 있다. 이것은 말로 설명하기 대단히 힘든 지점이다. 이것이 에고의 최후의 교만함이며, 무의식 가장 깊은 곳에 감추어진 교만의 뿌리이기 때문이다. 즉, 이해를 넘어선 대상을 이해할 수 있다고 믿는 교만함이며, 곧 "신보다 내가 높다"는 죄성이다. 아담의 죄는 어디에 있는가? 선악과를 따먹은 행위에? 천만에 말씀. 하나님은 외적인 것이 아니라 본질만을 보신다. 아담의 "(하나님이 무서워서)숨은 행위"에는, "(하나님처럼 되고 싶어서)뱀에게 속아넘어간 척하며 열매를 따먹고자 했던 의도"가 숨어 있으며, 또한 "(내가 숨기면 하나님이 모를 것이라고 믿는)자만심"이 근본적인 뿌리인 것이다. "아담아, 네가 어디에 있느냐?"(창3:9)는 물음을 설마하니 신께서 정말 '몰라서' 하셨을 리가 있나. 너의 "좌표"를 정확히 보라, 는 의미다. 이는 곧 "이미 알고 있다"는 뜻이며, 이를 언급하신 것 자체가 "이미 용서하셨다(내지는 용서할 준비가 됐다 = 용서로 이르는 길을 열어놓았다)"는 의미다. 이는 곧 베드로에게 "닭이 울기 전에 세 번 부정할 것"을 미리 알려주신 주님의 뜻과 같은 맥락이다. 이해하겠는가?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보편적이고 현대적인 영성"을 지향한다고 믿는다. 그러나 그들의 대단한 착각 중 하나는, "영적 성장"이라는 게 마치 헬스장 가서 운동해서 근육 키우거나, 혹은 식단 관리해서 식이요법하면서 건강 챙기는 그런 수준으로 착각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자기 안에 봉인된, 자기를 넘어선 무엇"을 일깨우는 행위다. 애초에, "마법사" 수준에 이르지 않으면 그 여정을 시작조차 할 수 없다고 (신비주의자들이)말할 만큼, 매우 위험하다는 것이다. 깨달음이 뭔지도 모르는 주제에 깨달음을 욕망한다. "구원"이 뭔지도 모르는 주제에 구원을 달라고 한다. 구원에 이르기 위해서는 죄성의 문제가 해결되어야만 하며, 이는 오직 그리스도로 말미암아서만 가능하되, 그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계셔서 통치를 시작하셔야만 하며, 이는 내 에고가 완전히 십자가에서 죽고 (그분께서)부활하셔야만 가능한 일이되, 에고는 자기 수준을 넘어서는 시련과 고난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즉, "구원을 달라"고 신께 청하는 것은 곧 "나를 넘어서는 압도적인 시련과 고난을 달라"고 기도하는 것과 같은 맥락이라는 것이다. 인간의 언어로는 전자를 요청했지만, 어차피 인간의 언어는 신께 가 닿지 않는다(너무 미개해서). 신께 가 닿는 것은 그 언어를 사용하는 사용자의 의도, 그러니까 "발화자의 의식 에너지" 그 자체다. 이 자체가 영의 시선에서 보면, 정말로 불가능한 일이 일어난 기적 그 자체다. 나를 넘어선 분께서 어떻게 그분보다 명백히 "열등한" 내 "안에" 거하실 수가 있나? 이것이 어떻게 가능하지? 10 안에 1000이 어떻게 담긴단 말인가? 그러나 "인간으로는 불가능하나 하나님으로는 무엇이든 가능한"(마19:26) 법이다. 그리스도의 임재와 역사(부활)는 애초에 "위"에 속한 일이며, 아버지께 주권이 계신 일이지, "나"의 의지와 능력대로 진행하는 "아래"에 속한 일이 아닌 것이다. 이 말 자체가 너무 당연한 것이어서 읽는 입장에서는 "뭐 저렇게 당연한 말을 있어 보이게 하나?"고 느낄 수 있다. 그러나, 아니다. "의식적"으로는 알고 있을지언정(인식), 무의식적으로는 "이해"하지 못했다. 받아들이지 못했다. 나는 영의 차원에서 이야기하는 것이다. 절대 다수의 사람들은, 특히나 수행자들의 상당수 혹은 대부분 혹은 전부는, 진리를 "내려다본다." 진리를 "엎드려 경배하고 경외하며 올려다보지 않는다." 이것이 근본적인 문제다.
바보는 곧 "깨어남"이다. 내 안에서, 에고의 통제와 지배를 넘어선, 인류 집단의 거대한 두려움, 공포, 불안의 어두운 에너지로부터 각 개인들의 개체의식이 지배, 장악, 기만당하는 그 거대한 망상적-의식적 구조 전체가, 절대 감당 불가능한 무언가가 그 안에서 "흘러 들어가기" 시작하여, 그 세계 전체가 완전히 붕괴되기 시작한다는 뜻이다. 어떤 의미에서 "시작"은 곧 "공포"다. 예를 들어보자. 우리는 학교에서 수업을 들을 때나 직장에서 반복된 일을 할 때에는 마음에 그 어떤 "변수"도 없다. 그렇기에 지루하거나, 심심하거나, 아무튼 평온하다(이때의 평온은 '생각의 틀이 에고 수준에 고정되어 움직이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런데 갑자기 건물이 무너지거나, 천둥벼락이 치거나, 커다란 사고가 나면, 그때 우리의 마음은 즉시 "깨어나서", 평소에는 절대 느낄 수 없는 비상한 내적 체험(예: 혼란, 공포, 두려움, 놀람 등)을 연속적으로 느낀다. 보라, 똑같은 "내적세계"인데, 이렇게나 다르다. 이 "놀란 상태"가 곧 "에고로부터 잠시 벗어난 의식 상태"다. 그러나 대다수의 사람들은 이것을 의지적으로 통제하지 못하고, 또한 인식하지도 못한다. 그러나 바보는 이를 자각하는 것이다. 진정한 의미에서의 바보, 오쇼가 이야기한 "3단계의 바보"는 단지 모른다는 것을 아는 수준이 아니다. 그건 그냥 초심자들에게 쉽게 이야기하기 위하여 그가 방편적으로 쓴 표현일 뿐이다. 이는 "에고의 시선에서, 에고를 넘어선 무언가가, 에고 자신을 변화시키고 있음을, 자각하기 시작한 상태"이다. 달리 말해서, 신성을 드디어 "느끼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초기 단계에서 이것은 오히려 두려움이나 혼란, 동요 등에 가깝다(달 카드). 애초에 이것은 당연한 일이다. 구원받은 자의 평화와 기쁨은 오랫동안 자기를 부정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며 그리스도와의 합일과 하나됨과 이로 인하여 살아서 아버지와 하나되기를 열망하며 그리 걸어간 자에게 주어지는 최종적인 은혜다. 그런데 이것을 시작 단계에서 곧바로 기대한다는 것 자체가 죄성이다. 나는 이것을 반복해서 강조하고 싶다. 바보 카드의 핵심이 사실상 여기에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 안에 있는 의식 상태(낮은 곳에서 높은 곳을 엎드려 경외하는 것)"가 아니라, "하나님 바깥에 있는 상태(높은 곳에서 낮은 곳 전체를 내려다보고 감시하고 통제하는 것)"에 있는 것, 이것이 곧 에고이며, 그 에고는 인류가 형성한 집단적 "인식 체계"와 자신을 동일시하고 있으며, 이는 곧 지식에 근거하며, 지식은 개념에 근거하며, 개념은 생각(마음의 작동)에 근거한다. 이 자체가 이미 "보이지 않는 감옥에 갇힌 상태"다. 따라서 이 상태에서는 첫번째로 자기가 "갇혔다"는 것을 알아차리는 게 우선이요, 두번째로는 탈옥하기 위하여 뭐라도 발버둥을 계속 치는 것이요, 마지막이자 세번째로는 "깨질 때까지 계속하는 것"이다.
수행자들은 잘 알겠지만, 애초에 "똑똑할수록" 바로 이 무의식적-의식적 인식체계에 갇힌 채로 의식과 마음이 기계적으로(프로그래밍된 대로) 작동되는 상태, 그리고 이를 일으키는 에고의 구조 자체를 "깨뜨리기가"(정확히는, "깨뜨려지기가", 더 정확히는, "깨뜨려짐 당하기가", 더욱 정밀히는 "깨뜨려짐 당하는 것을 용납하기가") 죽기보다도 더 어렵다는 것을 알 것이다. 이는 똑똑함 자체가, 그러니까 "영리함" 자체가, 자기 바깥의 집단성과 자기를 동일시하는 무의식적인 열등감, 죄의식의 발로이며(분별의 욕망), 이는 곧 지식에 대한 집착이고, 지식 자체가 "존재를 바깥에서 감시하려는, 세계를 세계 위에서 내려다보며 통제하려는" 시도의 결과물이고, 이 지식에 대한 집착이 강할수록 결국 자기 안의 어두움(열등감, 죄의식)이 더욱 깊고 튼튼하다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즉, 똑똑한 사람일수록 "통제에서 벗어나는 것"을 죽기보다 두려워한다. 똑똑한 사람일수록 자기가 아는 것이 부정당하는 것은 곧 "공포" 그 자체다. 세속에서야 똑똑할수록 매우 많은 득을 보겠지만, 영적 세계에서는 그 위계가 완전히 전복되어서, 머리가 똑똑할수록(마음이 내용물로 가득 채워져 있을수록) 온갖 오염물질들을 덕지덕지 묻힌 채로 깨끗한 흰 천 위를 한 점 얼룩 없이 지나가는 과정을 연습하는 것과도 같으며, 온갖 무거운 장애물들을 온 몸에 걸치고서는 하늘을 나는 연습을 하는것과 같다. 반면에 마음이 가난한 자, 다시 말해 "지식에 대한 집착이 없거나 적은 자"(실질적으로 에고의 수준에서는 집착이 없을 수는 없다,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심지어 그 정도의 차이도 '겉으로 드러나지 않은' 것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그리하여 마음이 딱히 "내용물"에 의하여 영향을 받지 않는자, 더 나아가서 내용물(지식, 인식)을 넘어서는 "위"로부터 오는 것들(생명, 체험, 교감 등)에 본능적으로 반응하고 움직이는 자...... 들은, 세속에서는 매우 손해를 보겠지만, 영적 세계에서는 출발선 상에서 압도적으로 유리하다. 보라, 결국 크리스천에게 구원이란 오직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리고 그 그리스도께서는 "내 안에" 계시는 분이다(요14:20). 그리스도와 하나되는 것이 곧 구원이며, 하나되기 위해서는 그분과 사랑에 빠져야 하고, 사랑에 빠지기 위해서는 교감해야 하고, 교감하기 위해서는 연결되어야 하며, 연결되기 위해서는 일단 접촉해야 하고, 접촉하기 위해서는 시도해야 하고, 시도하기 위해서는 어디 계신지 방향이라도 똑바로 잡아야 하고, 방향을 모른다면 아는 자의 말을 들어야 한다. 그런데 이른바 "똑똑한 자"들은, 구원의 유일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바로 옆에서 그와 함께하고 계심에도 불구하고, "아, 제가 지금은 좀 바빠서요, 잠시 기다리세요"하고는, 성경 연구에 코를 처박고 있는 것이다(요5:39-40). 참으로 우스우면서도 비극적인 모습이다. 왜 이런 사태가 발생하는가? "존재 상태"가 다르기 때문이다. 마음이 가난한 자는 모든 것을 "올려다본다." 다시 말해, 영접한다. 하늘을 "인식"하지 않는다. 하늘과 교감한다. 바람을 "분석"하지 않는다. 바람과 교감한다. 현상과 사건을 "이해"하려 하지 않는다. 체험하고 받아들인다. 별빛을 "분별"하지 않는다. 별빛에 몰입한다. 꽃의 "이름과 특성" 따위를 묻지 않는다. 꽃 "안으로" 들어간다. 이것이 존재 상태의 차이다. 다시 말해, "작동 방식의 차이"이다(존재는 곧 작동이고, 작동은 에너지다; 존재와 실재는 다르다, 영은 실재이고, 존재는 혼의 차원이거나 그보다 아래다). 전자는 주님을 "분석"하고, 후자는 주님과 "교감"한다. 이해되는가? "움직임"의 차이라는 것이다. 서울이라는 목적지 자체는 똑같은 것이다. 그러나 자리에 앉아서는 서울이 내게로 오기를 기다리는 자와, 자세한 길은 모르더라도 일단 위로 올라가다 보면 언젠가 이르겠지 하고 한 걸음씩 걸어가는 자의 차이인 것이다. 그 주님과 이 주님이 달리 계신 것이 아니다. 애초에 그리스도의 신성은 그런 "육적인" 수준으로는 알 수 없다. 그분은 영혼(soul)으로만 교감할 수 있고, 영혼이 그분과 교감하기 위해서는 영(spirit)이 정렬되어야 하며, 영이 정렬되기 위해서는 일단 "접근 방식(의식의 작동)"이 근본적으로 달라야 한다. 높은 경지에 이른 수행자는 영을 움직여서 의식을 이끌지만, 에고 수준이거나 초심자에게는 그 반대 방식이 훨씬 편한 법이다(사실, 영은 '내 맘대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다, 이해를 돕기 위하여 표현을 그리했을 뿐이다).
결국, 모든 것은 단순하다. 어떤 "상태"에 머무르는가, 의 차이다. 바보는 이 하나를 전하는 것이다. "인식(지식)"의 상태(바깥)에 있지 말고, "자각(영혼)"의 상태(내면)에 있으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 내면으로 전환되는 첫번째 길은, 바로 "앎이라는 착각, 망상"에 자신이 빠져 있음을 정확히 보고, 자신이 "얼마나 무지한지"를 철저히 체험하는 것(낮아지는 과정, 회개)에서 비롯한다. 그리스도를 진실로 영접한 자는, 그 이전에 자신이 옳다고, 안다고 믿었던 그깟 지식과 인식과 분별 따위들이 (그분의 신성의 빛에 비하면)얼마나 부질없고 공허하고 허망하고 불완전하고 '미개'한 것인지를 철저히 체험한다. 그리하여, 이전의 자신의 상태가 얼마나 "죄성에 깊이 물들어 있었는지"를 철저히 반성하게 된다. 반성, 이라는 단어로는 차마 표현이 되지 않을 정도로.
아는 자는 살아서는 이익을 얻으나, 죽어서는 멸망할 것이다.
모름을 받아들이는 자는 살아서는 손해를 보나, 죽어서는 영생을 얻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