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 : 실존을 넘어 실재로

존재의 수직적 - 다층적 구조에 대하여

by 생명의 언어

"깊은 명상에 잠길 때, 그의 의식은 산산조각이 나서 형체를 잃어버린다. 그리고 그 깨어진 의식의 수천, 수만 개의 조각들이 무의식의 어두움을 배경으로 하여, 별처럼 빛나고, 그 별들이 모여 은하수를 이룬다. 이것이 우리들의 존재이다. 이것이 우리들의 영(Spirit)이요, 영혼(Soul)이다."


오쇼젠 타로의 카드들의 이미지는 결코 그냥 감상하라고 있는 게 아니다. 그것은 하나의 관상이다. 이때의 관상이란, 단순한 이미지나 심상이 아니며, 나의 의식이 에고와 마음의 차원에서 벗어나 더욱 깊어지고 순수하게 몰입할 적에, 영혼이 깨어나며, 그 영혼이 빛을 내고, 빛과 교감하면서, 그렇게 이루어지는 내적 체험들의 총체를 이야기한다. 즉, 영혼의 느낌과 체험이 곧 관상이며, 그 관상에 깊이 몰입하는 것이 바로 관상기도이다. 비언어적 기도, 그러니까 "언어(에고-마음)를 넘어선" 세계로의 진입을 연습하고 훈련하는 것 말이다. 진리에 관한 한, 텍스트보다 이미지가 압도적으로 더 "가깝다." 텍스트는 그 본질상 폐쇄적이고 배타적인 닫힌 의미체계의 구조의 총체를 의미하지만, 이미지란, 그 닫힌 의미구조로부터 심상을 해방시켜서는, 이를 보다 깊은 영혼과 무의식의 세계의 뿌리와 직접 연결시키게 만듦으로써, 폐쇄적이고 배타적인 구조 내에서는 결코 이해할 수 없었던 자신의 의식 너머의 거대한 압도적인 무언가를 체험하게 만든다. 그리고 이렇게 체험됨으로써 "이해"되어진 것들은, 유한하고 불완전한 인간의 언어로는 더 이상 표현할 수 없게 될 것이다. 사실, 오쇼젠 타로의 해설서는 텍스트로 된 것이며, 책은 초심자와 입문자를 배려하기 위하여 만들어진 것일 뿐, 실질적으로 오쇼의 깨달음의 정수는 글이 아닌 그림 속에 "담겨" 있다. 에고의 의식 구조는 "관념화"되어 있으며, "언어로써 구조지어져" 있다. 따라서, 그 상태에서는 신성은커녕 자신의 영혼과도 교감할 수 없다. 영혼은 본래 "언어-초월적"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더불어 깊이 연습하라. 자신의 의식을 자꾸 언어와 관념에 연결시키지 말고, 언어를 넘어선 보이지 않는 "실재 그 자체"에 정렬할 수 있도록. 그 한 장의 그림을, 자신의 의식과 정신을 무장해제시키고, 생각을 비우고, 관념을 비우고, 오직 고요한 가운데 영혼으로만, 깊이 몰입해보라. "내가 이해한다"의 1인칭 능동태의 죄성을 버리고, "그분께서 나를 통하여 빛을 드러내신다"의 신성한 수동태로 공부"되어지는" 것을 느껴보라.


존재 카드는 어떤 의미에서 오쇼젠 타로 79장 전체를 통틀어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메시지일 것이다. 애초에 이것은 "관념"이 아니기 때문이다. 각각의 카드들은 이러저러한 의미이다, 라고 풀이하는 것은 결국 언어와 관념일 뿐이며, 이것은 손가락일 뿐, 그 손가락이 가리키는 실재 그 자체는 아니다. 마찬가지로써, 결국 존재라는 것은 언어와 관념이라는 도구로써 가리켜질 수 없으며, 그 언어와 관념이라는 도구를 사용하는 가짜 주인, 곧 에고(ego)와, 그 에고가 작동되어지는 무대, 곧 마음(mind)의 의식적 진동수의 차원에서는, 결코 진정한 "존재"를 만날 수 없다. 나는 이 지점에서 오쇼가 신이라는 이름 대신에 "존재"라는 표현을 쓴 이유를 이해한다. 사람들은 자꾸만 "신"이라는 어떠한 거대한 초월적인 관념에만 초점을 맞춘다. 그러나 그게 아니다. 내가 "아버지"라고 말할 적에, 그것은 물론 "인격적" 호칭이며, 신과의 "인격적" 만남을 지향하는 복음주의적 전통에 근거하지만, 이때의 인격이란 "에고적"이라는 말이 아닌 것이다. 신에게는 당연히 육신도 자아도 마음도 없다. 이때의 인격적 만남이란, "신성을 자신의 영과 영혼으로써 깊이 교감하는 체험의 구조적 총체"를 의미한다. 인격이란 곧 체험이다. 신성을 체험할 수 있으며, 그 지점에서, 애초에 초월과 영원이라는 인간 존재의 유한성을 넘어선 존재를 "체험, 교감"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인간과 유사한 "인격적" 형태로써 아버지께서 "스스로 낮추셔서 육신을 입고 모습을 드러내시는 것"이 필요한 법이다. 그러니까 결국, "그 아버지가 그 아버지가 아닌" 것이다. 아버지라는 어떠한 "개체적 형상"이 따로 있는 게 아니란 말이다. 이는 예수님께서 이르시기를 "나를 본 자는 내 아버지도 본 것"이라 하셨던 바로 그 부분과도 정통한다. 이는 "어떠한 단일한 개체 자체가 곧 신"이라는 우상 숭배가 아니다. 곧, 보이는 형상을 통하여, 그 형상이라는 그릇 안에서 설명할 수 없는 내재적, 초월적 원리로써 신과 완전히 하나가 된 바로 그 하나됨 그 자체를 만날 수 있다는 것, 그러니까 "보이는 것을 수단과 매개와 통로 삼아서 보이지 않는 초월과 영원과의 하나됨 그 자체를 만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때의 육은 결국 수단이요 매개다. 그분께 있어서, 자신의 인격성(예수님의 인성)은, 자신을 통하여 드러난 "아버지와의 완전한 하나됨"이라는 보이지 않는 신성을, 제자들에게 "만나게 하기 위한" 수단이요 도구에 불과했다. 그분께서 말씀하실 적의 그 말씀은 "영이요 생명"이며, 따라서 그때의 "나는...(I AM...)"은 명백히 그분의 인성 그 자체가 아닌, 그분의 인성을 "통로" 삼아서 그분의 보이지 않는 "신성(그리스도)"을 가리키는 주격이었던 것이다. 이것이 존재의 가장 위대한 비밀이다. 형상은 곧 수단이요, 매개요, 그릇이다. 그리고 그 그릇 안에 "어떤 격"이 담기느냐, 현현되느냐, 드러나느냐....(표현은 중요치 않다) 에 따라서, 아이러니하게도 그릇 그 자체의 "존재성"이 결정된다는 것이다. 그 그릇 안에 에고와 마음이라는 낮은 의식의 진동수가 담긴다면, 그 존재는 "투박하고 거칠고 오염되고 변질되고 더럽고 열등한 존재"가 된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그 가난한 그릇 안에 가장 위대한 "신성"이라는 생명이 담기어졌을 때, 그릇이 가난함으로 말미암아 그 신성이 더욱 찬란하게 영광을 받으시게 된다. 따라서, 엄밀한 의미에서, "그리스도만이 신성한 것"이지, 그분을 모시는 "성전 그 자체가 화려하고 고귀하고 신성할 수는 없는 법"이다. 교회는 가난한 곳이어야 하지, 교회 자체가 신성해서는 결코 안 되는 것이다. 신성한 곳에 신성한 분께서 임재하시는 게 아니다. 가장 신성한 분께서 가장 어둡고 가난한 곳에 임재하시는 것이 아버지의 뜻이다.


1. 존재는 수직적 - 다층적 개념이다

존재에 관한 한 가장 먼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이원성의 원리와 법칙에 의하여 구조지어진 3차원 시공간의 현상계적 개념으로서의 존재에 대한 망상"이다. 이것은 크게 두 가지의 의미를 지닌다. 첫째는 주관과 객관을 나누며, 둘째는 주관보다 객관이 우월하다는 인식이다. 그러나 이 자체는 "물질성"이라고 하기 어렵다. 원래 의미에서의 물질성이란, "보이는 것" 그 자체만을 의미하는 문자 그대로의 유물론적 개념을 뜻하며, 이때의 물질에는 엄밀히 말해서 특별히 왜곡된 것도 변질된 것도 오염된 것도 없다. 영지주의에서 물질성이 타락이라고 죄악시하며 영만을 추구할 때, 이때의 물질성은 곧 생물학적이고 물리학적인 의미로서의 물질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인간으로서의 존재 그 자체"라고 불러야 할 것이며, 인간의 존재는 곧 원죄와 죄성이라는 중심축에 의하여 구조지어진 것으로써, 이 구조 전체가 곧 자아(ego)와 마음(mind)이라는 무의식의 어두움에 지배, 장악, 기만당하는 의식 그 자체를 뜻한다. 쉽게 말해서, 인간 존재는 곧 에고요, 에고는 곧 의식과 같은 말이다. 이때의 의식이란 순수의식, 곧 자각과는 다른, 문자 그대로의 에고와 마음의 작동으로서의 표면적인 의식을 뜻한다. 결국, 존재라는 것은 어떤 "사물"이나 "물건"의 개념이 아니다. 존재라는 것은 애초에 분리될 수 없고 나뉘어질 수 없고 구별될 수 없는 것이다. 존재는 곧 "전체성"이다. 그 전체성은 오직 "주관(내면)"에 의해서만 드러난다. "물질"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물질이라는 것, 외부세계라는 것은, 우리의 "의식"이 그 자체로 드러난 것에 불과하다. 즉, 보이지 않는 "의식, 정신" 그 자체가 유일하게 실재하는 것이며, 그것을 일으키는 깊은 중심으로써의 영과 영혼과 순수의식만이 진정한 "존재"라는 것이다. 우리가 인식하는 "내면(마음, 의식)"이라는 것은, 중심축(영, 영혼, 순수의식)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외곽부의 거칠고 험한 "왕국의 땅"이며, 또한 "외부세계(물질계)"라는 것은 "왕국의 통치가 닿지 않은 최외곽부의 험지"로써, 우리의 보이지 않는 의식의 진동수가 더욱 낮아지고 열등해지고 투박해짐으로 말미암아, 보이는 수준까지 "격하"된 것에 불과한 것이다. 즉, 일체가 다 "나"다. 다만 그때의 나는 "존재"이며, 그 존재는 "수직적 구조"이지, 수평적 구조가 아니다. 공간이라는 것은 없다. 시간이라는 것도 없다. 존재하는 것은 오직 "수직적 구조" 그 자체뿐이다. 이것은 설명하기가 대단히 까다롭다. 예컨대, 포토샵의 레이어 개념과도 유사하다. 보라, 우리가 보는 화면은 "모든 레이어를 겹쳤을 때의 결과"이다. 그러나 그 레이어에는 깊은 층도, 얕은 층도 있다. 그 수십 개의 차원들이, 층을 이룸으로써, 마침내 우리가 보는 "가장 표면적인 화면(물질계)"이 드러나는 것일 뿐이다. 이때, 표면적인 차원들에서의 존재, 사건, 현상들은 그 자체로 독립적으로 생거나거나 사라지는 것이 아니며, 표면적인 차원은 심층적인 차원에 의하여 "일으켜진다." 원인과 결과의 관점에 가깝다. 육적 현상은 영적 현상에 근거하며, 영적 현상은 영적 본질에 근거하며, 영적 본질은 다시 신성에 의한다. 이러한 "심층적 구조"에 의하여 연쇄적으로 이루어지는 우주의 통치 구조 전체를 굉장히 단순화한 명제가 그 유명한 "위에서와 같이 아래에서도"이며, 다른 말로는 "색이 공이고 공이 색이며, 색과 공이 서로 다르지 않다"이다. 즉, "나"(에고, 개체의식)라는 최하위의 수직선의 끝과, "아버지"(신성, 근원, 초월, 영원...)라는 최상위의 수직선의 끝이 서로 "연결"되어 있으며, 이 수직선 전체가 말하자면 하나의 "정신"(Spirit)이고, 그 정신을 따라서 움직이는 능동적인 힘이요 에너지 그 자체가 곧 의지(WILL)이며, 이것이 바로 "아버지의 의지"라고 부르는 그것이다. 이 의지는 "위에서와 같이 아래에서도" 펼쳐지고 이루어지며, 아버지에 의하여 "발출"된 것이 여러 수직적 층위를 따라서 전개되고 펼쳐진 끝에, "나"라는 개체의식에게까지도 수렴하는 것이다. 그리고 다시, "나"라는 개체의식 안에서 이루어진 현상(생각, 감정, 행위, 말 등)들은 그 진동과 파장과 에너지를 일으키며, 이것이 다시 수직선을 타고 상승하여 아버지에게까지 이르는 것이다. 존재라는 것은 이러한 개념에 가깝다. 그나마 "개념"이라는 것으로 설명하자면 말이다. 기억하라, 존재란 "수평적 개념이 아니요, 수직적-다층적 개념"이다.


2. 존재성은 곧 "의식의 초점"이다.

존재라는 말 자체는 어떤 "고정된 불변의 실체"를 연상하게 한다. 그래서 나는 존재라는 말 자체를 별로 선호하지 않는다. 존재는 애초에 "흐르는 것"이다. 단, 그 흐르는 것은 보이는 차원의 현상의 유한하고 상대적이고 불완전한 것으로써의 변화를 뜻하는 게 아니다. 공(空)의 진리는 "현상계의 움직임"을 가리키는 게 아니다. 즉, 물질적인 것들이 다 불완전함으로 인하여 언젠가 흘러가고 변화하고 없어지는 것이니 이것의 허망함을 깨닫는 게 공의 본질이 아니란 말이다. 이것은 입구이다. 실체는 그 너머에 있다. 그것은 보이는 모든 것들이 보이지 않는 것에 근거하며, 그 보이지 않는 것이 다시 영원한 "순환"으로 인하여 유려하고 영원하게 흘러가는 것, 그 흐름 그 자체, 소위 "순리"라 부르는 그 절대적인 우주적 질서 그 자체, 질서가 곧 흐름이고 흐름이 곧 법칙이며 법칙이 곧 질서인, 그래서 질서와 법칙과 흐름이 같은 것인 바로 그것, 그 보이지 않는 "흐름" 그 자체, 이것을 곧 존재라 부르는 것이다. 존재는 고정된 게 아니다. 존재는 흐르는 것이다. 이때, 이 흐름은 곧 "아버지의 의지"이며, 또한 영원하고 초월적인 근원으로서의 성부 하나님께서 "모습을 드러내신" 것, 그러니까 그리스도(신성)인 것이다. 그러므로 현현된 신성과, 그 신성을 현현케 하신 근원은 하나다. 그리고 이 현현된 신성에 의하여 우주 전체에서 실재적으로 "작동하는 힘, 에너지, 의지"로써의 신성을 곧 성령이라 부르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프렉탈 구조"의 위대함을 체감할 수 있다. "영원, 초월"이신 성부 하나님은 중심축이며, 이것이 "나"의 존재에서는 영(Spirit)과 연결된다. 그리고 그 근원이 "현현하신" 신성이 곧 성자 그리스도이시며, 이것이 "나"의 존재에서는 영혼(Soul)과 연결된다. 마지막으로 이로써 실재적으로 "작동하시는" 신성이 성령이시며, 이것이 "나"의 존재에서는 순수의식(pure consciousness)과 연결된다. 즉, "위에서 이루어진 것은 아래에서도 이루어진다." 우주의 원자 하나를 보면, 우주 전체를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존재라는 것은 "단일한-고정된 한 개"가 아니라,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곧 "하나"이며, 그 하나인 것은 수직선으로 이어져 있고, 그 수직선의 최상위 층위에 가까울수록 "더욱 선명한 실재"가 되되, 그 수직선의 최하위 층위에 가까울수록 "불확실하고 불완전하고 불안정하며 모호한 개념, 망상, 허상"이 되는 것이다. 존재란 "의식의 초점"이다. 수직선의 여러 층위들 중에서 "나는 누구인가(WHO I AM)?"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어느 층위에 정렬시킬 것인가, 의 문제란 말이다. 소위, "동일시"의 문제다. 대다수의 사람들의 개체의식은 곧 "에고, 마음, 무의식, 육신"에 동일시되어 있다. 이 위계가 낮을수록 더욱 어두움에 쉽게 지배, 장악, 기만당하며, 어두움이 어두움을 낳고, 어두움이 다시 어두움을 일으키며, 일어킨 것이 또 다시 어두움을 강화하는 "노예적 구조"가 강력한 권세를 발휘한다. 그러나 상층부에 가까워질수록 점점 더 "개체로서의 나"라는 개념이 희박해지며, 곧 "모든 것을 현현케 하시며, 현현된 모든 것이 완전하고 영원하며, 그것이 다시 완전하고 영원한 근원으로 인하는" 이 모든 것, 보이는 것을 넘어선 보이지 않는 그 근원 자체, 실재 자체, 그러한 모든 것들이 다 "하나"인 바로 그 "하나"만을 경외하고 영접하게 되는, "신과의 동일시"로 상승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마침내 "하나님께서 실재하신다"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만이 유일한 실재이시다"로 귀결되는 것이다. 이것은 존재성에 대한 실존적 탐구와 수행적 지향의 끝에서 모든 영혼들이 도달하는 유일하고 절대적인 진리이다. "신이 존재하는가?"는 잘못된 물음이다. "존재 전체가 곧 신으로 말미암은 것"이 옳은 표현이며, 엄밀한 의미에서, "존재를 존재이게 만드는 근원 그 자체"는 오직 신이다. 이른바 "말씀" 말이다. 고로, 엄밀히는, 우리가 이해하는 존재란 존재가 아니며, 진정한 실체로서의 존재는 곧 "말씀" 그 자체이고, 말씀은 곧 신성이며, 그 신성을 드러내신 "절대적인 초월, 영원 그 자체"로서의 성부 하나님만이 곧 존재라고 봐야 한다. 그리고 그 하나님은 "천상에만 계신 분"이 아니시며, 존재의 수직적-다층적 구조에 따라 그분께로부터 말미암은 모든 "창조된" 것들, 곧 존재, 사건, 현상들로 인하여 "현현하신다." 결국, "밀도"의 문제다. 나뭇잎 하나에도 신이 계신다. 다만 그 "안에" 계신 신을, 나의 의식과 정신의 초점이 "충분히 상승되어 있을 때"에만 만날 수 있으며, 다만 이 역시도 일상적 체험을 통한 만남과, 신비체험 등 고밀도의 대상으로 인한 만남의 정도가 자연스럽게 차이가 날 뿐이다. 곧, "신성은 밀도이다."


3. 의식의 진동수의 임계점 : 경외

나는 오쇼가 신이라는 이름을 버린 데 대하여, 그가 단 하나의 절대적인 임계점을 결국 넘지 못했다고 본다. 존재를 드러내는 것은 곧 "수직선을 따라 상승하는 것"이며, 이 길 자체가 곧 "그리스도(신성)의 길"이되, 모든 영혼들이 걷는 길, 곧 "영적 성장의 근원적이고 보편적인 길" 그 자체이다. 존재를 드러낸다, 기보다는 차라리 "존재를 승화시킨다"에 가까운 듯하다. 예컨대, 술을 발효하고 나서, 한 번 증류할 때의 원액의 순수성과, 두세 번 증류할 때의 순수성과 또 다시 이를 숙성하여 깊은 질감과 맛과 향을 얻었을 때의 순수성의 농도와 밀도가 다른 것처럼 말이다. 보이는가? 발효된 상태 그대로의 술은 "존재성의 가장 낮은 상태"이며, 반대로 여러 증류와 여과를 거쳐서 숙성까지 마친 상태의 수십 년짜리 위스키는 "존재성의 가장 높은 상태"인 것이다. 존재라는 것은 이러한 개념에 가깝다. 그리고 이 "의식의 초점의 전환, 상승"은 오직 "진동수"에 의하여 결정되며, 이 진동수라는 것은 육적인 파동이나 소리 따위가 아님을 알아야 한다. 소리나 파동은 육이다. 그러나 진동은 바로 영(Spirit) 그 자체이다. 애초에 보이는 것 따위를 보이지 않는 것에 갖다붙여서 이해하려는 실수를 범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보이지 않는 것은 보이지 않는 실체(나의 영)를 통해서만 '이해되어져야' 하는 것이지, 보이는 허상(에고, 마음, 의식)이 제멋대로 '통제'하고 '소유'할 대상이 아니라는 뜻이다. 의식의 초점을 상승시키는 유일한 힘은 곧 "내재성"이다. 내면의 체험이라 부르는 바로 그것 말이다. 평상시의 생각, 감정들은 곧 "수직선"의 최하위 층위에 가깝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평상시에 나의 의식과 정신을 계속해서 집중하고, 깨어 있게 하며, 몰입하게 하는 순간, 아주 미세한 차이의 성장들이 조금씩 이루어지며, "정신은 승화"된다. 존재성이 상승한다. 이것은 매우 길고 지난하고 고통스러운 훈련을 통해서만 이루어지는 것이다. 한순간에 누구한테서 축복을 받았답시고 내 존재가 구원된 게 아니라는 말이다. 육적인 모든 행위들은 다 허상에 불과하다. 육이라는 수단과 매개를 통하여 육을 넘어선 영의 실재에 대해서 근접해 나아갈 수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는 것이다. 기도 그 자체가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된다. 기도는 수단이며, 목적은 "그분과의 하나됨"이다. 이 사소한 "초점의 차이"가, 나중에는 곧 이단이냐 정통이냐의 차이를 결정할 것이다. 이렇게 나의 영이 깨어나기 시작하다 보면, 어느 순간 "임계점"에 가닿을 것이다. 이때, 그가 그 압력을 통과하여 "빅뱅"을 일으키게 된다면, 이것이 소위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며, 단 한 번의 절대적인 그분과의 연결, 하나됨을 통하여, 이미 그분을 통해서 완전한 복음적 진리가 이루어졌음을, 구원이 이루어졌음을 내 안에서 "빅뱅처럼" 한순간에 폭발하여 터뜨리게 된다. 임계점을 넘어서는 순간, 수직선의 "하위"와 "상위"가 결정된다. 아무리 높더라도 하위 중의 상위는 결국 다 부질없는 것이되, 아무리 낮더라도 상위 중의 하위는 매우 고귀하고 경이로운 것이다. "임계점"을 넘어서야 한다. 그리고 그 임계점을 넘어서게 하는 정신과 의식의 힘은, 결국 "신의 언어"를 통해서만 발현된다. "존재"라는 언어를 대상으로 할 때는, 사람의 의식과 내면은 신성해지는데 한계가 있다. 그러나 "아버지", "그리스도", "성령", "십자가", "부활", "축복", "영광", "은혜", "경외", "경이", "열망", "기쁨"...... 이러한 "신적 언어"를 깊이 교감하고 받아들이고 공명할 때, 비로소 우리들의 의식의 진동수는 "기하급수적으로 상승"되며, 이때 임계점을 넘어서는 체험을 자주, 많이, 되풀이해서 하게 될수록, "그분의 부활을 통하여 나의 존재가 거듭나는" 단 하나의 절대적인 구원의 역사가 "폭발"할 가능성과 확률과 비율이 급격하게 높아질 것이다. 운동을 할 적에, 10g밖에 안 되는 물체를 아무리 백만 번을 들어봤자 아무 의미가 없되, 자신의 근력의 한계치에 맞는 20kg, 30kg을 단 서너 번, 열 번 남짓만 들더라도 근육의 급격한 성장이 이루어지는 것과 같이, 결국 "신의 언어"와 교감할 때에만, 우리 의식의 진동수는 "자극받고 높아지는" 것이다. 나는 이 점을 오쇼가 간과했거나, 혹은 알았더라도 그가 "영적인 현실주의자"였던 까닭에 "잠정적으로 포기"했다고 본다.그러나 나는 다르다. 나는 지금 시대에서 내 언어를 아무도 이해하지 못하고, 결국 빛을 보지 못한 채로 내가 죽는다 하더라도, 신의 언어를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모르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알기 때문이다.


이제 "아버지께서 실재하신다"는 "틀렸다."

이제, "오직 아버지만이 유일하게 실재하신다." 가 되었다.

진리는 "아는" 것이 아니라 "되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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