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 멈춘 시간의 시작
열두 살이 되던 봄, 저녁이 내려앉은 시골길은 고요했습니다.
학교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붉게 물든 노을은 천천히 사라지고 가로등 불빛이 하나둘 켜지기 시작했습니다.
차량도, 사람도 드물어 정적만이 감돌았고, 바람이 스치는 소리만이 유난히 크게 들려왔습니다.
나는 도로 앞에 멈춰 섰습니다.
그곳에는 보행자 신호등이 따로 없었습니다.
내가 위로 올려다본 차량 신호등은 분명 빨간색이었습니다.
아무렇지 않게 길을 건너려는 순간, 어디선가 달려오던 차가 시야를 가득 메웠습니다.
운전자는 신호등을 멀리서 주황불로 착각하고 속도를 줄이지 않은 채 달려오고 있었습니다.
눈앞에 다다라서야 그것이 이미 빨간불이었다는 걸 깨달았지만, 멈추기엔 너무 늦었습니다.
“끼이이이익―― 쾅!”
귀를 찢는 듯한 소리와 함께 몸은 공중으로 튕겨 올랐고, 곧 차갑고 단단한 아스팔트 위에 내던져졌습니다.
숨이 막히고, 세상이 뒤집히듯 흔들렸습니다.
그 순간 느낀 건 단순한 고통이 아니었습니다.
모든 소리가 멀어지고, 세상이 유리벽 너머로 아득하게 사라졌습니다.
비명도, 발자국 소리도, 경적도 닿지 않았습니다.
마치 시간 자체가 멈춰버린 듯했습니다.
눈을 떴을 때, 나는 병원에 있었습니다.
하얀 천장, 차가운 형광등, 기계음.
몸은 움직이지 않았고, 작은 호흡에도 통증이 몰려왔습니다.
목구멍에서 소리를 내보려 했지만, 입술의 떨림만이 내가 살아 있음을 알려주었습니다.
옆에 앉아 있던 엄마는 눈이 벌겋게 부어 있었습니다.
손을 잡고 울음을 삼키며, “괜찮아, 괜찮아…” 하고 끊임없이 속삭였습니다.
그 목소리는 차분하려 애썼지만, 떨림이 가득 담겨 있었습니다.
어린 마음에도 나는 알 수 있었습니다.
엄마가 이미 수없이 눈물을 흘렸고, 내 앞에서는 그저 꾹 참고 있다는 것을.
의사들의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머리 겉으로는 상처가 거의 없었지만, 머릿속에는 피가 고여 있었습니다.
수술은 어렵다고 했다. 위치가 깊고, 잘못 건드리면 생명이 위험하다고.
다행히 당장은 목숨을 건졌지만,
그 피가 신경을 압박해 앞으로 평생 전정 기능 장애를 안고 살아야 한다는 진단이 내려졌습니다.
또한 약물 치료를 평생 이어가야 한다는 말도 덧붙였습니다.
그날 이후 세상은 더 이상 평평하지 않았습니다.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땅이 물결처럼 일렁였고, 세상은 기울어졌습니다.
친구들처럼 마음껏 뛰는 건 불가능해졌습니다.
천천히 걷는 것조차 버거웠습니다.
사고 소식이 전해지자, 친척들 사이에서는 오래된 이야기가 흘러나왔습니다.
14년 전, 나와 같은 나이에, 같은 장소에서 친삼촌이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다는 것입니다.
밤이 깊자, 옆 동네에 살던 외할아버지, 외할머니가 병원으로 달려오셨습니다.
“우리 손녀야…” 하고 부르며 내 손을 잡던 외할아버지의 눈빛에는
놀람과 안도, 그리고 걱정이 뒤섞여 있었습니다.
친할아버지는 직접 오시지는 못했습니다.
대신 전화기 너머로 무겁고 떨리는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14년 전에도 네 친삼촌이 그 길에서 갔지… 같은 나이에, 같은 자리에서…”
그 말은 끝내 맺히지 못했고, 수화기 너머로 길고 깊은 침묵만 흘러내렸습니다.
그 순간, 낯선 두려움이 밀려왔습니다.
마치 멈췄던 시간이 되살아난 듯했고, 친삼촌이 가지 못한 길을 내가 대신 걷고 있는 것만 같았습니다.
살아남은 내가 기적처럼 느껴지기보다, 친삼촌의 그림자가 내 뒤를 따라오는 것처럼 무겁고 낯설었습니다.
엄마는 내 곁을 지키며 매일 기도를 했습니다.
“제발, 이 아이를 지켜주세요.”
나는 그 소리를 들으며 눈을 감았습니다.
그날 이후, 내 안의 시간은 멈췄습니다.
그리고 그 멈춘 시간 위에 아주 작은 불씨만이 남아 있었습니다.
그 불씨가 꺼지지 않기를 바라며, 나는 오늘도 하루를 버텼습니다.
사고 이후의 나는 예전과 달라져 있었습니다.
몸은 서서히 회복되고 있었지만, 마음의 시간은 여전히 멈춰 있었습니다.
그러나 멈춘 듯 보이던 그 시간은 곧 다른 그림자를 불러왔습니다.
그것은 아픔보다 더 깊은 공포였고, 나를 침묵 속으로 몰아넣을 새로운 시작이었습니다.
12살 여름, 퇴원 후
몇 달의 병원 생활을 지나, 여름방학 즈음
나는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바깥공기는 따뜻했고, 햇살은 언제나처럼 밝았지만,
내 마음속은 여전히 얼어붙어 있었습니다.
걸음을 떼는 순간마다 땅이 흔들리는 느낌은 여전했고,
병원 냄새가 조금씩 사라진 자리에도
불안감이 남아 있었습니다.
학교가 쉬는 동안, 나는 집 안에서 하루를 보내며
작은 불씨를 붙잡는 일에 집중했습니다.
책장을 스치듯 넘기고, 호흡을 고르며, 조용히 마음속으로
“나는 살아 있다”라고 되뇌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