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 일 잘해?

내 일을 잘하지 못하면, 내일부터는 뭐 먹고살아야 하는지 고민이 들었다

오르지 못할 나무는 잘라내는 게 속 편하다.

그대로 두면 쳐다보고 싶다.

쳐다보면 오르고 싶다.

오르지 못할 나무를 쳐다보는 일은 부질없다.

그러니 자르는 게 상책이다.

누구는 나무에서 떨어져도 보아야 나중에 더 높이 오르는 법이라고 하는데,

살아보니까 반드시 그런 것도 아니다.

떨어질 게 뻔한 나무는 오르지 않는 편이 되레 낫다.

그래서 오를 나무와 오르지 못할 나무는 구분해야 한다.


사실 내게 오르지 못할 나무는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나무를 오르지 못하는 내가 있을 뿐이다.

그러니 잘려나가는 나무는 잘못이 없다.

오로지 나의 잘못이다.

나는 나의 모자람을 여실히 드러내고자 나무를 잘랐다.

혹자는 나의 잘못을 감추려고 애먼 나무를 자른 것이라고 한다.

포기했다는 말이다.

그러나 나는 선택을 한 것이다.

선택과 포기는 한 끗 차이다.

포기를 잘하면 선택이 되고,

선택을 못하면 포기가 된다.

비록 내가 못 오르는 나무가 많은 건 절망적이지만,

어떤 나무를 잘라야 하는지는 잘 아는 건 희망적이다.

덜 고민하지 않고 더 행동하는 것은 절망에서 희망을 건져내는 길이다.

자기 객관화와 행동은 모자란 내가 가진 유일한 능력이다.


자기 객관화는 괴로운 일이다.

자신을 끊임없이 따갑게 채찍질하는 까닭이다.

서울에 있는 일간지에서 취재하고 기사 쓴 지 10년이 넘어가니 입질이 왔다.

이즈음이 되면 비슷한 입질을 받는 동료를 종종 보게 되는데,

그들이 고민 끝에 어떻게 행동하고,

그 행동이 어떤 결과로 이어지는지 보고서,

나라면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지를 재는 시기에 맞물려 밀려온 자기 검증의 시간이었다.


대뜸 1만 시간 법칙을 끌어와 빗대어 본다.

어느 한 데에 1만 시간을 쏟으면 그걸 잘한다는 그 법칙.

내 제 아무리 게을렀다손 치더라도,

10년이라는 기간은 취재하고 기사 쓰는 데 1만 시간을 들이고도 흘러넘쳤다.

그래서 느긋하게 외마디로 자문했다.


'그래서 이 일 잘해?'


선뜻 대답하지 못하는 나를 보면서 자세를 고쳐 앉았다.

이만치 시간을 들이고도 확신하지 못하고,

적어도 스스로를 설득하지 못하는 스스로를 마주하게 되었다.

둘 중에 하나였다.

노력을 안 했거나,

재능이 없거나.

전자라면 노력하면 되고,

후자라면 다시 태어나야 되는 일이다.

이 빌어먹을 자기 객관화 능력은 일호의 빈틈을 허락하지 않고 말했다.


'너는 다시 태어나야 해.'


이런 판단에 이르고 나니 무엇을 해야 하는지가 명확해졌다.

불확실한 후생을 기대하기보다,

이생에서 좀 확실한 삶을 사는 것이다.

그 길로 사표를 쓰고 언론사를 나왔다.

(사실 전직할 곳을 찾느라 그 길로 나온 건 아니다.)


다시 앞서 외마디 물음으로 돌아가면,

처음 스스로 질문을 마주하고서 나는 답을 알고 있었다.


'너는 이 일을 잘하(는 것 같)지 않아.'

(가여워서 '는 것 같'을 붙여주었다.)


알고도 대답을 숨긴 이유는,

그러니까 이 대답을 피하려고 한 이유는,

지난 10여 년의 시간을 부정하는 것이 두려웠다.

내가 이 기간 '노력을 안 했거나'가 되는 것은 더 아픈 일이었다.

스스로에게 퇴로를 열어주고자,

그래서 '재능이 없다'는 그럴싸한 결론에 이르는 데에 수년을 허투루 썼다.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다.

지금이라도 그때 기억을 아름답게 조작하고 싶은데 그러지 못하겠다.

자신을 제대로 바라보는 것,

내가 가진 유일한 능력인 줄 알고 살았다.

그렇지 않다는 걸 이제는 안다.


아직도 삶은 모르는 것투성이다.

가끔 언론사를 나온 게 잘한 일인지 모르겠다.

그저 잘한 일이라고 믿을 뿐.

현실을 좌우하는 것은 사실이 아니라 인식이니까.

기자를 하면서 마주했던 나무를 잘라내기 직전이 떠오른다.

당시 나는 자기 객관화의 희생양이 아니라 수혜자라고 믿었다.

그 과정에서 스쳐간 무수한 단상과 단편은 믿음을 합리화했다.

시간이 흐르고 기억이 희미해지면서 그때 왜 합리적이라고 여겼는지 무디어져 간다.

기록하다 보면 기억이 되살아날 것이다.

믿음이 흔들리지 않기 위해서 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