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례식장에서 자녀들이 추억을 나눌 수 있도록
80대 어르신 부부가 사무실을 찾아온 것은 지난가을이었다.
평생 모은 재산은 아파트 한 채와 예금 몇억이고, 슬하에 아들이 셋이 있는데 자신들이 죽고 나면 형제들끼리 재산 문제로 얼굴 붉히지 않을까 그것이 걱정이라고 했다.
"세 놈 다 키우느라 고생했는데, 우리 죽고 나서 싸우는 꼴은 보기 싫어요."
어르신의 목소리에는 자식 사랑과 걱정, 그리고 자신의 노후에 대한 불안이 뒤섞인 그런 떨림이 묻어났다.
유언장만으로는 부족하다
많은 사람들이 유언공증만 해두면 된다고 생각한다. 나도 초년 변호사 시절에는 그렇게 믿었다. 하지만 30년 동안 수없이 많은 상속 분쟁을 다루며 깨달았다. 유언공증은 내가 눈을 감는 순간 효력이 생기고, 그걸로 끝이다.
자식이 그 돈을 받아 당장 탕진하든 말든, 부모는 관여할 길이 없다. 죽은 사람은 말이 없으니까.
그래서 나는 이 어르신들에게 유언대용신탁이라는 제도를 권했다. 생전에는 내가 수익자로 재산을 쓰다가, 사후에 비로소 자녀들에게 정해진 방식으로 이전되는 구조다.
이번 사례에서는 "만약 한 자녀와 연락이 닿지 않으면 그 몫을 나머지 형제들에게 배분한다"는 장치까지 넣었다. 부모의 마지막 뜻이 왜곡되지 않도록 사후 통제권을 가질 수 있다는 것. 이것이 이 제도의 가장 큰 장점이다.
은행에 맡길까, 자식에게 맡길까
계약서를 작성하며 가장 고민했던 지점이 여기였다. 수탁자를 누구로 할 것인가.
은행에 맡기면 투명하다. 하지만 비용이 만만치 않다. 15억 원 규모라면 초기 가입비만 750만 원, 매년 관리비로 300만 원에서 750만 원을 평생 내야 한다. 어르신들 입장에서는 아까운 돈이다.
결국 이 어르신은 차남을 수탁자로 세우기로 했다. 세 아들 중 가장 책임감 있고 형제들과도 원만한 아들이었다. 대신 나는 계약서에 몇 가지 안전장치를 박아 넣었다. 매년 1회 운영 결과 보고 의무, 부모님 서면 동의 없이는 재산 처분 불가. 이런 식으로.
다만 자녀를 수탁자로 세울 때는 신중해야 한다. 형제간 불신의 소지가 조금이라도 있다면 오히려 분쟁의 씨앗이 될 수 있다. 수탁자인 자녀가 재산을 부적절하게 관리하거나 임의로 처분할 위험도 있다. 계약서 작성 단계에서 이런 가능성들을 충분히 검토하고 대비해야 한다.
세금을 줄이는 지혜
신탁을 한다고 상속세가 마법처럼 사라지지는 않는다. 하지만 전략적 절세는 가능하다.
이번 계약에서는 체결 직후 손주 4명에게 각각 5천만 원씩 미리 증여하도록 설계했다. 증여세 비과세 한도를 활용해 상속 재산의 규모를 미리 줄여두는 방법이다. 세율 구간을 낮추는 아주 실질적인 전략이다.
또한 사후에 자녀들이 재산을 상속받는 과정에서 발생할 취득세 중복 부담도 최소화하는 설계를 함께 고민했다.
유류분, 완전히 막을 수는 없다
어르신이 물었다. "유류분 청구는 막을 수 있습니까?"
솔직하게 답했다. 현재 법원의 흐름을 보면, 신탁 재산이라 해도 유류분 대상에서 완전히 제외되기는 쉽지 않다. 유언공증도 마찬가지다. 유류분은 법이 자녀에게 보장하는 최소한의 몫이다. 특정 자녀에게 재산을 몰아주려 했다가 나중에 소송으로 번지는 경우를 나는 수없이 봤다.
하지만 이번 사례는 달랐다. 아파트를 세 아들에게 각 3분의 1씩 균등하게 배분하도록 설정했기에, 유류분 분쟁이 일어날 여지가 없었다.
나머지 예금과 주식은 부양의 노고를 인정해 차남에게 귀속시키기로 했다. 가족 간 합의만 있다면 가장 평화로운 배분 방식이다.
존엄한 노후를 위하여
상속 상담을 할 때 내가 늘 강조하는 말이 있다. 자식 사랑보다 먼저 본인의 안정부터 챙기라고.
치매가 오거나 건강이 나빠져 의식이 흐려졌을 때, 내 재산이 자식들 손에 먼저 들어가고 자신은 내팽개쳐지지는 않을까 걱정하는 어르신들이 많다. 그래서 이번 계약서에는 위탁자가 거동이 힘들거나 의식이 흐려지면 수탁자가 직접 예금을 관리하여 부모님의 생활비와 병원비로 우선 지출하도록 규정하는 조항을 넣었다.
자식들에게 짐이 되지 않으면서도, 내가 일군 재산으로 내 마지막을 스스로 돌본다. 가장 품위 있는 선택이라고 나는 믿는다.
등기부에 이름이 바뀌면?
어르신이 또 물었다. "집 등기를 아들 이름으로 바꾸면, 집을 뺏기는 거 아닙니까?"
이해할 만한 걱정이다. 하지만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소유권자의 이름은 수탁자로 바뀌지만, 등기부에 신탁임이 명시된다. 이 표시가 있으면 수탁자가 함부로 처분할 수 없고, 수탁자의 채권자가 압류하거나 경매를 신청할 수도 없다. 거주권은 사망 시까지 본인이 온전히 가져갈 수 있다.
변호사로 살아오며 수없이 설명했던 내용이지만, 매번 설명할 때마다 조심스럽다. 법률 용어 하나하나가 누군가에게는 평생의 안정이 걸린 문제이기 때문이다.
변호사이자 아버지로서
나도 자식이 셋이다. 그래서 이 어르신들의 마음을 안다. 돈보다 소중한 게 자식들의 우애라는 것을.
하지만 그 우애를 지키는 일은 막연한 믿음으로 되지 않는다. 철저한 준비가 필요하다. 장례식장에서 자녀들이 서로를 탓하는 대신 부모님과의 추억을 나누며 웃을 수 있게, 그 평화로운 이별을 함께 설계하는 일. 변호사인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다.
계약서를 완성하고 계약을 체결한 날, 그분의 얼굴에서 안도의 빛을 봤다. 오랜 기간 이 일을 하고 있지만, 이런 순간만큼은 여전히 가슴이 뜨거워진다.
사람과 법 사이 그 애매한 틈에서 이야기를 씁니다.
법무법인(유한) 이현, 대표변호사 이환권
1644-936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