빚을 인정하면서도 돈을 주지 않는 사람들

물품대금 미수금, 채권가압류로 9,100만 원을 회수한 이야기

by 대표변호사 이환권

"저희도 돈을 줘야 한다는 건 알고 있습니다. 다만 지금은 내부 사정이 있어서..."


빚을 부정하는 상대보다 더 다루기 어려운 상대가 있다. 빚을 인정하면서도 끝없이 지급을 미루는 상대다. 부정하면 소송으로 판결을 받아 집행하면 그만인데, 인정하면서 안 갚으면 채권자 쪽이 오히려 느슨해진다. '곧 주겠지' 하는 기대가 대응을 늦추기 때문이다.


의뢰인도 그런 기대 속에서 1년 넘게 시간을 흘려보낸 뒤에야 사무실을 찾아왔다.





납품은 계속되고, 대금은 멈추고


의뢰인은 휴대폰 케이스와 카메라 커버 등을 제조하는 중소기업의 대표였다. 거래처와는 3년 넘게 거래해 왔는데, 주문이 들어오면 견적서를 보내고, 발주서를 받아 물품을 만들어 납품하고, 세금계산서를 발행하면 대금이 들어오는 흐름이었다.


별도의 물품공급계약서는 없었지만 거래명세표와 세금계산서가 빠짐없이 남아 있었고, 그동안 대금이 밀린 적도 없었다.


그런 거래처에서 어느 날부터 돈을 주지 않기 시작했다. 사정을 알아보니, 사정을 알아보니, 거래처를 공동 경영하던 두 이사 중 한쪽이 횡령과 배임 혐의로 고소당하면서 회사가 뒤집어진 것이었다. 거래처는 전체 거래 내역을 재검토한다는 명목으로 외부 업체에 대한 대금 지급을 일괄 중단해 버렸다.



"이사 한 명이 횡령을 해서 지금 전체 거래를 재검토하고 있습니다. 확인이 끝나면 드리겠습니다."





빚은 인정 하되, 돈은 주지 않는다


의뢰인은 처음에는 기다렸다. 오랜 거래처였으니까. 내부 사정이 정리되면 곧 줄 거라 믿었다. 하지만 몇 달이 지나도 돈은 들어오지 않았다.


거래처가 대금 지급을 피하는 방식은 교묘했다. 미수금 채무 자체는 인정하면서, 그 대신 모든 거래에 대한 금형계약서, 견적서, 거래사실확인서, 거래명세서, 영수증, 발주내역서, 제품공급단가 확인서를 요구했다. 존재하지도 않는 서류까지 포함해서.


내용증명도 여러 통 보내왔는데, 요지는 한결같았다. "채무를 회피할 의도는 없다. 다만 확인이 필요하다."


인정하되 주지 않는다. 회피하되 도망치지 않는다. 채권자를 가장 지치게 만드는 방법이다. 그래도 의뢰인은 거래처 대표에게 직접 연락해 사정을 호소했다. 자기 회사도 자금난에 빠지고 있다고, 일부라도 먼저 달라고. 사정사정한 끝에 거래처에서 4천만 원은 지급받았지만, 남은 7천여만 원은 언제 받을 수 있을지 요원한 상황이었다.





가압류라는 신호탄


의뢰를 받자마자 두 가지를 동시에 진행했다. 거래처의 은행 예금에 대한 채권가압류 신청과 물품대금 청구 소송이다.


가압류는 소송 결과와는 별개로, 상대방의 재산을 소송 중에 뻬돌릴 수 없도록 미리 묶어두는 보전처분이다. 판결을 받기 전에 상대방 계좌를 동결시키는 절차라고 보면 된다.


2주 만에 법원은 가압류를 인용했고, 거래처가 거래하는 은행 두 곳의 예금이 묶였다.


물품대금 가압류.png





계좌가 묶이니 발등에 불이 떨어진 거래처


아무리 미적거리던 상대도 계좌가 묶이는 순간 태도가 달라진다. 민사 사건을 오래 다뤄오면서 수없이 확인한 사실이다.


가압류 결정이 나간 뒤, 거래처에서 연락이 왔다. 합의하겠다고. 1년 넘게 서류 핑계, 내부 사정 핑계를 대며 버티던 곳이었다. 계좌가 묶이자 갑자기 돈을 마련할 방법이 생긴 셈이다.


거래처는 약 9,100만 원을 분할 지급하기로 했고, 공정증서를 작성했다. 소송에서 청구한 원금에 지연손해금까지 포함한 금액이었다. 공정증서에는 강제집행 인낙 조항이 들어가 있어서 판결 없이도 바로 강제집행이 가능하니, 사실상 판결문과 같은 효력을 가진다.


합의 이후 우리는 소를 취하하고, 가압류도 해제했다. 의뢰인이 혼자 1년 넘게 매달렸을 때는 꿈쩍도 하지 않던 돈이, 가압류 결정 이후 한 달도 안 되어 합의로 이어진 것이다.





중소기업의 물품대금 분쟁


중소 제조업체들이 겪는 물품대금 분쟁은 대부분 비슷한 경로를 밟는다.


① 오랜 거래처이니 믿고 기다린다.

② 상대방이 빚을 부정하지 않으니 소송까지 갈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③ 그러다 몇 달, 1년이 흘러간다.

④ 그사이 자금난은 깊어지고, 하청업체에 줄 돈도 밀린다.


이런 상황에서 내가 늘 강조하는 것은 속도다. 상대방에게 돈이 남아 있을 때 움직여야 한다. 거래처의 경영 상태가 더 악화되거나, 다른 채권자들이 먼저 강제집행에 나서면 회수 가능성은 급격히 떨어진다.





저울추를 바로잡기 위하여


사건이 종결된 뒤, 의뢰인의 상황을 다시 떠올려 보았다. 3년 넘게 성실히 물건을 만들어 납품한 사람이다. 거래처의 내부 분쟁은 의뢰인과 아무 상관이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도 그 불똥이 고스란히 의뢰인에게 튀었고, 1년 넘게 받을 돈을 받지 못한 채 자기 회사의 자금난까지 감당해야 했다.


중소 제조업체의 현실이 그렇다. 만들어서 납품하는 쪽이 항상 약하다. 돈을 받아야 하는 처지이기 때문이다. 거래처가 사정을 이야기하면 기다려줄 수밖에 없고, 기다리다 보면 어느새 1~2년이 훌쩍 지나 있다.


거래처에서 돈이 들어오지 않는 동안에도 원자재 대금, 인건비, 임대료는 매달 빠져나갔다. 가압류 신청서에 '심각한 자금난을 겪고 있다'라고 적었는데, 그건 문서에 맞춰 다듬은 표현이고 의뢰인의 실제 사정은 그보다 훨씬 팍팍했을 것이다.


납품하는 쪽이 을이 되는 구조는 변호사 한 명이 바꿀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하지만 이 사건에서 가압류 결정문 한 장이 1년간의 독촉 전화보다 강했던 것처럼, 제때 쓰인 법적 조치는 기울어진 저울추를 되돌려 놓기도 한다.


성실하게 일한 사람이 제값을 받지 못하는 세상은 바꿀 수 없더라도, 적어도 내 앞에 앉은 한 사람의 저울추 정도는 바로잡을 수 있다고 나는 믿는다.






사람과 법 사이 그 애매한 틈에서 이야기를 씁니다.

법무법인(유한) 이현, 대표변호사 이환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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