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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neiricbobo Apr 23. 2017

내 인생을 환불합니다

"그러니까, 지금도 좋지만, 더 좋을 수 있었잖아?"


소맥 한잔에 열변을 토하다 과거에 대한 아쉬움을 토로했다.

그렇다.

한때 나는 미국 명문대 입학을 목전에 둔 촉망받는 유학생이었고

한때 내가 관심을 두던 주식은 불과 몇년 만에 9천원에서 20만원이 되었으며

한때는 저 놈이 그런 놈인 줄 모르고 소중한 한 표를 선사했더랬다.


'지리멸렬한 이 삶. 이 모든 것이 가장 이상적으로 이루어졌더라면 얼마나 좋을까?'

돌아만 간다면 나는 미국 아이비리그 출신에 주식부자가 되었을 테고 대통령도 더 나은 놈을 뽑았을 텐데.

하나님 부처님 알라님 내 인생 환불해주세요!


"널 데리러 왔다."

검은 구두부터 천천히 위를 올려다보았다. 처음 봤지만 어느 누구도 저 놈이 저승사자라는 사실은 단번에 알 수 있을 것이다. 본능적인 거부감이 날 사로잡았다.

"하나님이 아니 알라님이 부르신다. 어서 가자."

어딜 가자는 거지? 이 곳은 이승인지 저승인지 가자는 곳은 또 어딘지 도통 모르겠다.

"무슨 소리야. 이거 놔! 무슨 소린지 모르겠지만 어디든 내가 너와 함께 갈 이유는 없다."

"이유가 없다니. 니 인생 환불받고 싶잖아?"

환불? 그 한마디가 현실로 이루어질 줄이야. 지금 그게 가능하다는 건가.

"아냐. 난 지금도 행복해. 창창한 내 인생을 여기서 끝낼 수는 없어. 너 따위 저승사자에게 끌려가지 않아."

"왜 이래? 주적은 니 과거야. 꼭 가수 이선희같이 생겨가지고.."


주적이 내 과거라. 곧이어 하나님 비스무리한 사람이 내 앞에 나타났다.

"인생 환불 신청을 했다고 들었다. 회고록과 메모를 보니 알겠더구나."

"그저 농담처럼 던진 한마디에요. 돌려보내 주세요."

"안타깝지만 한번 환불이 진행된 이상 취소는 불가능하단다. 룰은 단 하나야. 니가 원하는 시점으로 돌아가되, 종전 인생에서 그 시점 뒤로 일어났던 모든 일은 그대로 일어나지 않을 거야. 물론 지금의 기억과 감정가져가겠지. 그럼 행운을 비네."


순식간에 인생의 많은 것이 바뀌었다.

어느새 아이비리그 재학생이 되어 있었고 유망 주식을 보유하고 있었으며 그 놈을 국가원수로 만들지도 않았다. 이제 말 그대로 모든 것이 이상적으로 전개될 일만 남았다. 무엇 때문일까. 설레는 감정이 마음 한켠에 자리 잡기도 전에 뭔가 모르게 영 개운치 못한 뒷맛이 느껴진다.


아니나 다를까 면면을 살펴보니 기대와는 달리 모든 것이 장미빛이진 않다. 바라던 과거로 돌아왔지만 새 인생이 생각만큼 화려하지도 내실 있지도 않다. 아니, 내 본래 인생이 그리울 정도다. 내가 사랑하던 친구들은 더는 내 인생의 일부가 아니고 사랑하던 연인도 더는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 가족들도 예전과는 달리 건강하지 않고 해당 주식은 회계비리로 상장폐지가 되었단다.


'아이고, 후보님 아니 하나님. 실망입니다. 이젠 하나님을 쳐다보지 않고 앞만 볼거에요. 조잡스럽지만 이 모든 것이 꿈이었으면.'

바램대로 눈을 떠보니 내 인생은 멀쩡했다. 욕망의 허구성에 사로잡힌 내 정신만 안 멀쩡했을 뿐. 내 정신으로 꿈을 깬건지 꿈이 내 정신을 깨운 것인지 아무튼 깼다.


그래. 짱구 좀 굴려보니 알겠다. 환불을 해도 곧 다시 구매할 인생이 바로 내 인생이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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