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한 여자의 삼천포 탈출)
(나의 이야기)
어렴풋한 기억은 3살쯤부터 시작된다.
아버지가 한국은행 청주근무지로 발령되어 서울에서 청주 석교동으로 이사를 했다
골목길 끝을 막고 서있는 집에 오른쪽 문 옆에는 닭장 이 있었고 그 앞에는 우물이 있었다.
집으로 들어가는 왼쪽 첫째 집은 국숫집이었는데 기다란 국수를 줄줄이 걸어놓고 말리면
몰래 뜯어먹고 놀았다. 같은 또래 주인집 남자아이와 나는 거의 매일을 서로의 집을 들락거리며
함께 놀곤 했다.
커다랗게 철장처럼 만들어놓은 닭장 속에 들어가서 놀기를 좋아했다. 엄마는 그러다가 닭에게 쪼인다고 질색하고 말리셨다. 엄마 몰래 기어들어가서 놀다가 빨간 벼슬 닭의 화를 돋운 건지 죽도록 나를 따라다녔다. 소리소리 지르면서 도망 다니는 내 엉덩이를 사정없이 쪼아대는 왕닭이 얼마나 무서웠는지....... 닭장 밖에서 그 모습을 구경하면서 큰소리로 웃어대는 국숫집 아들이 얄미워서 서럽게 울던 기억 이 흐릿하다.
서울로 이사하면서 사라진 취미지만 아버지는 그때만 해도 주말엔 친구들과 꿩사냥을 다니셨다. 어깨에 짊어지고 매달려 온 꿩고기를 맛있게 요리해서 올려놓으면 잘도 먹었다. 어느 날도 여느 때처럼 고기반찬이 있어서 꿩고기야? 하고 물었더니 아니 닭장에 있는 암탉으로 만든 반찬이야 라는 답을 듣고는 한참을 멍 하던 기억은 아직도 내 안에 남아있다. 달려 나가서 닭장을 보니 빨간 벼슬 달고 다니던 닭이 보이질 않았다. 그때부터 나 는 갑자기 고기만 보면 구역질이 났고 억지로 삼키면 다 토해 내었다. 살아 움직이던 닭을 내가 막 씹어서 삼키던 그 느낌은 모든 육식에 똑같이 적용되었다. 살아서 움직이다 죽어서 음식이 돼버린 모든 살아있던 것들을 도무지 씹을 수도 삼킬 수도 없었다. 심지어 계란까지도 먹지를 못했다.
그렇게 나는 절에 가서 살아야 할 아이라는 말을 들으며 자랐다. 언젠가 엄마에게 청주 석교동 집 풍경과 닭장과 닭이야기를 했더니 깜짝 놀라며 아니 너는 그때가 몇 살이었는데 그걸 다 기억하니 하고 정말이지 많이 놀라셨다. 트라우마였다. 그렇게 예민한 나는 평생을 생선, 소고기, 돼지고기, 닭고기는 물론 하여튼 살아서 꿈틀대던 것은 절대로 입에 넣지 않았다. 그런 식습관이 웰빙 스타일로 유행처럼 채식주의, 비건주의로 사랑받으면서 건강식으로 자리 잡고 있는 현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하지만 나는 다음 생애에 다시 태어나면 맛있는 음식을 모두 다 먹는 사람이고 싶다.
채식주의의 식습관 때문에 겪은 불편함은 정말로 많다. 하지만 그때 그 빨간 벼슬 달고 날 따라다니던 닭의 기억이 나를 평생 따라다녔다. 나를 또 잡아먹기만 해 봐라 똥그란 눈으로 여전히 째려보고 있는 것 같다. 그래도 이제는 나도 좀 살아보려고 한다. 접시에 누워있는 닭들아, 넌 닭이 아니라 맛난 음식이잖아 먹어버릴 거야. 씹어서 삼켜버릴 거야. 딱 기다려!!
(남편의 이야기)
채식주의에 대한 트라우마 이야기를 해주었더니 하는 말 이 "당신은 처음부터 그렇게 태어난 거였구나" 무슨 뜻이야? 물어보니까 남들은 특히 어릴 때는 음식 보면 먹는 거구나 하면서 맛있게 먹는 게 기본인데 "당신은 왜 음식을 보고 생각을 해? 애기 때부터 쓸데없는 생각을 달고 태어났어. 그건 바로 맹 한 거야" 생각이 많은 게 왜 맹한 거야? "쓸데없는 생각을 쓸데없이 해서 문제를 만드는 건 본인 손해고 맛있는 음식들을 못 먹고살았으니 그건 바로 맹한 짓이고 그 습관은 지금도 똑같고 여전히 맹한 구석이 있는 거지" 내가 조금 예민한 구석이 있다고 생각을 해왔지만 그게 맹 한 거라고?.... 그러고 보니 어릴 때 엄마는 날 보고 늘 "아이고 이 헛똑똑이"라고 하셨다. 잘 나가다가 삼천포 퐁당 빠져서 늘 허우적 댄다고도 하셨다. 맹한 여자의 삼천포 탈출 시도를 위하여 이제는 음식은 일단 다 먹어 보려고 한다. 다음 생애까지 기다릴 일 뭐 있겠나. 잘 먹고 잘 살아보자
텃밭에서 키워낸 자랑스러운(?) 식재료들, 바라만 보아도 즐거운 내 채소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