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삿짐을 정리하다 보니 그동안 여기저기서 모아 온 물건들이 적지 않다. 주로 남편이 산 작은 장식품이나 머그컵 등이다. 극 미니멀리즘을 추구하는(이라고 쓰고 ‘청소와 정리에 잼병’이라고 읽는) 나는 기념품은 절대 사지 않는 스타일이다. 그동안 산 기념품이라고는 로마에서 근무하고 귀국할 때 산 치약 두 개가 유일하다. 반면에 남편은 열쇠고리며, 머그컵이며, 중세시대 골동품 비스무레한 열쇠 꾸러미며, 어디든 가기만 하면 이런저런 소품들을 사 모으는 편이다. 그동안 이삼 년마다 이사 다닐 때는 어차피 또 쌀 거 아예 꺼내 놓지도 않고 이사 상자 채 창고에 처박아두었었는데, 이제 한국에 정착하고 나니 낡은 모서리마다 각종 테이프가 칭칭 감긴 이 상자들을 정리할 이유가 생겼다. 다 마음의 여유 덕분일까. 하나하나 꺼내 닦으면서 그동안은 예쁜 쓰레기로만 보이던 이 기념품들이 근무지나 여행지에서의 추억을 담은 우리의 소중한 이야기구나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어제는 ‘팔레스타인’이라고 쓰여있는 상자를 정리하다 보니 이런저런 생각에 기분이 가라앉아 평소와는 달리 종일 차분한 상태였다. 이미 육칠 년이 지난 경험이지만, 아직까지도 계속되는 이-팔 분쟁 관련 뉴스는 동예루살렘에서 라말라까지 출퇴근하던 때의 기억과 감정을 되살려 놓는다.
난 2017년 봄부터 일 년 반 가량 팔레스타인에서 살았었다. 집이 있는 동예루살렘에서 사무실이 있는 라말라까지 이스라엘 군인이 지키는 게이트를 통과하여 매일 출퇴근한다는 남편의 얘기를 듣고, 죽어도 같이 죽고 살아도 같이 산다는 나름 기특한(?) 생각으로 이스탄불에서 휴직을 하고 남편이 있는 곳으로 옮겨간 것이었다. 우리 집은 구시가 근처 단층 아파트였는데, 3대 종교의 성지가 있는 곳 근처라 일 년 내내 순례객이나 관광객이 끊이지 않아 집 밖은 나름대로 활기 있었다. 하지만 집 안은 패닉룸(집집마다 설치된 방공호인데, 나와 남편은 이렇게 불렀다) 때문에 내가 그렇게 좋아하는 공간은 아니었다. 두꺼운 철판으로 창문까지 다 막을 수 있고, 두께가 30센티미터는 훨씬 넘는 콘크리트 벽과 철문이 달린 패닉룸은 그 존재만으로도 숨이 막혔다. 이럴 때 초록색이라도 보면 진정이 좀 되겠지만, 창밖에는 요구르트색 건물 뷰뿐이라 집 안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이런 환경이니 집에 있어도 마음이 편하지 않았고, 무엇보다 수시로 막히는 게이트 때문에 퇴근을 못하는 남편을 보니 이러다 이-팔 전쟁이라도 나면 해외에서 이산가족이 되는 게 아닐까 혼자 걱정하기도 했다. 몇 번은 점심도시락 갖다 주러 갔다가 게이트가 막히며 집에 못 와 남편과 이삼일 사무실에서 지내기도 했다.
시간이 가면 갈수록 팔레스타인인 몇 명이 깨진 벽돌조각 몇 개 던지고 폐타이어 쌓아놓고 불태운다고 게이트를 폐쇄하는 일이 잦아졌고, 강경진압을 하면서 “지금 이들이 손에 든 건 벽돌조각이지만, 마음속에는 폭탄을 품고 있는 것”이라는 이스라엘 군인의 말을 들으며, 점점 늘어가는 정착촌과 그 주위의 녹음綠陰을 위해 말라가는 땅을 보며, 그 정착촌 주위에 사는 팔레스타인인들의 집집 옥상마다 늘어가는 검은 물통들을 보며, 쉽게 끝나지 않을 갈등임을 느꼈었다.
베들레헴 분리장벽 근처 노점에서 산 머그잔 두 개를 꺼내며 환상일지, 어쩌면 망상에 가까운 희망일지 모를 상상을 해본다. 팔레스타인인들이 벽돌조각 대신 꽃다발을 던지면 이스라엘 군인은 그 마음을 알아줄까? 그러면 소녀는 저 풍선을 잡을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