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아프지 마세요, 오지도 마시구요!

by 재홍

신규 간호사 시절에는 막연히 일을 잘하고 싶었습니다. 위중한 환자를 턱턱 받아내고, 의사들에게 Manege 방법을 제안하는 선생님들이 멋있었거든요. 그래서 의학용어를 공부하고, 지속적 주입 약물을 어떻게 희석해야 하는지 외우고, 근무 별로 꼭 해야 하는 일은 무엇인지 파악했습니다. 빨리 출근하고 늦게 퇴근하며 일이 익숙해졌습니다. 점점 연차가 쌓이면서 일을 더 빠르고, 효율적으로 할 수 있었습니다. 이제 응급실에서 신규 환자가 입원한다고 하면 두렵지 않아요. 환자의 활력 징후가 세차게 흔들리면 빠르게 대처할 수 있습니다. 인계 준비로 30분씩 머리를 쥐어뜯으며 긴장하지 않고요. 이런 게 적응이구나, 싶었습니다.


1년 전쯤에 할머니 환자 한 분이 중환자실에 오셨습니다. 섬망이 너무 심해서 모든 관을 다 빼버리는 할머니였죠. IV는 물론이거니와 C-line 드레싱을 벅벅 긁으며 중심 정맥관이 3cm 정도 빠져있었던 걸 발견한 적도 있습니다. “여기 지금 어딘 것 같으세요?”질문에 소리를 빽 질러 버리는, 너무 시끄러워서 균이 나오지 않는 데도 격리실로 자리를 옮겨야 하는, 중환자실에서 으레 볼 수 있던 환자였습니다.


어느 날, 환자 분 전담 마크맨이던 저는 한숨이 나왔습니다. 전 날에 넣은 L-tube를 아침에 뽑아버리고 점심에 다시 넣었더니 3시에는 뽑은 L-tube를 해맑게 들고 방실방실 웃고 계셨거든요. 물론 하나 있던 IV도 뽑은 채로요. 시원해 보이시더라고요. 억제대는 어떻게 푸셨는지.. 알 수 없는 일입니다. 저도 그만 허탈해서 웃음이 나왔습니다. 그렇게 환자 분과 잠시 눈이 마주치며 웃었습니다. 너무너무 바쁜 날이었지만, 그때만큼은 많이 웃었던 것 같습니다. 그 후에도 할머니를 보면 웃음이 나왔어요. 웃겨서 웃는 웃음이 아니라 킥킥 대며 터져 나오는 웃음이요.


상태가 많이 좋아지셔서 할머니가 퇴원하는 날이 되었습니다. 아시다시피 중환자실에서 전원이나, 전동이 아닌 퇴원하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감개무량했죠. 침대에서 휠체어로 할머니를 옮기며 짐짓 무서운 표정으로, “아프지 마시고, 다시는 오지 마세요. 병원 근처에 얼씬도 하지 마세요.”라고 말했습니다. 할머니는 알겠다는 말 대신 저를 꼭 안아주셨습니다. 휠체어로 환자 분을 이미 다 옮긴 이후에도요. 적응되지 않는 따뜻함이었던 것 같아요.

날씨가 좋아서 그냥 넣었습니다





그 때부터 반성을 하게 됐습니다. 사실 할머니를 보면서 귀찮고 힘들다는 생각을 했거든요. 그러면서 평소 일하는 나의 태도를 생각했습니다. E-tube를 가지고 있는 환자의 불편함을 높은 진정제 농도로 무마하려고 하지 않았나. 환자의 통증을 원래 아프실 수 있다, 조금 참아보시라 하며 귀찮아하지 않았나. 환자의 섬망을 손발을 묶으며 무시하지 않았나, 같은 것들을요. 깔끔한 드레싱, 내려오지 않는 완벽한 환자의 체위, 빵빵하게 채워져 있는 CIV 약물 bag, 꼬여 있지 않은 모니터링 줄보다 중요한 것이 있었는데. 아, 나는 환자 중심 간호가 아니라 기계나 약물 중심 간호를 하고 있었던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죠.


이제 환자의 GCS 사정과 함께 오늘 밤에 잠은 많이 주무셨나요?, 불편한 곳은 따로 없으신가요?, 추우시면 이불을 두껍게 덮어드릴까요? 같은 질문도 합니다. 면회 시간 때 자리에 앉아 기록을 정리하기보다는 보호자 분들의 궁금하신 점을 해소해 드립니다. 치료의 진행 방향에 대해 공유하고 모니터에 표시된 숫자를 설명하기도 합니다. 낮에는 환자들과 노트북으로 뉴스를 같이 보면서 이런저런 얘기를 같이 하고요. 환자 분들의 손톱도 깎아 드리고, 불안하면 손을 잡아 주기도 하고, 양치질도 해드리고, 보고 싶은 보호자와 전화 통화도 해드리고, 가려운 피부에 로션도 발라드립니다. 빠져 있던 무언가가 채워지는 느낌이었습니다. 그리고 환자 분들이 좋아하니까 저도 좋더라고요. 다른 사람이 좋아하면 기분이 좋아지는 일을 하는 것. 제가 간호사가 된 이유 중 하나이기도 했습니다.


제 목표는 여전히 일 잘하는 간호사입니다. 물론 그 의미가 더 넓고 깊어졌습니다. 빠르고 정확하게 업무를 해내는 것을 넘어 환자 분들의 기분을 좋아지게 만드는 일을 잘하고 싶습니다. 기계적으로 움직이기보다는 환자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안녕을 기원하며, 위로를 건네고 싶어요. 그리고 그들이 병원을 나설 때 다시는 돌아오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길게 안아드리고 싶습니다. 예전에 할머니 환자 분께서 저에게 해주셨던 것처럼요.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