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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할 수 있구나

by 재홍

작년부터 러닝을 시작했다.


고민이 있거나 답답한 상태에 빠지면 집 안에 박혀 있기 일쑤였다. 휴대폰을 보고, TV를 보고, 누워 있다 보면 내가 한심하게 느껴졌다. 그 한심함을 동력으로 공부나 일을 열심히 했던 것 같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나를 생각하며 너, 이거라도 열심히 해야 하지 않겠어? 라고 다그쳤다.


서울에 올라와 병원 일을 하며 상태는 더 심해졌다. 일은 잘 늘지 않고, 내가 맡은 환자는 부담스러웠고, 출근은 스트레스였다. 아무리 공부를 하고 노력을 해도 병원은 항상 공포였다. 알람 소리에 놀라서 깨고, 시각을 확인하며 안도하고, 병원까지 10분도 걸리지 않는 거리에 살지만 30분 일찍 출발했다. 비로소 내가 보는 환자의 상태를 파악하고, 무슨 일을 해야 되는 지 알면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3교대 근무를 하다보니 몸 건강도 나빠졌다. 일찍 출근해야하는 전 날 밤이면 일찍 자야한다는 부담감과 걱정으로 잠을 잘 자지 못했다. 바쁜 날이면 점심을 거르고, 저녁을 폭식했다. 이브닝 출근이면 점심까지 쓰러져 자다가 저녁을 먹는 둥 하고 퇴근하고 배달 음식을 시켜 먹었다.


마음과 몸이 피폐해지다 보니 소화가 잘 안 됐다. 헛구역질을 했고, 예전보다 밥을 적게 먹고, 소화제를 챙겨 먹어야 했다. 체중도 10kg 가까이 줄고 얼굴도 초췌했다. 가끔 집에 내려가 친구나 가족들을 보면 나에게 살이 너무 빠진 것 아니냐고 걱정했다. 결단이 필요했다.


처음에는 근처 공원을 그냥 걸었다. 이어폰을 끼고 낙산을 올라가 병원 전경을 봤다. 출근하면 그렇게 커 보이는 병원이 작게만 보였다. 나무들과 꽃을 보고, 운이 좋으면 청설모를 만나기도 했다. 올라가는 길은 경사가 심해 땀이 났다. 시원했다.


내친 김에 뛰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2km를 한 번에 뛰지 못 했다. 엄청 놀랐다. 군대에서나 대학생 때나 축구를 1시간씩 했었는데, 몸 상태가 좋지 않은 게 실감났다. 다음 날도 뛰고, 그 다음 날도 뛰었다.

얼마 뛰지 않고도 심장이 벌렁벌렁했던 시절



점점 많이 뛸 수 있게 되었다. 처음 5km를 안 쉬고 뛰었던 게 생각난다. 혜화에서 광화문을 찍고 돌아가는 길이었는데, 사람들이 참 많았다. 그 속에서 뛰는 게 좋았다. 사람들이 응원해 주는 것 같았다. 한심하게 쳐다보지 않았다. 나도 내가 한심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이번 여름에 10km 마라톤 대회를 나갔다. 쉬지 않고 10km를 뛰어 본 적이 없었는데, 왠지 자신이 있었다. 여의도 공원은 북적북적했다. 총성이 울리고, 뛰기 시작했다. 이어폰을 끼지 않고 달리는 데 지루하지 않았다. 여러 사람들과 함께 뛰는 게 편안했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달렸다. 완주하고 심장이 터질 듯 했다. 비단 힘들어서만 그런 건 아니었다. 솔직히 눈물도 조금 났다. 나 할 수 있구나. 끝까지 끝까지 할 수 있구나.

10km 기록이 생각보다 잘 나와서 활짝 웃음


겨울이 왔다. 뛰고 싶어서 바람막이도 사고, 긴 바지도 사고 모자도 샀다. 겨울에도 뛰어야지. 땀을 흘리며 거친 숨소리를 내야지. 오르막길을 오를 때 느끼는 허벅지의 타는 듯한 느낌도, 내리막길의 무릎 불편함도 모두 느껴야지. 그만두고 싶다는 감정, 목표로 했던 거리를 그래도 뛰어야 한다는 책임감 속에서 고민해야지. 그 어느 순간에서 멈춰서, 이 정도면 잘했지 하고 나를 위로해야지. 그리고 땀을 식히며 돌아가는 길에 물이나 음료수를 사 마셔야지. 액체가 목을 타고 넘어가는 느낌을 간직해야지.


이럴 게 아니라 체육복을 갈아 입어야 겠다. 시간이 되었다. 겨울에서 가장 따듯한 2시가 되었다.

겨울에 마일리지를 가장 많이 쌓았다 !

-같이 뛰어준 여러 사람들에게 감사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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