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만의 무해한 아지트

by 재홍

대학로에는 오래된 곳들이 많습니다. 학림다방처럼 자리를 지켜온 터줏대감 같은 공간들이 그 예시입니다. 저도 그런 곳들을 자주 애용합니다. 하지만 어느 날은 갑자기 새로운 곳에 가보고 싶어 지잖아요. 특별한 이유는 없지만, 기분이 내키는 대로 걷고 싶어지는 날처럼요. 그날도 그랬던 것 같습니다.


우연히 새로 문을 연 북카페에 들어갔습니다. 이름은 ‘나지트’. 나의 아지트라는 뜻이었습니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깔끔하고 정갈한 인테리어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핸드드립 전문점이라는 점도 마음에 들었습니다. 창가 쪽에 자리를 고르고 커피를 주문한 다음, 가게를 찬찬히 둘러봤습니다. 내부에 놓인 소품 하나하나에 사장님 손길이 닿아 있는 것 같았어요.

귀여운 책과 엽서


커피를 마시며 책을 읽고 있는데, 사장님이 명랑하게 말을 걸어오셨습니다. “저도 이 책 읽어봤어요. 어디까지 읽으셨어요?” 책 이야기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무슨 대화를 했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지만, 편안했습니다. 처음 보는 사람과 말을 나누는 일이 이렇게 무해할 수 있다는 걸 느끼는 게 오랜만이었던 것 같아요.


그때의 저는 처음 말을 건네는 상대가 대개 섬망이 있는 장기 입원 환자이거나, 침울한 표정으로 설명을 요구하는 보호자, 날카로운 눈초리의 선배 간호사였습니다. 병원 일로 지쳐 있던 저에게 그날은 조금 힘이 되는 하루였습니다. 그날 이후로 저는 그 가게에 자주 가게 되었습니다. 커피도 물론 맛있었고, 무엇보다 그곳에 앉아 있으면 마음이 좀 가라앉았거든요.


사장님은 연극배우이기도 하셨습니다. 무대 이야기는 제 일상과는 전혀 다른 방향이라 신기하게 들렸습니다. 배우라는 일을 소개해 줄 때 눈빛이 멋지더라고요. 제가 직업으로서 간호사를 말할 때의 제 눈빛도 문득 궁금해질 정도였습니다. 게다가 사장님도 브런치 작가로 선정되셨다고 하시더라고요. 뭔가를 쓰는 사람끼리만 나눌 수 있는, 애매하게 쑥스러운 감정이 있잖아요. 그런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습니다.


이후로 나지트에서 하는 활동에 자연스럽게 참여했습니다. 단골들의 이야기를 모아 작은 책으로 엮는 에세이 프로젝트가 있었고, 거기에 제 이야기도 조심스럽게 보탰습니다. 누군가에게 제가 어떤 사람인지 소개하는 게 어색했지만 즐거웠습니다. 정기적인 일요일 아침 모임의 집중력 수업에 참여한 것도 기억이 납니다. 한 가지 물체를 20분 동안 바라보고 특징을 잡아내는 경험은 새로웠습니다. 물체에서 사람으로 생각을 확장해 가며, 여러 시선에 공감하고 받아들이는 과정도 좋았습니다.


(나지트 사장님 나은 님의 브런치에 제 자기소개가 있습니다!)


이미 월클이 되어 버렸을 지도요..


이제 저에게 나지트는 ‘분위기 좋은 카페’나 ‘디저트가 맛있는 곳’ 같은 말로는 설명이 잘 안 되네요. 햇빛이 들어오는 창가 자리는 제 고정석이 되었습니다. 자리에 앉으면 노트북을 펼쳐 메일을 확인하고 책을 왼쪽에 두는 게 습관이 되었고요. 연말에는 나지트에서 연극도 하는데요, 무대에 오르는 사장님을 언젠가 관객으로 응원하는 날이 있었으면 좋겠네요. 무엇보다 저의 아지트가 무탈하게 남아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응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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