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망친 곳에 낙산이 있었습니다

by 재홍

자주자주 낙산에 올라갑니다. 꽃이 피고 땀이 흐르고 낙엽과 눈이 내릴 때도 그런데요. 습관처럼 되어버린 일종의 의식 같은 행동은 신규 간호사 시절부터 시작됐습니다. 도망치고 싶었습니다. 소리 지르고 싶은 날이 계속됐습니다. 바보 같은 저와, 바보 같지 않으려 애쓰는 저는 서로 싸우곤 했습니다. 일을 못한다는 무력함, 그로 인한 환자에 대한 죄책감, 다음 순번 간호사 선생님에 대한 미안함 등으로 칠해져 있는 근무가 끝나고 어느 날은 낙산엘 올라갔습니다.


대학로에서 낙산으로 향하는 길은 생각보다 가파르더라고요. 높은 경사에 숨이 자꾸 찹니다. 이어폰을 끼고 노래를 들으며 열심히 걸었습니다. 꽃이 피어 있는 입구를 지나, 배드민턴장을 지나치고, 예전에 만들어져 이제는 목적을 잃은 성곽길 옆을 걷습니다. 늦은 점심인데도 사람들이 많습니다. 산책하러 나오셔서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는 아주머니들도 계시고요. 또각또각 구두를 신은, 손을 잡고 올라가는 커플도 보입니다. 어른의 손가락을 잡은 아이의 손도 잘 보입니다.



정상에 도착했습니다. 낙산에도 정상이 놀랍게도 있습니다. 등에는 땀이 흥건합니다. 소리를 지르러 왔는데 사람이 많아서 그러지는 못했네요. 서로서로 사진을 찍어주시네요. 저도 소심하게 셀카를 찍어보려다 카메라 소리가 너무 크게 났어요. 부끄러웠습니다. 경치가 나쁘지 않습니다. 한쪽으로는 건물 밀림이 있고요, 한쪽으로는 산이 보여요. 병원도 보입니다. 평소에는 쳐다보기도 싫은 병원인데 높은 곳에서 바라보면 제법 봐줄만합니다.


이렇게 풀리지 않는 고민들이 생기면 뚜벅뚜벅 낙산으로 도망쳤습니다. 반팔 티를 입고도 오르고요, 그 위에 셔츠를 걸치고, 패딩자켓으로 온몸을 꽁꽁 싸매고도 올랐습니다. 하루에 두 번씩도 가고요, 일주일에 다섯 번 올랐던 적도 있습니다. 비척비척 땀을 흘리며 꽃과 나무와 고양이와 비둘기를 쳐다보고 사람들을 구경하곤 했습니다. 그러면 막혀있던 가슴이 조금 풀리는 기분이었습니다. 숨을 편하게 쉴 수 있었습니다.


예전만큼 고민이 많지는 않은 탓일까요? 요새는 분기마다 한 번씩 낙산에 올라갑니다. 새로 들인 운동기구 말고는 변한 게 없습니다. 햇빛이 잘 드는 정자도 그곳에 있고요. 가끔 도망가고 싶을 때가 있다면 주저 없이 낙산에 갈 것 같습니다. 이제는 조금 부끄럽더라도 소리를 지를 수 있지 않을까요? 이 글을 읽으시는 분들에게도 도망갈 곳이 하나쯤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어디든 좋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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