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라앉은 신의 오후>

by DEMIURGOTH

물빛이 스며들지. 투명에서 청록으로, 그러다 푸르게. 마지막엔 온통 쪽빛의 심연이던 것이. 이파리 몇 장 떨어뜨린 것 같은 물고기들이 빛 사이를 헤엄쳐 다니는데, 그 움직임이 어쩐지 꿈결 같아. 바다의 깊이를 더듬다 보면 어쩐지 서글픈 형체가 보여. 한때는 인간의 모습을 한 돌이었나, 아니면 처음부터 신이었나. 누가 알겠어. 이제는 희미한 윤곽만 남아서 바닷속 풍경의 일부가 되었는데. 가끔은 그저 바위처럼 보이다가도, 어떤 각도로 보면 그래, 눈이 보여. 코가 보이고 입가의 미소 같은 것도. 수천 년 동안 똑같은 표정이었을까. 푸른 물결이 휩쓸고 지나갈 때마다 조금씩 닳아 달라지는 걸까. 내가 멍하니 보고 있는 동안에도 덜컥 무너져 내릴 것만 같아.


신의 눈구멍 속으로 물고기 떼가 들어가. 반짝이는 비늘들이 새까만 동공을 메우고. 은빛 지느러미가 눈꺼풀을 스치고 지나가. 이게 이상하지. 동공이 뚫려있다는 게. 보통은 대충 파인 흠집 정도일 텐데. 누가 이렇게 깊숙이 파놓은 걸까, 아니면 애초에 그렇게 만든 걸까. 모르지. 지금은 물고기들의 아파트가 됐네. 층층이 들어찬 생명들이 신의 시선을 채우고 있어. 때로는 제법 큰 놈들도 보여. 농어인가, 우럭인가. 까마득한 옛날에는 이 눈으로 뭘 봤을까. 번개를? 폭풍을? 아니면 인간의 무릎 꿇은 모습을?


산호가 지천이야. 신의 관자놀이를 타고 자라나서는, 귓가에까지 뻗어나갔어. 누가 봐도 왕관 같네. 옛날의 그것보다 더 화려한. 분홍빛, 자주빛, 연둣빛의 군락이 물결 따라 흔들리는데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보여. 물고기들이 그 사이를 비집고 다니고, 작은 새우들이 산호 가지를 기어오르고. 이게 더 아름답지 않나? 인간이 바쳤던 황금보다, 보석보다. 따개비들은 신의 어깨에 갑옷을 만들었어. 수천 개의 작은 쇠붙이들이 다닥다닥 붙어서. 비린내 나는 기도문을 속삭이는 것 같아.


잠수부들이 여길 지날 때면 숨소리를 죽이더라. 혹시나 깨어날까 봐. 깨어나면 어쩌려고? 두려워서 그러나, 아니면 뭔가 기대하는 걸까. 햇살이 물결 따라 내려와. 부서지고 휘청거리면서. 신전의 무너진 천장을 지나치면서 황금빛으로 부서져 내리는데, 바닥까지 닿을 때쯤엔 푸른빛이 돼버려. 신은 그 빛 아래서 가만있어. 입가에 미소를 머금은 채로. 저건 정말 미소일까? 이끼가 덕지덕지 낀 입술이 그렇게 보이는 걸까? 아니면 진짜 웃고 있는 걸까? 저 미소 때문에 나는 여기 있나봐. 저 표정이 자꾸 마음에 걸려서. 세상을 움직이던 입술이 이제는 시커멓게 변해버렸는데도, 그 미소만은 그대로라서.


심해에서 울리는 소리가 있어. 고래의 노래 같기도 하고 물결이 부딪치는 소리 같기도 해. 아득하게 들려오는 진동. 옛날의 찬송가처럼 들리다가도 다음 순간엔 누군가의 흐느낌 같아. 신은 저 소리를 듣고 있을까? 허물어져버린 의식 속에서 뭔가를 떠올리려 하고 있을까? 아니면 이미 오래전에 모든 걸 잊어버렸을까? 가끔은 그 닳은 얼굴의 표정이 움직이는 것 같아. 살랑이는 물결 때문에 그렇게 보이는 걸 텐데. 보고 싶은 것 만 보는 걸까, 내가.


신을 보러 오는 사람들이 있어. 다들 놀라더라. 이렇게 따스한 물결 속에 잠들어 있다는 게 신기한가 봐. 더 이상 두렵지도 않고, 위대하지도 않은 모습이라서. 그저 조용히 꿈꾸는 것 같아서. 물고기들은 부서진 왕관 위에 알을 낳아. 거기서 부화한 새끼들은 신의 모습을 처음부터 보고 자랄 거야. 아니. 어쩌면 저들에게는 신의 모습 따윈 보이지 않을지도 몰라. 그저 편안한 바위 하나가 있을 뿐. 오래된 산호초가 있을 뿐. 걔들에겐 그게 더 좋을지도 모르지. 난파선을 찾던 사람들이 여길 발견했다고 해. 처음에는 그저 돌덩이인 줄 알았대. 그러다 저 자태를 봤겠지. 수천 년의 세월이 덮고 있는데도 지워지지 않은 저 표정을. 발굴을 하려다가 관뒀다더라. 차라리 이대로가 좋겠다고.


이따금 오후의 햇살이 쏟아져 내리지. 신전의 무너진 천장으로. 물속에서 부서지는 빛이 황금빛 장막을 드리우는것이 아름다워. 누가 그런 말을 했어. 신이 잠들어야 할 곳이 있다면 바로 여기일 거라고. 나도 동의해. 여기가 좋아. 이 따스한 물결 속에서 영원한 오후의 꿈을 꾸는 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