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이주화 가족의 '유럽자동차여행'(5)

사람으로 그곳을 추억한다

by 엘리

유레카!

출발전야. 마지막으로 가지고 갈 짐을 점검하고 지퍼를 잠갔다. 28인치 캐리어 3개. 그중에 두 개가 식량이다. 쌀, 잡곡, 햇반, 김치, 볶음 김치, 라면, 김, 여러 반찬들, 3분 카레, 즉석 곰탕과 된장국, 북엇국, 육개장, 미역국 등. 즉석식품은 무게를 줄이기 위해 물만 부어 끓이면 되는 걸로 주로 구입했다. 음식을 많이 챙긴 이유는 현지에서 경비를 줄이려는 이유도 있지만, 가장 큰 이유는 아침저녁으로 밥을 꼭 먹어야 하는 딸아이를 위해서다. 가방의 무게가 상당하다.


비행기 위탁 수화물은 최대 23kg이고 이를 넘으면 초과비용을 지불해야 한다. 나와 남편은 집에 있는 전자저울에 캐리어를 올렸다. 그런데 저울이 캐리어에 가려 보이지 않는다. 음, 어떻게 해야 하나. 우리는 캐리어의 한쪽 모서리를 저울에 대 보았다. 마치 피라미드의 꼭짓점을 저울에 찍는 것처럼. 그랬더니 우리가 들고 있는 힘 때문에 정확한 무게가 나오지 않는다. 옆에서 지켜보던 딸아이가 “아빠, 아빠가 가방을 들고 무게를 재면 되잖아”라고 한다.


그렇구나! 남편은 먼저 자신의 몸무게를 잰 뒤에, 캐리어를 안은 채 다시 저울에 올라 무게를 확인했다. 그 차이가 바로 캐리어의 확실한 무게. 우리는 함께 “유레카!”를 외쳤다. 나는 사실 처음엔 아이의 말을 귀담아듣지 않았다. 경황이 없었다. 어떻게 하면 무게를 정확하게 잴 수 있을지 생각하느라 정신이 다른데 가 있었다. 그러나 딸아이의 말을 듣고 깨달았다. 아이디어도 좋았지만 ‘이제는 우리 딸이 어느새 커서 여행을 가는데 한몫을 하는구나. 한 명의 인격체로서 자신의 의견을 제시하는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에게 폭풍 칭찬을 해주었다.

조바심을 내지 않으려 한다.

밤에 잠이 오지 않는다. 파리에 도착해 차를 몰고 달려야 실감이 날 것 같다. 오전 9시 45분 비행기라 아침 일찍 인천공항으로 가야 한다. 혹시 잠이 들어 늦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소풍 전 날 들뜬 마음에 잠 못 이루는 아이처럼 흥분된다. 새벽에 화분을 하나씩 정리해 본다. 두 달 전이었다. 뿌리에 붙어있는 흙을 조심조심 털어 깨끗하게 물로 씻기고, 예쁜 돌을 친구 삼아 퐁당퐁당 담아 수경재배를 시작했다. 잘 자랄까? 걱정했는데, 쑥쑥 잘 자라주었다.


오전 7시 30분 인천공항에 도착했다. 살다 보면 흔히 저지르는 실수가 두 가지 있다고 한다. 아예 시작을 하지 않거나, 또는 끝까지 하지 않는 것. 우리는 시작을 했고 이제 출발한다. 마음속에서 설렘과 긴장이 팽팽하게 줄다리기를 한다. 공항에 오면 항상 느끼지만, 어디론가 떠나려는 사람들이 참 많다. 다들 수속하고 수화물을 붙이느라 길게 줄을 서 있다. 그 표정과 모습에 이미 도착지의 풍경이 서려있는 듯하다.


수속을 마친 우리는 백팩과 옷가방 하나씩을 더 들고 출국 게이트를 통과했다. 딸아이는 자신이 읽고 싶은 3학년 교과서 4권을 가방에 넣었다. 그 안에는 토끼 인형이 한 마리 깡충 뛰어 들어가 있다. 남편의 배낭에는 3인용 전기밥솥과 전기쿠커. 내 가방에는 그림을 그릴 스케치북과 색연필, 화장품, 책이 들어있다.


비행기가 ‘쿠르릉’ 소리를 내며 땅을 박차고 하늘로 오른다. 어제 잠을 못 자서 그런지, 푸른 하늘 때문인지 눈이 시리다. 12시간의 비행을 마치면 영화와 사진에서만 보고 만났던 파리에 도착한다. 3월의 파리는 어떤 색으로, 어떤 향기로 다가올까. 그리고 20년 만에 파리에 간다는 남편은 어떤 느낌일까. 어떤 부부는 여행하다가 그 나라의 향기에 반해서 그곳에서 18년째 민박집을 하며 살고 있다고 한다. 이번 여행에서 우리도 머물고 싶은 곳이 있을까.


‘조바심을 내지는 않으려 한다. 거북이걸음처럼 천천히 그리고 서로의 발걸음과 멈춤을 기다려주자’

사람으로 그곳을 추억한다.

드디어 파리 샤를 드골 공항 터미널 2에 도착. 입국심사 관계자는 단 하나의 질문도 던지지 않았다. 여권을 보여주자 아무런 말 없이 도장을 꽝! 찍어준다. 수화물을 다 찾은 뒤에 푸조리스에 전화를 했다. 16번 게이트 앞에서 기다리라고 한다. 공항 밖에서 한국과 비슷한 파리의 3월을 피부로 느끼고 있으니 5분 뒤, 흰색 밴이 우리를 태우러 왔다. 푸조리스는 공항에서 약 5분 정도 떨어져 있었다. 사무실에 들어가 여권을 보여주고 계약서에 사인을 했다. 열쇠 2개를 건네준다. 일사천리다.


곧이어 우리를 공항에서 픽업한 얀이 “파란색 좋아해요?”라며 리스 차량을 보여주었다. 왜건 형태의 푸조 308SW는 햇빛을 받으며 반짝반짝 푸른 윤기를 뽐내고 있었다. 우리 세 식구를 3개월 동안 가고 싶은 곳으로 데려다 줄 ‘카이카이 스카이(딸아이가 지은 308SW의 이름)’는 깔끔한 세미정장 차림으로 대기하고 있었다.


우리는 여행하며 만나는 사람을 통해 그 나라를 추억한다. 얀은 프랑스에서 우리가 처음으로 기억하는 사람이다. 그는 공항에서 우리를 만났을 때부터 파리에 대해 하나라도 더 말해주기 위해 애썼다. 그중에서도 얀은 “파리에서는 대중교통을 이용하면 좋다”라고 조언하며 “지하철 티켓을 10개 묶음으로 사는 게 편리하다”라고 알려주었다.


차량을 인도한 다음에도 그의 친절한 설명이 계속됐다. 라이트, 와이퍼, 내비게이션 작동법을 차근차근 알려준다. 내비게이션은 주소와 이름으로 찾는 두 가지 방법을 알려주었는데, 잘 모르겠다고 하자 여러 번 시연해 준다. 그는 숙소 주소를 찍으며 중간에 들릴 주유소까지 저장해 주었다. 20대 후반의 얀은 아랍계로 가뭇한 피부에 검은 눈과 곱슬머리를 가졌다. 흰자위가 너무 깨끗해 검은 눈동자가 더욱 진해 보였는데, 마음의 창이 그대로 드러나는 그의 눈은 친절하고 따뜻했다. “얀, 어린이 카시트까지 챙겨줘서 고마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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