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10.02 작성글
※약간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다소 그로테스크하고 다크 하다는 이야기를 먼저 듣고 보게 되었던 한강의 채식주의자
책을 읽기 시작하면서와 읽은 후의 생각이 판이하게 다르기에 두 파트로 나눠 글을 써보고자 한다.
책을 읽으며,
첫 파트인 '채식주의자'를 읽으면서 받았던 느낌은, 기생충과 비슷한 느낌을 준다는 것.
기생충은 절정으로 향하는 동안 이야기를 다소 가볍고 해학적으로 풀어 그 스토리에 몰입되게 만들었다.
이야기가 절정으로 오를 때까지 천천히 그리고 부드럽게 이야기에 무게를 싣고
절정을 맞았을 때부터 영화의 끝에 다다르기까지 그 무게감이 내 몸과 마음을 무겁게 만들었다.
기생충의 기승전결과 달리 채식주의자는 간단한 배경 설명 이후에 바로 그 이야기에 무게를 실어
살점으로 뒤덮이고 피로 번들거리는 입술 그리고 짐승의 내장 따위가 천장에 치렁치렁 매달린 세상을 소개한다.
삶을 관성적으로 살아가던 영혜의 변화는 하루아침에 찾아왔고 잔잔했던 바다에 밀려온 해일과도 같았다.
무척이나 무신경했던 남편의 시점으로 바라본,
'고작' 꿈 때문에 채식을 해야 한다던 고집과, 불 꺼진 새벽 냉장고 속 모든 고기를 꺼내 밖으로 던져놓는 영혜의 모습은 분명 '정신병자'로 취급하기 마땅했을 것이다.
그렇게 첫 파트가 끝날 때까지 영혜의 꿈속 세상처럼 끈적한 피로 이가 번들거리듯 역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왜 항상 이런 종류의 문학은 사람을 병들게 만들까. 스스로를 다치게 한다거나 죽음을 자연스럽게 느끼는 인물들을 보여주지 않는다면 적어도 사람들이 삶에서 덜 멀어지지 않을까'하고 생각했지만, 책의 나머지 파트인 '몽고반점'과 '나무 불꽃'을 읽으며 책에 대한 감상이 달라졌다.
시간은 순행해 인혜와 남편의 시점으로 이야기는 전개된다.
영혜의 채식 욕구는 자연 혹은 동물 보호 같은 것들을 위한 수단이 아니라 일련의 과정이었으며 그녀의 세계는 어쩌면 정말 병인 것처럼 타인에게 무의식적으로 퍼져나간다. 누군가에겐 꿈과 욕망으로, 또 다른 이에게는 삶과 멀어지게 만드는 이유로 나아간다.
그래서일지 모르겠지만 시간이 흐르며 영혜를 조금씩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삶에 대한 무관심과 관성적인 삶의 태도는 한바탕 큰 불이 지나간 뒤의 잿불과도 같았으며 그녀가 '정신병자'가 아니라 더할 나위 없이 또렷한 정신을 가지고 자신의 삶에서의 정답을 찾은 사람이었다는 걸. 시간이 지나며 영혜를 동정하게 되었고 어쩌면 조금은 응원했다.
하지만 더욱 시간이 지나 이야기가 끝을 보일 무렵 나는 원래의 나 자신으로 돌아온다. 의무감으로 점철된 인간, 사회에서 요구하는 가치를 좇으며 만족하는 인간, 무신경한 인간. 생존에 최적화된 인간으로서 이야기를 바라보게 되고 이후 이야기는 끝을 맞는다.
모든 이야기를 읽고,
'세상의 모든 것은 몸에 해로운 것일수록 자극적이기에 중독되기 마련이다.'라는 생각이 가장 먼저 들었다.
힘들었던 첫 파트를 읽으면서 그만 읽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고자극에 매혹돼 이후 파트를 너무나도 집중해서 읽었다.
첫 파트였던 '채식주의자' 파트를 지금 생각해 보자면 작가가 가장 일반적이고 전형적인 인간의 모습을 띈 남편의 눈을 통해 영혜를 그려내어 '정상인' 그리고 '정신병자'라는 두 부류로 인간을 나누는 다수를 표현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이후 이야기에서는 타인에 대한 책임을 저버리고 자신의 욕망을 찾는 인간과 그 책임을 대신 지는 억울한 사람의 대조되는 모습을 보며 한숨과 분노가 커졌지만,
다 읽은 후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 행위들이 단순히 쾌락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삶의 완성 혹은 불행의 끝맺음을 위한 수단이었다는 것을 알려주는 서사가 더 눈에 띄었다.
다만 앞으로 이 책을 읽고 싶은 사람들에게 이야기하고 싶은 게 있다면,
책 속에 빠져 등장인물의 관점에 동화되지 말고 뚜렷한 주관을 갖고 책을 읽으며 판단했으면 좋겠다는 것. 그게 자신이 이 책에서 얻을 것과 덜어낼 것을 구분해 주리라 믿는다.
- 25.07.21 옮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