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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이식 Aug 13. 2024

감정의 세계 #15

고대의 신과의 대화

아득한 어둠 속에서 난 아무것도 찾을 수 없었다. 무한하게 느껴지는 공간 속에서 어디론가 끝없이 빨려들어가는 듯했다. 수많은 별들이 내 옆을 스쳐지나갔다. 난 그 별들 중에 아무거라도 잡아채고 싶었지만 그렇게 할 수 없었다. 그러다 일순간 별들이 움직임을 멈추었다. 아니다. 내가 멈춘 것이다. 


'여기는 어디지?'


난 아주 깊숙한 곳으로 끌려들어 왔을 것이다. 그리고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넌 내가 아니구나. 넌 누구지?"

"난 기쁨이라는 감정이었죠. 물론 지금은 아니지만. 그러는 당신은 누구죠?"

"나? 난 이 곳의 주인이지. 넌 이방인이고."

"주인? 그렇다면 당신이 바로 세번째 신인가요?"

"그래. 난 고대의 신이고, 이 생명을 지키는 최후의 보루지."

"그런데 어떻게 이게 가능하지. 의식을 가진 다른 생명체는 이 곳에는 두 개의 자아가 있을 수 없다고."

"당신은 날 꿈같은 존재라고 인식하겠죠. 난 곧 사라질거에요. 이미 당신에게 흡수되었으니깐. 나의 의식은 서서히 소멸할 것이고, 당신도 날 곧 잊을거에요. 하자만 이렇게까지 한 이유를 난 알아야겠어요. 왜 그런거죠? 도대체 왜 우리를 몰살시킨거죠? 우리가 무슨 잘못을 했나요?"

"잘못? 그래. 잘못되었지. 너희는 존재 자체가 잘못되었어."

"무슨 소리죠? 우리 존재 자체가 잘못이라니!"

"너희는 이 아이의 생존에 불필요한 존재야. 아주 거추장스럽지. 너희를 만족시키는 일은 너무나 피곤해. 잠시도 이 아이를 가만두지 않지. 쾌락을 위해 끊임없이 누군가와 관계를 맺으려하고, 그 속에서 자존감을 찾으려하고, 또 마음같이 되지 않으면 실망하지. 그리고 밀려오는 슬픔, 불안, 분노. 끊임없이 외쳐되는 감정들의 목소리에 이 아이는 너무 지쳐버렸다고. 왜 우리가 너희를 만족시키기 위해 이렇게 고생을 해야되지? 난 너희 존재의 이유를 알고 싶었어. 그래서 한동안은 너희가 하는데로 그냥 두었지. 하지만 너희는 이 아이가 주는 양분을 가지고 끊임없이 아이를 괴롭히기만 했어."

"왜 그렇게 생각하는거죠? 감정없는 삶이 가능하다고 생각하는건가요? 그렇게 삶을 이어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건가요?"

"그건 두고 보면 알게 되겠지. 이제 너희 쓸데없는 감정들은 모두 사라졌어. 물론 너같은 감정들이 아직 살아있다는 사실은 놀랍기는 하지만, 너도 이제 곧 사라지겠지. 그 후에 진정한 안식이 찾아올거야. 평온하겠지. 더 이상 감정의 소용돌이로 인해 심장이 나대는 일도 없어질거고, 호흡이 가빠지는 일도 없을거야. 이 아이의 삶은 다시 안정을 되찾을거라고."

"당신이 말하는 삶이 죽음과 무엇이 다르죠? 감정없이 호흡하고 음식을 맛보고 누군가를 만나는게 무슨 의미가 있는거죠? 이 아이를 진정한 죽음으로 이끈 것은 바로 당신이에요!"


마지막 절규와 같은 외침을 끝으로 난 의식이 희미해지는 것을 느끼고 싶었다. 난 나의 억울함과 신에 대한 저주를 쏟아내고 싶었지만, 나의 목소리는 점점 줄어들었고, 의식의 끈은 가늘어졌고, 빛의 색은 옅어졌다. 난 스스로가 소멸하는 것을 아주 천천히 느끼며 그렇게 영원히 이 세계에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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