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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이식 Aug 11. 2024

감정의 세계 #14

고대의 신을 찾아서

난 운 좋게도 다시 한번 이 재앙 속에서 살아남았다. 장 속 깊은 곳 나만의 은신처에 아슬아슬한 타이밍에 도착했고, 그 곳에서 모든 미생물들이 사라지는 날까지 납작엎드린채 기다렸다. 이 모든 것의 원인이 바로 나라고 생각하면 도저히 견딜 수 없는 고통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살아야할 이유가 있었다. 


왜?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느냐 말이다. 난 그것을 알아야 했다!


그 숙제는 마치 숙명처럼 다가왔고, 모든 고통을 잊게 할만큼 강력했다. 수개월이 지난 후 난 수많은 미생물들의 시체로 단단해진 두터운 점액을 뚫고 다시 세상으로 나왔다. 수개월이 지났지만 아직도 곳곳에서는 시체 썩은 내가 진동했다. 하지만 개의치 않았다. 그리고 수개월 전 떠났던 그 길을 따라 다시 여행을 시작했다.


내가 알고 있던 세상은 많이 달라져 있었다. 소장의 아름다운 융털의 숲은 다시금 제 빛을 찾아 아름답게 빛나고 있었다. 다만 이제 더 이상 평온함과 불안 사이의 숨바꼭질은 없었다. 위는 음식물과 위액이 가득했다. 바닥을 드러내었던 예전보다 훨씬 건강해진 모습이다. 하지만 더 이상 '분노'가 살고 있지 않기 때문에 위액이 흘러넘쳐도 이를 막아줄 자는 없었다. 그래서인지 아래쪽 소화기관에는 군데군데 위액이 남긴 상처들이 보였다. 


심장은 고요했지만, 아주 일정하게 뛰고 있었다. 완전히 안정을 찾은 모습이긴 했지만, 메트로놈처럼 정확하게 움직이는 심장은 어딘지 모르게 지쳐있는 듯한 인상을 주었다. 난 다시 슬픔의 나무를 찾아가 보기로 했다. 비극이 시작된 바로 그곳! 슬픔의 나무에게 가는 길은 아직도 정리되지 못한 채 널부러져 있는 슬픔의 시체들로 가득했다. 그들이 남긴 차가운 기운은 용광로처럼 뜨거운 심장의 열기조차 녹이지 못했다. 나는 아직 냉기가 서려있는 바닥을 딛고 한걸음 한걸음 나아가 결국 슬픔의 나무 앞에 섰다.


슬픔의 나무!


이 모든 재앙은 이 곳에서 시작되었다. 하지만 이상할정도로 슬픔의 나무는 원래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었다. 난 의아한 마음에 슬픔의 나무에게 조금 더 다가갔다. 그리고 순간 강한 자책감과 함께 슬픔의 나무에 대한 연민의 정이 몰려왔다. 


"날 너무 원망히지는 말아줘. 난 단지 이 곳을 원래대로 돌려놓고 싶었을 뿐이라고!"


난 더 이상 내 용서를 구할 이가 아무도 남아있지 않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지만, 모든 슬픔과 슬픔의 나무에게 이 말을 전하고 싶었다. 그래서 손을 올려 슬픔의 나무에게 얼마남지 않은 에너지를 전달했다.


"누구지 넌?"

그 순간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죽은 줄만 알고 있던 슬픔의 나무가 화답을 했다.

깜짝 놀라 잠시 물러섰지만, 다시 조심스레 손을 뻗어 슬픔의 나무 위로 올렸다.

"그래! 맞아 바로 너였구나. 어쩐지 낯익은 목소리였어. 나 기억 못하는거야? 난 슬픔이야. 우리 어릴적 이 아이가 태어난 날 같이 이 아이의 몸 속으로 들어왔잖아!"

"슬픔?! 너가 어떻게 슬픔의 나무 속에 들어간거지?"

"글쎄. 그건 나도 잘 몰라. 그 날의 일은 나도 설명할 수 없는 부분이 너무 많아. 하지만 그날 분명 우리를 잠에서 깨운건 고대의 신이었어. 분명 그의 목소리였어. 처음 들어보는 목소리였지만,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어. 그리고 그의 또렷한 음성은 우리에게 계시를 전달했지. "슬픔의 나무에게 가라" 그의 계시는 간단하고도 분명했어. 그리고 거역할 수 없었지. 어떻게 그게 가능한지는 모르겠지만, 아마도 그건 그의 특별한 능력이겠지. 그는 고대의 신이니깐. 분명 그런 능력이 있을거야. 우리는 모두 그의 계시를 따를 수 밖에 없었고 모두 슬픔의 나무를 향했지. 가는 길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슬픔들 때문에 한없이 지체되었지만, 난 어떻게 해서든 슬픔의 나무를 향해 나아갔어. 하지만 슬픔의 나무 근처까지만 갈 수 있을 뿐, 슬픔의 나무를 마주할 수는 없었어. 슬픔의 나무는 봉인이 되어 있었거든. 그렇게 몇날 며칠을 기다렸는데, 어느 순간 봉인이 풀린거야. 순간 주변을 에워싼 모든 슬픔들은 슬픔의 나무를 둘러싸고 에너지를 전달했지. 그게 계시였으니깐.

한 번에 쏟아져내린 막대한 에너지는 슬픔의 나무가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강렬했어. 그리고 순간 거대한 폭발이 일어났지. 그 폭발로 인해 난 산산히 부서져 버렸고. 하지만 운 좋게도 '나'라는 자의식과 기억만은 남겨졌어. 그 상태로 나는 슬픔의 나무에 흡수되어 버린거고, 덕분에 '나'라는 기억과 자의식을 가진 채 난 슬픔의 나무에 일부가 될 수 있었던 거야. 그러니깐 엄밀히 말하면 난 더 이상 '슬픔'이 아니야. 난 이제 진정한 이 아이의 일부가 되었지. 덕분에 난 이 아이의 모든 감각에서 전해지는 정보도 느낄 수 있어. 물론 모든 것을 분명하게 느끼지는 못해. 하지만 희마하게 신들의 대화도 엿들을 수가 있고, 다른 곳에 일어나는 일들도 유추할 수 있어. 난 지금 이 아이의 일부가 된 것이 분명해. 예전 '슬픔'으로서의 기억을 간직한 채 말이야. 정말 놀랍지 않아?"

"그런데 방금 고대의 신이 너희에게 계시를 내렸다는 건 무슨 말이야?"

"말 그대로 그건 그의 명령이고 계시였어. 우린 그래서 다들 최면에 걸린 것처럼 행동했지."

"왜 그런 일을 고대의 신이 시킨거지? 고대의 신이 그랬다면 그는 감정의 나무를 파괴할 생각이었던 것이 분명해. 두번째 신이 말하길 슬픔이 모두 감정의 나무를 향한다면 감정의 나무가 폭발할 것라고 했어. 고대의 신은 그 사실을 몰랐던걸까? 아니며 알면서 일부러 그런걸까? 그랬다면 그는 고의적으로 감정의 나무를 폭발시키고 우리를 몰살시키려 했던 것이 분명해! 왜 그런 잔인한 짓을 꾸민거지?"

"그건 고대의 신만이 알겠지. 우리가 어떻게 그 분의 뜻을 알 수 있겠어? 그리고 니가 정말 그걸 알고 싶다면 나와 같은 기적이 일어나길 바라며, 심장에 몸을 던져!"

"심장? 심장에 몸을 던지라고?"

"그래 너가 슬픔의 나무에 에너지를 전달한 순간, 신들은 아직 남아있는 감정의 존재를 알아차렸어. 그래서 지금 이곳으로 백혈구들을 보냈지. 이제 곧 그들이 도착할거야. 그럼 넌 가루가 되어버리겠지. 그들에 의해 최후를 맞이한다면 넌 그냥 쓰레기처럼 땀구멍으로 배출되고 말거야. 하지만 심장에서 몸을 던진다면 기회가 있겠지. 나처럼 말이야. 산산히 쪼개진 뒤, 미약한 자의식과 기억이 있다면 그 상태로 고대의 신을 만날 수 있을지 몰라. 그 외엔 방법이 없어. 그는 뇌 중에서도 가장 안쪽에 있단 말이야. 근데 너같은 미생물이 거기까지 도달할 수 있을 것 같아? 이제 시간이 없다고. 어서 심장을 향해 달려!"


난 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뒤돌아서 심장으로 향했다. 더 이상 비참한 생을 이어가는 것은 의미가 없다. 난 마지막으로 고대의 신의 뜻을 알기 위해 모든 것을 바칠 각오가 되어 있다.


그래서 난 심장의 계곡에서 몸을 던졌다. 심장으로 쏟아지는 거대한 피의 소용돌이는 나를 휘감고 잠시 동안 멈춘 뒤 나를 사정없이 밖으로 밀어냈다. 그 강력한 힘은 내 몸을 산산조각으로 만들었다. 이제 이 아이와 동화되기만을 바랄 뿐이다. 부디 기적이 일어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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