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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이식 Aug 05. 2024

감정의 세계 #13

돌이킬 수 없는

요행.

그걸 바라는건 비겁한 짓이겠지? 하지만 그것 말고는 답이 없다면. 그래 나의 선택은 정당했어. 난 최선의 선택을 한거야. 요행히도 아무 일 없이 봉인이 해제되는 것 말고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다고. 그래도 대단한 것 아니야? 적어도 난 이 작은 우주 안에서 신을 만난 최초의 미생물이 되었다고! 그리고 난 신을 설득했어. 그래서 봉인은 해제되었지.


그래서 기적이 일어났냐고?

아니 정 반대의 일이 일어났지. 우리가 두려워했던 일은 내가 신의 영역을 벗어나자 마자 시작되었어. 가장 먼저 심장이 요동을 치기 시작하더군. 감정의 나무의 봉인이 해제되었기 때문이지. 잠에서 깨어난 모든 슬픔들이 감정의 나무를 덮쳤고, 감정의 나무는 순식간에 폭발해버렸어. 그 뒤로 일어난 연쇄작용은 정말 무시무시했지. 


심장에서는 엄청난 압력으로 피를 쏟아냈지. 사방에서 터진 혈관 사이로 피가 뿜어져 나왔지. 핏속에 머물고 있던 백혈구들이 쏟아져 나온건 당연한 일이고. 흥분한 백혈구들의 살육은 그야말로 광기에 가까웠지. 몸 속의 모든 미생물들은 희생양이 되었어. 닥치는대로 베고 쓰러트리고 갈기갈기 찢어놓았지. 산산히 분해되 버린 미생물들의 시체는 여기저기 널부러졌고, 그들의 시체는 모든 장기들에 쌓이기 시작했어. 위는 '분노'의 시체로, 소장은 '평온함'과 '불안함' 그리고 대장에는 '기쁨'의 사체로 가득했지. 시체 썩는 냄새는 정말 고약했어. 그리고 그 고약한 냄새는 식도를 타고 올라갔지. 아마 인간도 그 냄새를 느꼈는지 하루종일 입을 닦고 헹구고 있더군. 하지만 배 속 깊은 곳에서부터 스멀스멀 기어올라가는 냄새를 막을 수 있나. 그냥 쓸데없는 짓이지. 곧이어 청소부들이 출동하더군. 그들은 미생물들의 시체를 처리하기 시작했어. 일부는 피에 흘려버리고, 작은 덩어리들은 근처의 땀구명, 콧구멍, 눈구멍으로 버려졌어. 하지만 그 방대한 시체더미를 치우는 데에도 며칠은 걸렸던거 같아. 그리고 그렇게 미생물들의 시체가 치워진 후에도 다시 살육은 계속 되었지. 죽이고 치우고 죽이고 치우고 죽이고 치우고. 결국 이 세계에 감정은 하나도 남지 않는 순간이 올때까지 그 과정은 반복되었지.


감정의 나무는 어떻게 되었냐고? 슬픔의 나무가 폭발한 순간 거의 대부분의 감정의 나무도 같이 폭발해버렸어. 감정의 나무는 그 뿌리가 모두 연결되어 있어. 아마도 그 뿌리를 따라 올라가면 두번째 신을 만날 수 있겠지. 슬픔의 나무에서 일어난 거대한 폭발은 연결된 다른 나무들까지 모두 영향을 주었어. 거의 90% 이상의 감정의 나무들이 사라져버렸지. 그리고 남아있는 조금의 감정의 나무들도 곧 멸종하게 될거야. 왜냐하면 그들과 공감하는 미생물들이 모두 사라져버렸으니깐. 더 이상 힘을 얻을 곳이 없는 감정의 나무들은 모두 싹이 마르겠지. 그리고 그 폭발은 두번째 신에게도 영향을 주었어. 아마 그 자신도 이렇게 될줄 예상하지 못했나봐. 두번째 신은 그 폭발로 의식을 잃고 쓰러졌지. 영원히 신이 사라진것은 아니지만 언제 깨어날지조차 가늠할 수 없는 심각한 상황이라고 하더군.


그래서 나는? 

난 아직 장 속에 살아있어. 두 번의 항생제 공습의 학습효과 덕분일까? 장 속 깊은 곳 나만의 은신처는 어떤 백혈구들도 찾아내지 못하더군. 난 숨도 쉬지 않고 며칠을 지냈어. 아니 도대체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알 수 없을만큼 오래. 나를 따라왔던 꼬마도 내 덕분에 살았지만 이렇게 목숨을 연명하는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난 이 곳에서 삶의 의미를 잃었어. 나의 가족도, 마을도, 동료들, 감정의 나무까지 모든 것을 잃었지. 그래서 이 몸을 떠날까도 생각했어. 이 곳에 내가 있을 이유는 하나도 없었으니깐. 하지만 아직 떠날 수 없었어. 아직 난 알지 못하거든. 고대의 신의 뜻을. 그는 왜 이런 일을 만들었을까? 두번째 신은 고대의 신은 소통할 수 없는 존재라고 했지만, 난 그의 뜻을 알아야만 했어. 이 재앙을 만든 이유를. 그것만이 내가 살 수 있는 길이야!


난 이 세상을 망치지 않았다고. 단지 구원하려 했을 뿐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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