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번째 마라톤 대회

by 제이식

새벽 6시 20분, 광화문으로 가기 위해 지하철을 기다리고 있다.

마라톤 대회 전날 서울로 올라와 부모님 집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대회가 열리는 광화문으로 향하는 길이다. 광화문역까지 가려면 20개의 정차역을 거쳐야 한다. 대략 40분 정도 걸리는 거리이다. 이른 아침 정거장 안에는 사람이 거의 없었는데, 플랫폼 끝에 한 승객이 나처럼 러닝화를 신고 있었다. 아마도 나와 목적지가 같은 듯하다.


지하철이 도착했다. 여유롭게 자리에 앉아 등을 기대자 따뜻한 온기가 느껴진다. 텅 빈 객차 안은 지하철 특유의 진동과 소음만 있을 뿐이다. 갑자기 노곤함이 밀려온다. 이 노곤함에는 이유가 있다. 전날 오랜만에 아들을 본 어머니는 든든히 먹고 뛰어야 한다며 달달한 갈비찜을 한솥 해놓으셨고, 그 정성을 마다하는 것은 자식 된 도리가 아니다 싶어 한솥 가득했던 갈비찜을 쌀밥에 얹어 '순삭'해버리니, 밀려오는 식곤증을 이기지 못하고 초저녁부터 잠이 들어버렸다. 그게 화근이었다. 한참을 자고 일어났는데 새벽 12시 30분이다. 다시 잠을 청해 보지만 잠이 오지 않았다. 밤새도록 뒤척이다 4시 30분이 되었을 때, 그냥 포기하고 몸을 일으켰다. 결국 그날 잠은 초저녁에 잠깐 잔 게 전부였다.


지하철은 처음에는 한산했지만 광화문역에 가까워질수록 승객들로 붐비기 시작했다. 그런데 여느 때와 다른 점은 승객들이 다들 러닝화에 운동복 차림이라는 것이다. 대회 기념 티셔츠인 노란색 티셔츠를 입은 사람들도 더러 보였다. 그리고 광화문역에 도착했을 때 대부분의 사람들이 물밀듯이 정거장으로 쏟아지듯 내렸고, 나 또한 그 무리에 섞여 있었다.


광화문역은 시끌시끌했다. 동료를 찾기 위해 목청 높여 통화하는 소리, 삼삼오오 모여 몸 푸는 사람들의 구령 소리, 그냥 수다스러운 사람의 떠드는 소리까지. 그 소음들은 내가 마라톤 대회에 참가했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상기시켜줬고, 그 사이를 지나치는 동안 묘한 흥분감이 느껴졌다. 그리고 지하철 출구를 통해 광화문 광장으로 나왔을 때, 흥분은 절정에 이르렀다. 거대한 광장을 가득 메운 수많은 인파. 광장은 온통 노란색 물결이다. 그리고 그곳에 모인 사람들이 내뿜는 강렬한 에너지와 공명하여 몸속 아드레날린은 폭발했다. 전날 4시간도 못 잤다는 사실은 까맣게 잊게 만들 만큼.


수원에서 열렸던 마라톤 대회도 꽤 큰 규모라고 생각했는데, 서울에서 열리는 대회는 그 이상이었다. 하지만 큰 규모로 인한 문제도 있었는데, 그건 화장실 앞의 줄이 너무 길다는 것이었다. 40분 전에 도착했지만 화장실을 다녀오느라 30분이나 허비하는 바람에 몸을 풀 시간을 모두 날려버렸다. 화장실에서 돌아오자마자 출발위치로 이동하라는 안내방송이 나왔고, 잠시 대기하는 동안 짧게 스트레칭을 한 것이 전부였다. 아직 제대로 준비된 상태는 아니었음에도, 출발을 알리는 카운트다운은 시작되었다. 5, 4, 3, 2, 1 그리고 강렬한 총성. 앞쪽부터 노란색 물결이 넘실대기 시작한다. 천천히 앞으로 걸어가자 노란색 파도가 넘실대며 점점 나에게 다가온다. 이윽고 출발선이 나타났다. 다시 마라톤이 시작되었다.


출발과 함께 터져 나온 웅장한 함성과 가슴을 뛰게 하는 음악에도 불구하고 평정심을 유지하기 위해 애썼다. 달려야 할 거리를 생각하면 처음부터 오버페이스는 금물이다. 코스 운영계획은 아주 간단했다. 6분/km 속도로 처음부터 끝까지 달리는 것이다. 그렇게만 된다면 2시간에서 2시간 10분 사이에 도착할 것이다.


광화문 광장을 지나자 흥분된 분위기는 금세 사라지고 침묵 속에 사람들이 내딛는 발자국 소리만 들렸다. 그 소리는 흡사 군인들의 행군 소리처럼 비장하게 들려왔다. 흐린 날씨 속 광화문 광장에서 출발한 대열은 세종대로를 따라 시청 쪽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웅장한 세종대로 위를 달리는 기분은 오묘했다. '도로'라고 불리는 이 공간을 차들에게 내어준 후, 보도블록과 도로 사이의 연석은 넘을 수 없는 경계가 되어버렸지만, 지금 나는 허락되지 않는 이 공간 위를 당당하게 뛰고 있다. 마치 의기양양한 개선군처럼.


시청 건물이 나왔다. 출발한 지 약 1km 정도 되는 지점이다. 그때 왼쪽 무릎에 불편한 느낌이 들었다. 아직 20km나 남은 상황에서 생긴 예기치 못한 일이다. 순간 가슴이 덜컥했지만 여기서 포기할 수는 없었다. 일단 계속 달려본다.


서소문고가 양쪽으로 늘어선 회색 빌딩들은 회색 구름 아래 더욱 거대해 보였다. 결혼 전까지는 서울에서 살았기 때문에 이 도시가 그리 낯설지는 않지만, 이렇게 서울의 심장 위를 직접 달리는 것은 사뭇 다른 느낌이었다. 나는 마치 놀이공원에 처음 와본 아이처럼 사방을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7km 지점을 통과하고 마포대교 위로 올라섰다. 옆으로 고개를 돌리자 시원하게 뻗은 한강이 눈에 들어왔다. 강을 따라 흐르는 바람이 나를 강하게 부딪히고 지나간다. 상쾌하다. 뭔가 홀가분한 기분이 든다. 그 순간만큼은 무릎의 통증도 레이스 완주에 대한 압박도 잊어버린 채 눈앞의 풍경과 감정을 오롯이 즐길 수 있었다. 어떠한 속박도 느껴지지 않았다. 만약 옆에 아는 사람이 같이 뛰고 있었다면 '너무 좋지 않아?' 하고 물어봤을 것이다.


마포대교에서 내려오면 여의도로 이어진다. 10km 코스에 참가하는 주자들에게는 여기가 골인지점이다. 마지막 스퍼트를 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이제 반절 왔구나.' 하고 생각하니 남은 거리가 길게만 느껴졌다. 조금씩 지쳐가고 있을 때 즈음 급수대와 간식코너가 나왔다. 첫 만남에서는 거들떠보지도 않았지만, 이번에는 상황이 좀 달랐다. 바나나 반개와 물 한 모금으로 지친 몸을 달래 본다. 바나나의 27%는 탄수화물이고, 그것들이 내 몸에 흡수되어 글리코겐으로 바뀌면 두 다리를 움직이는 힘이 될 것이다. 진짜로 그런 일이 일어나는지는 잘 모르지만, 상상만으로도 힘이 나는 것 같았다.


11km 구간에서는 요란한 음악이 흐르는 지하터널을 지나갔다. 마치 나이트클럽처럼 싸이키가 터지고 형광색 조명이 춤을 추고 있었다. 여기저기서 환호성이 들린다. 정말 신나서 내는 소리인지, 힘을 내기 위한 몸부림인지, 어쩌면 둘 다 일지도 모르겠다. 사실 나도 '유휴~' 하고 오직 나한테만 들릴 정도로 소심하게 소리를 내었는데, 내뱉은 소리의 크기만큼 몸이 가벼워지는 것 같았다.


다시 한강을 건너가기 위해 양화대교에 올라섰다. 하지만 처음 한강 다리를 건널 때만큼 신나지는 않았다. 이미 13km를 달려온 상태였고, 강한 바람을 마주하며 달리야 했기에 힘은 두 배로 들었다. 그래도 경치는 참 좋았다. 달리다가 멈춰 서서 사진을 찍는 사람들도 많이 보였다. 그들은 마치 축제를 즐기는 듯했다. 하지만 즐길 수 있는 건 20km를 넉넉하게 달릴 수 있는 사람들의 몫이고, 나에게 그런 여유는 없었다. 지친 다리가 언제 멈춰 설까 노심초사할 뿐이었다.


양화대교를 지난 후 합정역 사거리에서는 크게 왼쪽으로 돌았다. 이곳에는 응원을 나온 러닝 크루들이 잔뜩 모여 꽹과리, 장구를 울리고 있었다. 생판 처음 보는 남이지만 나도 그들에게 손을 흔들어 주었다. 몇몇 사람들이 나를 보고 파이팅을 외쳐주었다. 점점 일그러져가는 얼굴에 잠시나마 웃음기가 돌았다.


레이스 초반부터 불편했던 무릎은 망원역으로 향하는 오르막길에서 상태가 악화되었다. 파스를 들고 있는 진행요원을 만나 무릎에 뿌리고 다시 출발했지만 효과는 크지 않았다. 다리가 점점 한계에 다다르고 있을 때 즈음 저 멀리 상암 월드컵경기장이 보이기 시작했다.


'이제 얼마 남지 않았어!' 하지만 그건 착각이었다. 월드컵경기장을 지나쳐 한참을 더 뛰어간 후 반환점을 돌아서 다시 와야 레이스가 끝난다. 스마트 워치를 확인해보니 아직 5km 남았다. 그런데 예상보다 페이스가 빨랐다. 잘하면 2시간 안에 들어올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두 다리는 거의 붕괴 직전이었지만, 한편으로 기록에 대한 욕심이 생겨났다. '좀 더 빨리 조금만 더' 지친 몸을 채근하며, 두 무릎을 억지로 끌어올려보지만 다리는 점점 무거워질 뿐이다. 상암 월드컵 경기장을 지나쳐 반환점을 돌아 다시 돌아오는 마지막 코스는 지루한 일직선 코스였다. 왠지 가도 가도 끝없이 이어진 길을 달리는 기분이다. 그때 이미 다리는 한계를 넘어선 상태였다. 물에 빠진 사람처럼 허우적거리며 달리고 있었지만, 이를 꽉 깨물며 마지막 근력을 짜내 본다.


20km 지점이 나왔다. '조금만 더 이제 1km만 더...' 하지만 그건 내가 경험했던 가장 길고 힘든 1km였다. 그러다 어느 순간 홀연히 골인 지점이 나타났다. 골인지점 위에 커다란 시계는 이제 막 2시간을 넘어가고 있었다. 나는 뒤에서 늦게 출발했기 때문에 2시간 안에 골인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마지막 순간 몸을 내던지듯 결승선을 통과한다.


21.0975km, 1시간 58분 53초 완주!
턱걸이기는 하지만 기어이 2시간 안에 들어오고야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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