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마의 시작

by 제이식

장마가 시작되었다.

아직 6월이 끝나지도 않았는데 유난히도 이른 장마이다. 지독한 습기 탓에 물건이고 사람이고 할 것 없이 모두 끈적끈적해져 있었다. 폼롤러 위에 허벅지를 대고 올라탄 채 한쪽 팔꿈치로 몸을 지탱하고 아래 위로 움직이면 살이 폼롤러에 붙었다가 떨어지면서 "쩍~"하고 기분 나쁜 소리가 난다. 하지만 이런 소리는 그리 큰 문제는 아니었다. 허벅지에서 전달되는 강렬한 고통에 비하면 말이다.


달리는 횟수와 정도는 이전보다 훨씬 줄인 상태로 근력운동과 스트레칭에 집중을 했지만, 허벅지 근육이 뭉치는 일은 자꾸 반복되었고, 그때마다 폼롤러 마사지를 했다. 몇 주간 이런 일들이 반복되었는데, 점점 더 폼롤러에 위에 올라가는 것이 두려워졌다. 깊은 숨을 몇 번씩 몰아쉬고 폼롤러 마사지를 시작하면 몇 회 반복하다 말고 도저히 견딜 수 없는 고통 때문에 폼롤러 위에서 도망치듯이 내려오게 된다. 이 어마무시한 고통은 아무리 반복을 해도 적응이 되지 않았다.




"오빠, 이제 마라톤 안 하면 안 돼?'


폼롤러 위에서 낑낑대는 모습이 안쓰러웠는지 어느 날 아내가 조심스럽게 나를 말려보았다.


"아냐, 괜찮아질 거야."


대수롭지 않게 그냥 흘러가는 말처럼 받아쳤지만, 사실 속으로 '뜨끔'했다. 괜찮을 거라고 말은 했지만, 사실 확신이 들지 않았다. 지난 2달간 조금도 진전이 없었다. 아니 사실 점점 더 안 좋아졌다. 이젠 습관적으로 오른쪽 허벅지를 주무르고, 얼음팩으로 냉찜질까지 하며 지내고 있다.


'내가 정말 풀코스 마라톤을 완주할 수 있을까?'


생각하고 싶지 않은 의문이 떠올랐다.




모든 예상이 빗나갔다.

일기예보는 분명 장마가 온다 했지만 대신에 폭염이 찾아왔고, 달릴 때 무릎이 아픈 이유는 다리가 아니라 허리 때문이었다. 병원에서 CT촬영 후 의사는 튀어나온 허리디스크가 주변 신경을 누르면서 근육이 긴장하는 것 같다고 했다. 눌린 신경이 허벅지 근육을 자극해서 수축하도록 만들고, 짧아진 근육이 인대를 당기면, 인대가 무릎뼈와 부딪히면서 통증을 느끼게 되는 것이었다. 이게 그동안 달릴 때마다 통증을 느꼈던 원인이었는데, 그런 줄도 모르고 괜히 애먼 허벅지만 폼롤러로 문지르고 있었으니 차도가 없는 건 당연한 결과였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문제의 원인은 알았지만, 예상했던 것처럼 의사는 당장 뛰는 것을 그만두라고 했다. 어쩔 수 없이 수긍하긴 했지만 머릿속은 복잡했다. 한순간에 모든 열정을 쏟아붓던 대상이 사라진다는 것은 받아들이기 힘든 일이었다. 더 이상 새벽 달리기의 상쾌함도, 조금씩 늘어가는 기록을 볼 때의 뿌듯함도, 새 러닝화를 찾아볼 때의 설렘도 느낄 수 없게 되리라 생각하니, 그 빈자리는 너무나도 공허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받아들일 수밖에. 이건 선택의 문제가 아니었다. 감당해야만 하는 선고와 같았다.


'잠시 미뤄두는 것으로 하자.'


우울한 마음이 가시는 건 아니었지만,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춘천 마라톤 대회 접수가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문자가 왔다. 계획대로라면 설레는 마음으로 바로 접수를 했겠지만, 문자를 보고도 씁쓸하게 핸드폰을 다시 호주머니에 넣었다.

마라톤 완주라는 동기를 잃어버리자 꾹꾹 눌려있던 욕구들의 봉인이 해제되었다. 식탐은 폭발했고, 더 이상 담배를 애써 참을만한 이유도 없었다. 퇴근 후에는 운동을 하며 보냈던 시간들은 술자리로 채워졌다.


'그래, 조금 쉬어가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거야.'




6시가 되면 문을 닫는 병원에 늦지 않게 도착하려 부지런히 차를 몰고 서둘러 주차를 한 뒤 진료실에 들어섰지만, 의사는 보자마자 왜 며칠 동안 병원에 오지 않았냐고 채근한다. '왜 병원이 이리 일찍 문을 닫냐'라고 불평을 하고 싶었지만, 일단 참고 일찍 회사 업무를 마치기 어려운 사정을 이야기했다. 의사는 못마땅한 표정으로 별다른 진료도 없이 물리치료를 받고 가라 한다. 이럴 거면 바로 물리치료실로 가면 되지 왜 진료실에 가서 의사를 봐야 하는지 궁금했다.


지하에 있는 물리치료실에 들어서자, 이번에는 왜 마칠 시간이 다 돼서 왔냐고 물리치료사가 채근한다. 왜 내 돈 주고받는 병원 진료를 변명하듯이 사정을 이야기하며 받아야 하는지 잘 모르겠지만 또다시 회사생활의 고충을 이야기하며 그 상황에 대처했다.

물리치료사는 지난번에 치료를 어떻게 했냐고 물었다. 처음 치료를 받을 때 별생각 없이 그저 천정만 보고 누워있어서 딱히 대꾸할 말이 없었다. 그냥 자세히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했다. 그러자 물리치료사는 알겠다고 하고선 언제나 해왔던 방식이 있는 것처럼 막힘없이 장비를 세팅하고 물리치료를 시작했다. 그렇게 시작된 물리치료는 정확히 6시에 끝났다.

늦게 병원에 온 것은 내 탓이고 물리치료사의 퇴근시간은 칼같이 지켜져야 마땅하겠지만 이럴 거면 왜 늦게 왔냐고 타박을 했는지, 왜 늦게 와서 짧게 물리치료를 받아도 내는 돈은 똑같은지 이해가 잘 되지 않았다.

그렇다고 딱히 이런 부분을 항의하지는 않았다. 대신 병원을 나서며 마음속으로 소심한 저주를 퍼부었다.


'여기 다시 오나 봐라! 이 몹쓸 병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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