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덧 가을도 끝자락이 보인다.
낙엽만이 바람 따라 이리저리 뒹구는 새벽거리를 오가는 시간은 언제나 같지만 전조등 없이도 다닐 수 있었던 길들이 이제는 칠흑 같은 어둠 속에 파묻혀 있다. 새로 다가오는 계절이 반갑기보다는 익숙했던 계절이 물러나는 것이 서운하다. 달리기를 멈춘 이후 여름부터 이어온 새벽수영 루틴은 이제 익숙한 일상이 되어버렸다. 핸드폰 기상 알람은 가끔 내가 먼저 일어나 미리 끄기도 하니깐.
이 날은 평소보다 빨리 퇴근했지만, 집 대신 피트니스 센터로 향했다. 안에 들어서자 적막한 공간을 채우고 있는 것은 오직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잔잔한 음악뿐이다. 아무도 없다. 그럴만도 하다. 휴일을 하루 앞둔 금요일 오후에 이런 곳을 찾는다는게 이상한 일인게지. 하지만, 난 이곳에 와야 할 명백한 이유가 있었다.
마음 속으로 다짐했던 '100일의 기다림'을 확인하기 위해서이다.
수영을 하고, 달리기를 자제하고, 앉을 때는 절대 다리를 꼬지 않고, 저녁에는 요가로 유연성을 길렀다. 그렇게 4개월을 보냈다. 그 시간들에 대한 보상을 확인하는 날이다. 곰도 인간이 되는데 100일이 걸렸고, 수능 시험을 잘 보기 위해서도 100일간의 치성을 드리니, 나의 100일간 노력도 무언가 의미 있는 결과를 만들어내지 않았을까? 의학적인 근거 따위는 배제되었지만 그렇게 믿고 싶었다. 완벽한 쾌유까지는 바라지 않는다. 다만 조금이라도 더 오래 뛸 수 있는 상태가 되어있기를...
테스트를 위한 준비에는 소홀함이 없었다. 쿠션감이 좋은 새 러닝화도 준비했고, 최상의 컨디션을 위해 달리기 전 스트레칭도 오랜 시간 아주 천천히 꼼꼼하게 진행했다. 마지막으로 바닥에 누워 긴 숨을 3번 내쉰 뒤, 몸을 일으켜 러닝머신으로 향했다.
러닝머신의 'start' 버튼을 눌렀다. 나에게도 새로운 'start'가 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며.
러닝머신 위에 숫자가 표시된다. 3, 2, 1 그리고 컨베이어가 돌기 시작하면, 나도 천천히 걷는다.
'오랜만이네.'
반가운 마음에 러닝머신에게 마음속으로 인사를 건네 보지만, '윙~윙~' 소리만 낼뿐, 딱히 나를 반기는 눈치는 아니다.
5km/h로 속도를 올렸다. 이 정도면 빠르게 걸어야 하는 속도이다. 400m를 걷고 다시 속도를 올렸다.
8km/h. 이제 걷기에는 벅차고 가볍게 뛰어줘야 한다. 몸이 적응할 수 있도록 천천히 속도를 올렸다. 다시 400m를 뛰고, 속도를 한번 더 올렸다.
10km/h. 내가 항상 뛰던 속도이다. 오랜만이라 그런지 조금 빠르게 느껴졌지만 곧 적응되었다.
'딱 5km만 뛰어보자.'
오랜만에 달리는 거니 욕심부리지 말고 그 정도에 만족하려 했다.
그런데 10분 정도 달렸을까?
아직 몸에 땀도 나기 전에 오른쪽 허벅지가 이상하다. 찌릿찌릿한 느낌. 예전 같으면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계속 달렸겠자만, 이젠 왜 그런지 잘 알고 있다.
'당장 그만둬야 하는데...'
멈춰야 한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쉽사리 손이 정지 버튼으로 가지 않았다. 완전히 멈추는 대신 속도를 좀 낮춰보았다. 다시 8km/h. 하지만 상황의 반전은 없었다. 허벅지 근육이 점점 굳어지고 이윽고 무릎에도 통증이 전해오기 시작했다.
'더 이상은 무리야.'
러닝머신을 멈추고 기록을 봤다. 2km를 조금 넘겼다.
결국 달라진 건 없었다. 아니 오히려 퇴보했다. 3km도 달리지 못했다.
결국 100일간의 노력은 나를 단 1%도 향상시키지 못했다.
'도대체 어쩌란 말인가?'
깊은 낙담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정형외과를 예약하고 회사도 하루 월차를 냈다. 어디가 특별히 아픈 건 아니었다. 그저 지금의 나에 대한 정확한 진단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의학적이고 객관적으로 말이다.
병원은 전에 다니던 곳보다 조금 더 규모가 큰 곳을 예약했다. 시간에 맞춰서 도착하긴 했지만, 진료를 보기 위해서 30분을 더 기다려야 했다. 하지만 늘 있는 일이니,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내 차례가 되고, 진료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의사는 내가 자리에 앉기도 전에 질문을 시작했다. 성격이 급한 건지? 아니면 정말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건지? 예약을 했음에도 30분이나 기다렸으니 일단 바빠서 그러한 것이라 생각하자. 대답을 하고 나도 질문하고 싶은 게 많았지만, 의사는 내가 입을 떼기도 전에 MRI 검사부터 해보자며 검사실을 안내한다. 내 궁금증은 잠시 뒤로 미뤄두고 일단 MRI 검사실로 향했다.
MRI 검사를 하기 위해서는 먼저 옷을 갈아입어야 했다. 간편한 복장으로 옷을 갈아입고 검사실 앞 의자에 앉자 정면에 거대한 암갈색 문이 시선에 들어왔다. 문은 육중해 보인다. 사람이 다니는 통로라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크다. 아마도 거대한 장비를 이동시키기 위해서 이렇게 큰 문이 필요했을 것이다. 아무튼 상당히 위압감을 주는 문이다. 누군가 저 안으로 나를 친절히 안내하지 않는다면 스스로 저 문을 열어볼 엄두조차 나지 않을 만큼.
잠시 기다리고 있자 그 육중한 문이 빼꼼히 열리고 안에 있던 사람이 고개만 내밀어 내 이름을 호명한다. '네!' 하는 대답과 함께 검사실 안에 들어서자 예상대로 안에는 거대한 기계가 있었다. 기계 위에 누워서 귀마개를 끼고 눕자 검사를 담당하는 사람이 와서 뭐라고 말을 했다. 귀마개 때문에 정확히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들었지만, 그냥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MRI 검사가 시작되었다. 마치 거대한 흰 수염고래가 먹이를 삼켜버리듯 나는 거대한 기계의 몸통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고래 뱃속에 들어가도 이것과 비슷한 느낌일까? 사방이 막힌 좁은 원통 속은 생각보다 답답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약간 아늑하게 느껴졌다. 육중한 소음은 귀마개를 뚫고 묵직하게 내 귀를 울렸다. 나는 가만히 눈을 감았다. 그리고 살짝 잠이 들었던 걸까? 주변이 조용해졌음을 느껴 눈을 떴을 때, 거대한 고래는 나를 다시 토해냈다.
다시 진료실에 들어섰을 때, 의사는 내 MRI 사진을 보고 있었다. 이번에도 의사의 질문으로 진료가 시작되었다.
'어디가 안 좋아 보이세요?'
난생처음 보는 MRI 사진이지만, 답을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저기 까만 부분이 안 좋아 보이는데요."
의사는 흡족한 표정으로 정답이라며 곧바로 설명을 이어갔다. 설명은 초등학생도 이해할 만큼 쉽고 친절했다. 사실 너무 평이한 설명이라 내가 이미 알고 있던 사실에서 별로 더해진 것은 없었다. 그리고 마지막에 의사는 정확한 진단명을 알려주었다.
"6번과 요추 사이 퇴행성 추간판 탈출증입니다."
이게 내가 새롭게 알게 된 유일한 사실이다. 의사는 여러 가지 시술과 수술 등을 권했지만, 일단은 버티면서 스스로 이겨내고 싶었기에 모두 거부하고 병원을 나섰다. 그리고 집으로 향하는 길, 그제야 내가 정말 물어보고 싶었던 질문이 생각났다. 안타깝지만 결국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은 들을 수 없었다.
"언젠가는 다시 달리기를 할 수 있을까요?"
이게 내가 하고 싶었던 질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