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기억주사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제이식 Sep 25. 2022

기억주사 #5. 임상시험센터

월요일.

김부장은 임상시험센터가 있는 곳으로 출발하기 위해 내비게이션을 작동시켰다. 문자메세지를 확인하고, 조심스럽고 꼼꼼하게 한 글자, 한 글자 확인하며 내비게이션에 도로명 주소를 입력했다. 내비게이션 상으로 누구하나 갑자기 사라져도 모를 정도로 인근에 민가나 상가 따위는 전혀 없는 그런 위치가 나왔다. 평상시에도 의심많은 김부장은 이런 곳으로 간다는 것이 썩 내키지는 않았지만, 돈 300만원을 생각하며 밀려오는 의심과 걱정을 꾹 눌러놓고 운전을 시작했다. 


임상시험이 이뤄지는 곳은 김부장의 집에서 2시간 남짓 거리였다. 예상은 했지만, 아직 어둠이 완전히 걷히지 않은 좁은 1차선 도로를 따라 한참을 달리다보니 을씨년스러운 기분이 들었다. 김부장은 그래도 이 낯선 도로를 달리는 일이 꽤 긴장되었다. 그는 낯선 것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다. 지금 회사에 다닌지도 벌써 30년째 어쩌면 그는 30년동안 그가 매일 오고가는 동선이외의 지역에 가본적이 없었다. 그만큼 그는 자신의 영역에는 익숙해졌지만, 그 곳을 벗어났을 때 새롭게 적응하는 능력은 떨어져있었다. 그래서 그는 지금 아주 초긴장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어느 덧 도착했다.

김부장 앞에 펼쳐진 것은 허름한 연수원 건물이었다. 다만 입구에 "ILS biologics 임상시험센터"라는 푯말이 있었는데, 이 건물과는 다르게  생생한 모습이 낡은 건물 모습과 아주 크게 대비되었다. 임상시험센터라고 적힌 이 건물은 5층 전체가 하얀색 페인트로 칠해져 있었는데, 군데군데 페인트가 벗겨지고, 건물 꼭대기부터 흘러내린 듯한 녹물로 더렵혀져 있었다. 건물 앞에 널찍한 운동장은 임시 주차장으로 쓰고 있었는데, 엄지손가락 만한 돌들이 심심치 않게 굴러다니는 것이 몇 년동안 방치된 것이 분명하다. 

'강남의 의리의리 한 빌딩에서 면담을 하고, 참가 사례비로 300만 원을 준다 하더니 정작 임상시험은 이런 허접한 곳에서 한다고?'


김부장은 허름한 임상시험센터 건물이 어지간히 실망스러웠다. 이러다가 사기꾼들에게 당하는 것 아닌가 싶은 생각도 들고 여기가 혹시 무슨 인신매매 장소는 아닐까 하는 의심마저 들었다. 이런 끔찍한 곳에서 5일이라는 시간을 보낼 생각을 하니 초장부터 마음이 암담해진다. 그래도 30년만의 장기 휴가인데 이런 쓰레기 더미 같은 곳에서 시간을 보내야 한다고 생각하니 그 또한 허탈했다.


"어서 오세요. 이른 아침 먼 길 오시느라 정말 수고 많으셨습니다."

거대한 회전문을 밀고 들어서자 안내 직원이 김부장을 맞이했다. 


"이쪽으로 오시죠."

현관을 통과하자 안내하는 직원이 김부장에게 다가왔다. 김부장은 안내에 따라 전에는 대회의실로 쓰였을듯한 방으로 들어갔다. 그곳에 있던 또 다른 직원은 김부장이 앞에 앉기를 기다렸다가 그가 앉자마자 다짜고짜 설명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먼저 오늘은 오전에 간단한 검진을 받으실 예정이시고요. 채혈하시고 채뇨하시고 간단히 심전도 검사만 받으시면 돼요. 그러고 나서 오후에는 1차 접종을 받으실 거고요. 성함이 어떻게 되시죠?"

"김XX 입니다."

"네, 숙소는 404호이시네요. 지금 올라가시면 먼저 이 옷으로 환복부터 해주세요."


직원은 환자복처럼 생긴 옷 한 꾸러미를 내밀며 쉴 새 없이 설명을 이어갔다.


"식사는 오전 7시, 12시 정각, 오후 5시 이렇게 3번 계신 방으로 배달될 거예요. 검진을 받거나 접종을 받으시는 시간 외에 다른 시간에는 자유롭게 계시면 되는데요. 단, 저희가 임상시험에 참가하시는 분들의 안전을 고려해서 임상시험 기간만은 출입을 통제하니깐 이 점은 좀 양해를 부탁드릴게요. 그리고 저희가 보안 문제 때문에 핸드폰은 여기 계시는 동안 저희가 잘 보관하도록 할게요. 동의하시나요?"


'동의하냐고?'

이런 안내를 받은 적이 없었기에 김부장은 적잖이 당황스러웠다.

'외출도 안되고, 핸드폰도 압수를 한다고, 그렇다고 동의 못하겠다고 떼쓰면 안 할건가?'


"그럼 끝날 때까지 출입도 안되고, 핸드폰은 나갈 때 돌려주신다는 건가요?"

"네, 여러가지 불편하신 점은 있을 것 같아요. 하지만 정확한 시험과 보안을 위해서 저희가 어쩔 수 없는 부분이니깐 양해해주시고요. 여기에 동의하신다는 서명을 여기에 해주시면 됩니다."


김부장은 전혀 예상치 못한 설명과 반강제적인 동의 요구에 당황했지만, 그리 오래 머뭇거릴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여기서 당장 서명을 하지 않으면, 다시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 어렵게 신상무에게 찾아가서 모멸감을 견뎌가며 휴가도 냈다. 더군다나 300만원을 날리는 것이다. 몰상식한 행동이라고 생각되었지만, 김부장은 오랜 사회생활을 통해 지금 갑을 관계에 대해 명확히 파악하고 있었다. 지금 이 순간 김부장은 명확한 '을'이다. 그에게 선택권은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다만 마음 한 구석에 찝찝함이 남아있을 뿐이다.


김부장은 머뭇거리던 손은 이윽고 펜을 들고 동의서를 읽어보는 척하다 그냥 서명을 해버렸다.


'혹시 질문 있으신가요?'


질문? 그런 알량한 예의따위는 김부장이 바라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그냥 빨리 이 억압적인 상황을 회피하고 싶었다.


"아니요. 그럼 지금 방으로 올라가면 되나요?"

"네. 그럼 방으로 가셔서 환복하시고 대기해주시면 되요. 저희 안내직원이 시간되면 찾아뵙고 시험 진행할 예정입니다."


김부장은 황급히 방을 나왔다. 그리고 그의 방으로 향했다.


김부장은 그냥 자신이 들고 온 짐과 방금 받은 옷을 들고 4층으로 올라갔다.




엘리베이터는 좁고 낡았다. 문은 고장난 관절처럼 전혀 부드럽지 않게 삐그덕 거리는 소리를 내면서 열고 닫혔다. 운행 중에도 '끼익'하는 소리가 마음을 불안하게 했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김부장 앞에는 빨간 카페트가 펼쳐져 있었다. 그 위로 그는 캐리어를 끌고 방 앞에 도착했다. 암갈색 나무로 된 문은 따로 잠금장치는 없는 것 같았다. 문고리를 비틀어 열고 들어가자 방 안에는 병실용 침대 2개가 나란히 있었다. 2명이 함께 쓰는 방인 것 같다. 그는 누가될지는 모르겠지만 그이 룸메이트가 도착하기 전에 재빨리 창가쪽 자리에 그의 짐을 옮겨놓았다. 


4층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김부장은 빨간 카펫이 깔린 복도를 따라갔다. 방은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다. 하지만 문 앞에서 써진 방 번호를 확인한 김부장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404호. 앞으로 이 방에서 4번의 밤을 보내야 하는구나. 그런데 왜 하필 404호야?'


방에 들어서면서 약간 깨림칙한 느낌이 들기는 했지만, 김부장은 크게 개의치 않았다. 김부장은 이런 것에 좀 무던한 편이기는 하다.


방은 2인 1실인 것 같았다. 나란히 놓인 2개의 싱글 침대와 옷장, 그리고 TV 하나로 방은 꽉 찼다. 넉넉하게 큰 공간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답답할 정도로 작은 공간도 아니었다. 아마도 룸메이트가 될 사람은 아직 도착하지 않은 듯하다. 김부장은 먼저 온 김에 좋은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창가쪽 침대 위에 짐을 풀었다. 영역 표시를 끝낸 김부장은 옷을 갈아입기 전에 건물을 좀 둘러보기로 마음먹었다. 김부장은 방에서 나와 복도 끝까지 걸어갔다. 4층은 전체가 숙소인 듯하다. 긴 복도를 따라 좌우로 늘어선 방들말고는 별 다른 것은 없었다.중앙 계단과 엘리베이터가 있는 로비에는 작은 테이블과 의자 몇 개가 있었다. 계단으로 3층으로 내려갔지만, 그곳도 4층과 똑같은 구조였고, 아직 다들 입소하기 전인지 복도에는 정적만이 흐르고 있었다. 별로 둘러볼것도 없겠다 싶어서 김부장은 얼른 2층으로 내려갔다. 


2층은 여러 사람들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 때 간호사복을 입은 사람이 다가와 김부장에게 말을 걸었다.


"어떻게 오셨죠?"

이 곳도 좀 구경할까 했던 참이었는데 김부장은 자리에 멈춰 서서 뒤돌아보았다.


"아, 전 임상시험 참가자인데요."

"아직 여기는 내려오시면 안 되고요. 방으로 가서 옷부터 갈아입어주세요."


머쓱해진 김부장은 "네"하고 짧은 대답만 한채 바로 뒤돌아서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갔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5층에 올라갔다. 그곳은 식당이었다. 텅 빈 식당은 음식도 하고 식사도 할 수 있는 시설이 갖춰져 있었다. 굳이 이런 식당을 갖추고서 왜 식사를 각자 방으로 배달해준다는 건지 잘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룸서비스처럼 가져다주는 식사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대략 건물을 훑어본 김부장이 다시 방으로 돌아왔을 때, 김부장은 낯선 남자와 마주쳤다. 그는 4박 5일동안 김부장과 함께할 룸메이트일 것이다. 


"안녕하세요."

갑작스레 마주친 두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거의 동시에 인사를 했다.


김부장은 인사를 하면서도 먼저 상대방의 외모를 자세히 스캔했다.

대략 나이는 2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 정도로 보인다. 170cm가 조금 넘을 듯 말 듯한 키였지만, 다부진 어깨를 보니 헬스장은 좀 다닌 듯하다. 잡티 하나 없는 하얀 피부 위로 정성껏 만진듯한 앞머리는 번지르하게 윤기가 흐르고 있었다. 아마 스프레이로 떡칠을 했나보다. 한쪽 귀에만 귀해깔끔하게 빗어 넘긴 앞머리는 왁스로 단단히 고정되어 있었다. 한쪽 귀에는 귀걸이가 걸려있는데, 번쩍거리는 것이 진짜 금인지 아니면 금도금만 대충한 싸구려인지는 잘 구별이 되지 않았다. 입고 있는 옷은 얼핏 보고 명품인줄 알았는데, 자세히 보니 디테일이 조잡한 게 '짭퉁'인 것 같았다. 시계하고 신발도 마찬가지이다. 그럴듯해 보이지만, 숨길 수 없는 조잡함이 그대로 드러난다. 그의 몸에서는 싸구려 냄새가 난다. 그는 아마 감추고 싶었겠지만, 오랫동안 신상무를 가까이에서 보아온 김부장의 매서운 눈을 피할 수는 없었다. 김부장은 속으로 '어디 호스트바에서 누님들 상대하다 온 거 아니면 부잣집 사모님 하나 꼬여서 사기나 치고 다닐만한 놈이군.' 하고 그를 첫인상에 규정했다.


이런 종류의 인간은 상종해봐야 피곤한 일만 생길 것 같았다. 왠만하면 말을 섞지 않고 조용히 지냈으면 하는데 이 사기꾼 같은 것이 먼저 말을 건다.


"저도 서둘러서 온다고 왔는데 아저씨는 엄청 빨리 오셨나 보네요. 집이 어디세요?"

"아, 전 서울..."

"와! 좋은데 사시는구나. 난 시골출신인데..."


되도록이면 짧게 대답하고 끝내려는데 요 어린 녀석이 쉽게 놓아주지 않는다.


"아무튼 저희 꼼짝없이 4박 5일 동안 붙어 다닐 처지네요. 전 '채이서'라고 해요. 아저씨가 저보다 한참 위일 것 같은데 그냥 '이서'라고 부르세요. 말도 편하게 놓으세요. 아저씨는 이름이 뭐예요?"

"전.. 김XX 이라고 합니다."

"참. 아저씨 말 편하게 말 놓으시라니깐요."

"아... 그럴까? 근데 난 잠깐 화장실 좀..."


김부장은 빨리 이 난처한 상황을 벗어나고 싶어 어색한 핑계를 대고 다시 그 방을 나왔다.





매거진의 이전글 기억주사 #4. 세 가지 질문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