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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기억주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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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이식 Nov 06. 2022

기억주사 #10. 망각

셋째 날, 아침.


김부장이 일어났을 때 창밖은 아직 땅거미가 다 물러가지 않아 어둑어둑했지만, 대충 사물을 식별할 수 있을 정도는 되었다. 김부장은 평소와 같이 자리에서 일어나 가지런히 이불을 갠 뒤에 그 옆에 걸터앉았다. 말끔하게 정리된 침대를 보고 있으니 왠지 모르게 안도감이 들었다. 


김부장은 골똘히 그가 해야 할 일에 대해서 생각해봤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그가 해야 할 일을 찾을 수 없었다. 단지 아침식사가 오기만을, 간호사가 들어와서 그의 다음 일정을 알려주기만을 기다려야 했다. 그 시간은 꽤나 지루하게 느껴졌다. 김부장은 대충 오늘 하루를 예상해보기로 했다. 아마 아침을 먹고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2차 접종을 하러 갈 것이다. 처음에 그렇게 안내했으니 별일이 없다면 그리 할 것이다. 어제 검사 결과가 어땠는지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김부장이 느끼기에 그는 이곳에 온 이후로 그는 점점 건강해지고 있었다. 평소와 달리 밥맛도 좋고, 왠지 모르게 정신도 더욱 또렷해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딱히 그럴만한 이유는 찾을 수 없었지만 말이다. 


그래도 오늘은 2차 접종이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잠들었다 깨어나는 것이 누군가에겐 불안한 일일 수도 있지만 김부장에게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그에게는 기다려지는 사건이다. 이렇게 햄스터처럼 건물 안에 갇혀서 쳇바퀴 돌리듯 복도만 뱅뱅 돌고 있을 바에야 차라리 주사를 맞는 게 훨씬 좋았다. 김부장은 그냥 시간에 맞춰서 주사실에 들어가기만 하면 된다. 그럼 모든 것이 끝난다. 그가 해야 하는 일도, 할 수 있는 일도 딱 그것뿐이다. 주사실 가운데에 누워 얼굴을 구멍 사이로 내밀고 숫자를 세고 있으면 열까지 세기도 전에 그는 잠들어 버릴 것이다. 그리고 수시간이 지난 후 말끔하게 정리된 침대 위에서 다시 그의 삶은 시작된다. 어떠한 고통도 없다. 실제로 주삿바늘이 그의 뇌 속을 비집고 들어가 그의 머릿속을 헤집어 놓고 다녔을지언정, 그의 뇌는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한다. 흔적을 남기지 않은 고통은 고통이 아니다. 흔적이 없는 슬픔 또한 마찬가지이다. 물론 흔적이 없는 행복 또한 행복이 아닐 테지만.


그런 의미에서 망각할 수 있는 방법을 개발한 것은 정말 축복과도 같은 일이다. 그것은 우리에게 고통받지 않을 자유를, 슬퍼하지 않을 권리를 부여했다. 어떠한 부작용도 없이 말이다. 하지만 그건 분명 신의 의도는 아니다. 우리는 쓸데없이 고통을 느끼도록 설계된 채 태어났다. 그건 아마 삶의 영속성을 위한 자기 방어기제 같은 것일 것이다. 그렇게 생각해보면 삶은 스스로를 위한 것이 아니다. 우리는 인간이라는 종족의 유전자를 후대에 전달하기 위한 하나의 매개체로서 존재할 뿐, 그 사명과 의무를 다하기 위해 고통받으며 이유조차 망각한 채로 삶을 연장하고 있다.


그래! 그 사실을 지금이라도 알게 되었다면 한번 선택을 해보자! 

고통스러운 긴 삶을 살 것인가? 아니면 고통 없는 짧고 행복한 삶을 살 것인가? 굳이 인간이라는 종족의 영생을 위해 나를 희생할 필요가 있을까? 김부장처럼 환갑을 코 앞에 두고도 결혼도 못한 처지라면 더욱 그럴 필요가 없는 것 아닌가?


그렇게 김부장이 잠시 혼자만의 망상에 빠져 있는 사이, 빼꼼히 문이 열리고 간호사가 들어와 김부장에게 메모지를 하나 건넸다. 메모지에는 김부장이 주사실로 내려갈 시간이 적혀 있었다. 김부장은 메모를 흘끗 본 후 담담하게 메모지를 한쪽 구석에 놓아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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