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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기억주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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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이식 Nov 21. 2022

기억주사 #12. 작당모의

잠에서 깨어난 뒤에도 김부장은 한참 동안 꿈속에서 헤어 나오지 못했다. 매 순간은 되뇔수록 점점 또렷해졌고, 느낌은 더욱 생생하게 살아났다. 꿈을 다시 회상하는 일은 마치 한번 손을 댄 담배와 술처럼 계속해서 그것을 다시 떠올리게 만들었다. 누가 뭐라 해도 김부장은 꿈을 회상하는 일을 멈출 수 없을 것 같았다. 김부장의 머릿속은 온통 꿈속의 장면들로 가득 찼다. 보통 꿈에서 깨어나면 그것들은 알코올 솜으로 닦아낸 피부의 느낌처럼 잠시 뒤 사라지기 마련인데, 이번에는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강렬한 여운을 남겼다.


"왜 그런 거지?'

...

'주사 때문인가?'

'혹시 이건 누군가의 기억이 아닐까?'


김부장은 휘발되지 않는 꿈에 대해 의심을 품기 시작했다. 분명 주사는 기억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고 설명했었지만, 솔직히 그걸 누가 보장할 수 있는가? 더군다나 지금은 겨우 임상시험 1상 단계가 아닌가? 기억주사가 어떤 부작용이 있는지 누가 알겠는가?


김부장은 혹시 그 꿈이 주사의 부작용은 아닐는지, 혹시 누군가의 기억이 주입된 것은 아닌지 의심하기 시작했다. 생각할수록 생각은 의심의 꼬리를 물고 또 물었다. 그리고 의심은 김부장을 불안의 수렁으로 안내했다. 방금 발을 디뎌을 뿐인데, 어느새 불안의 늪은 김부장의 숨을 막을 만큼 깊숙이 김부장을 끌어당기고 있었다. 이대로라면 김부장은 숨이 막혀 죽을 것만 같았다.


'안 되겠어. 당장 이 사실을 의료진한테 말할까? 그들은 보나 마나 잡아떼겠지? 그들이 잡아뗀다고 해서 무슨 증거가 있는 것도 아니잖아? 그냥 이건 그냥 꿈일 뿐이라고 하면 뭐라 하지? 아무것도 할 수 없잖아. 그래 이건 그냥 꿈일지도 몰라. 하지만 뭔가 달라. 분명!'


"이서야. 너 혹시..."

김부장은 이곳에서 온 후로 채이서에게 먼저 말을 건네 본 적이 없었지만, 벼랑 끝에 내몰린 자신의 불안함으로부터 구원해줄 누군가가 필요했던 것이다. 그게 평소 탐탁지 않게 생각했던 채이서일지라도 말이다. 채이서는 김부장을 향해 등을 돌린 채 누워서 핸드폰에 열중하다가 김부장의 목소리를 듣고 살짝 놀랐다. 그도 김부장이 먼저 말을 걸 것이라고는 전혀 예상치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예? 아저씨 뭐라고 했어요?"

채이서는 의아한 표정으로 상반신만 반쯤 돌린 채 김부장을 쳐다보았다.


"아.. 아니야. 그냥 하던 거 해."

김부장은 구원의 손길이 필요하긴 했지만, 선뜻 용기가 나지 않았다. 괜히 꿈 이야기를 했다가 이상한 사람으로 내몰릴까 봐 걱정이 되기도 했다.


"참. 아저씨도. 할 말 있으면 그냥 하세요. 뭐 제가 불편하게 해 드린 거 있나요?"

"아니. 그건 아니고..."


"아니면 말씀해보세요."

"혹시 너도 주사 맞고 와서 꿈꾼 적 있어?"


"꿈이요? 무슨 꿈이요? 전 원래 그런 거 잘 안 꿔요."

"아. 그래."


"그런데 아저씨는 꿈꿨어요? 무슨 꿈이에요? 혹시 이거 부작용 같은 거 아니에요?"

단지 김부장은 '꿈'이라는 한마디 내뱉었을 뿐인데, 채이서는 벌써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아저씨. 이상한 꿈 꾼 거 맞죠? 평소에는 잘 안 꾸던 꿈같은 거. 그거 주사 부작용일지도 몰라요. 역시 이것들이 제대로 약을 만들었을 리가 없지. 우리한테 말한 거 아마 다 구라일 거예요. 일단 아저씨 어떤 꿈인지 한번 이야기해봐요. 그리고 저 녀석들한테는 함부로 말하지 마세요. 그냥 시치미 떼고 아저씨한테 무슨 이상한 짓을 할지도 모르잖아요."

채이서는 이미 소설의 장르도 정한 것 같다. 누아르 소설이다. 그는 확신에 차 있었고, 무슨 거대한 물증이라도 잡은 거 마냥 허연 흰자위를 희번덕거리며 김부장의 코 앞까지 어느새 다가와 있었다.


"뭐 그렇게 이상한 꿈은 아니었고..."

"그래서 무슨 꿈인데요?"


채이서는 김부장 옆에 바짝 다가와 꿈 이야기를 해달라고 닦달했다. 김부장은 어쩔 수 없이 자신의 꿈 이야기를 채이서에게 들려주어야 했다.


"아저씨, 제가 보기에 이건 누군가의 기억인 거 같아요. 그런데 이거 어쩌면 죽은 사람의 기억일 수도 있어요. 누군가 죽기 직전에 보고 느낀 기억 말이에요. 이것들이 무슨 약을 개발한답시고 어쩌면 엄청난 짓을 한건 지도 몰라요. 일단 이게 누구의 꿈인지를 알 수 있으면 좋을 텐데. 혹시 뭐 구체적으로 보고 들은 거는 기억 안 나요?"

"특별한 건 없었고, 그냥 거기는 바닷가 같긴 했는데... 파도소리가 들리고, 뭔가 낡은 대문 소리 같은 것도 들렸고, 누군가 떠드는 소리도 들리긴 했는데, 무슨 말이었는지도 하나도 안 들렸고..."

"어쩌면 아저씨 이게 누군가의 기억이라면 다시 똑같은 꿈을 꾸거나, 아니면 갑자기 꿈속의 기억이 갑자기 날 수도 있거든요. 그러니깐 항상 메모지를 들고 다니세요. 그리고 다른 사람들한테는 절대 말하지 말고요. 저한테만 말해야 돼요. 일단 증거를 잡고 나서 들이밀어야 해요. 빼도 박도 못하게. 그러니깐 생각나는 건 모조리 적은 다음에 저한테 이야기해줘야 돼요. 아셨죠?"

"그래. 알겠는데... 너..."

"와! 대박! 내가 이럴 줄 알았어! 역시 여기는 평범하게 임상 시험하는 곳이 아니에요. 이것들이 뭔가 엄청난 범죄를 저지르고 있는지도 몰라요. 이거 제대로 잡으면 엄청 크게 뜯어먹을 수 있을지 몰라요!"

"돈?"

"그렇죠. 보니깐 이것들 돈은 엄청 많은 거 같던데... 잘 약점을 잡으면 크게 한방 먹을 수 있을지도 모르잖아요!"

"아니, 난 그런 거는 아니고..."

"하. 아저씨는 걱정 말아요. 제가 다 알아서 할 거니깐. 아저씨는 그냥 꿈 이야기만 나한테 해주면 돼요!"

채이서는 번뜩이는 눈으로 김부장을 채근했고, 김부장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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