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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나폴레옹의 음식들

전쟁영웅과 음식(1) : 병조림과 마가린

by 송지

'군인도 먹어야 싸운다' 라는 명언을 남긴 나폴레옹은 음식에는 관심이 없기로 유명했다. 항상 음식을 급하게 가리지 않고 분별없이 먹었기 때문에 결국 위궤양으로 세상을 떠났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그러나 그는 수많은 전쟁의 승리를 위해 전술의 일환으로 혁신적인 식품을 개발한 전략가였다. 프랑스 혁명보다 더 혁명적인 이 식품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한다.

19세기 프랑스는 안정의 시대였고, 미식의 역사에서도 결정적인 전환기였다.
전설적인 요리사 카렘과, 위대한 미식가 탈레랑과 캉바세레스,
역사적인 미식 평론가인 브리야사바랭이 서로 공존했던 시기였다.
이로 말미암아 레스토랑이 확산되고 식품산업이 발달해
근대 미식학이 제자리를 잡아간 때이기도 했다.

1804년 12월 나폴레옹은 시민투표를 통해 압도적인 지지를 얻으며 황제에 등극했다. 이에 영국과 다른 유럽 국가들은 대프랑스 동맹군을 결성해 프랑스를 압박했다. 나폴레옹이 전 유럽을 정복하겠다는 야심을 거두지 않을 것이므로 그들로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정작 나폴레옹이 두려워한 것은 동맹군이 아닌 군량보급이 안되는 상황이었다. 나폴레옹은 군량 보급을 무엇보다 중요하게 여겼다. 이유는 툴롱 전투 후 발병받은 북부 이탈리아 전선에서 받은 충격 때문이었다. 먹을 것이 충분하지 않아 부대 인근의 민가에 쳐들어가 약탈을 일삼을 정도로 굶주림에 시달리고 있던 병사들과 그 상황에서도 상다리가 휘어지게 호화로운 상을 받던 장군들...이때의 기억으로 나폴레옹은 황제가 되자마자 프랑스 전역에 오랫동안 음식물을 보관할 수 있는 용기를 만들 것을 명했다.

1795년에 프랑스 정부는 음식을 신선하고 상하지 않게 오래 보존하는 방법을 공모했다. 당시 상금은 1만 2천 프랑이었다. 15년이 흐른 뒤 니콜라 아페르라는 제과업자가 그 상금을 차지했다. 그래서 나온 것이 '병조림'이다. 그가 고안한 병조림은 유리병에 요리한 음식을 넣은 다음 코르크 마개로 입구를 막은 후 뜨거운 물에 넣어 살균하는 방식이었다. 그래서 식품을 가열살균하여 밀폐된 용기에 저장해 통조림으로 만드는 것을 그의 이름을 따서 '아페르화' 라고 하는 것이다.

나폴레옹은 크게 기뻐하며 대육군(나폴레옹이 모집한 다국적 군대)에게 병조림을 정식 군량으로 제공하도록 했다. 간편한 휴대 식품인 병조림을 갖춘 프랑스군은 군량보급을 걱정하지 않으며 기동력을 발휘할 수 있었고 이를 바탕으로 유럽 전역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이후 쉽게 깨지는 단점을 가진 병조림을 영국에서 철제 통조림으로 발전시켰다. 그러나 통조림을 열 따개는 1870년 미국인 윌리엄 라이만이 개발했다. 우리도 흔히 아는 바퀴처럼 생긴 통조림 뚜껑은 불과 10년 전까지만 해도 거의 모든 가정에서 사용했지만 최근 들어서는 이마저도 무용지물이 되었다. 통조림 윗부분을 미리 살짝 잘르고 손잡이를 붙힌 원터치 캔이 대세가 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그는 식사예절에 대해서도 후대에 전해질 만한 일화를 남겼다. '식탁 위의 평등'에 관한 것이다. 이탈리아 원정을 마친 후 나폴레옹은 툴룽 근처의 어느 시장 집에 초대되었다. 시장은 이 젊은 승리자를 축하하기 위해 정교하게 만들어진 크리스털 잔을 내놓았다. 그 밖에 다른 회식자들에게는 보통의 유리잔을 내어 주었다.


나폴레옹은 시장에게 요리에 대한 칭찬을 아기지 않았다. 그러나

인권선언은 유리잔과 병 앞에서도 시민의 평등을 선언했다는 것을 기억합시다!


라고 일침을 가했다. 프랑스의 군주들은 모두 자신들의 정치권력을 곤고히 하기 위해 국민들에게 훌륭한 식생활을 보장한다는 정치 선동문구를 활용했다. "일요일마다 프랑스 노동자들에게 냄비 속에 든 닭찜요리를 먹게 하겠다"라고 공언한 앙리 4세에 이어 나폴레옹 역시 그러했다.

이렇게 질이 좋지 않은 밀가루를 우리 파리 시민들이 먹어서는 안된다.


라면서 질 나쁜 밀가루를 모두 센 강에 버리라고 명령했다. 주변에서 구경하던 파리 시민들은 모두 그에게 환호했다.


19세기 나폴레옹 집권시기는 '설탕의 대중화'의 초석이 된 사탕무가 개발되었고 전투식량으로 요긴했던 '병조림'이 발명된 역사적인 시기다. 바야흐로 '혁신의 시대' 였다. 사탕무와 나폴레옹 이야기는 또 다른 흥미로운 연관관계가 있어 후편에 이어서 하려고 한다.

전쟁으로 인한 혁신적인 식품의 개발은 나폴레옹 1세에 이어 조카인 나폴레옹 3세 시대에도 계속되었다. 마가린은 나폴레옹 3세의 치적 중 하나가 될 수 있겠다.


1869년 마가린이 프랑스에서 최초로 발명되었다.
강력한 제국주의 팽창정책을 펼친 나폴레옹 3세는
크림전쟁(1854-1856)과 멕시코 원정 등 수많은 전쟁을 치러야 했다.
이를 위해 새로운 전투식량이 절실히 필요했다.

당시 프랑스에서 쓰는 조리용 기름은 대부분 버터였다. 값이 비싸고 오래 보관할 수 없는 것이 흠이었다. 군인들이 휴대하기 좋고 일반 서민들도 쉽게 먹을 수 있는 새로운 지방공급원이 필요했다. 나폴레옹 3세 역시 큰 상금을 걸고 버터 대용품 발명을 공모했다.

프랑스 화학자 이플리트 메주 무리에가
마침내 쇠기름으로 버터 대용품을 발명했다.
'마가린'은 라틴어 '올레움' 과 그리스어 '마르가리테'의 합성어로
'올레오마가린'이라 불리다, 후에 마가린이 되었다.

무리에는 1869년에 마가린에 대한 특허를 내고 파리 교외에 공장을 차렸지만 상업적인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다. 결국 1880년에 극빈자로 사망했다. 현재 마가린은 식물성 기름을 사용하지만 당시 마가린은 생선이나 고래기름으로 만들고 탈취공정 조차 제대로 거치지 않아 좋지 않은 냄새가 심했다. 또한 색깔도 버터와는 달리 허연색이어서 인기를 끌지 못했다. 1871년에 그는 특허권을 네덜란드 회사인 "위르겐"에 팔았는데, 이 회사가 지금의 유니레버로 무리에의 레시피를 개량해서 세계적인 마가린 제조회사가 되었다.

나폴레옹 3세 집권 시기에 그 유명한 만국박람회가 개최되었다. 1855년에 열린 만국박람회는 프랑스 와인 역사에 매우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그 박람회에서 오늘날까지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1855년 공식 보르도와인 분류법"이 최초로 선보였다. 그는 와인산업의 전시 성공을 통해 다른 산업 분야까지 영향력을 미칠 수 있기를 바랬다. 또한, 1851년에 증기기관차로 세계의 이목을 사로잡았던 런던 만국박람회의 성공을 능가하려는 열망도 있었기에 그에게 만국바람회의 성공은 매우 중요했다. 이 행사에서 모든 포도주의 가격과 질을 단계별로 책정해 가격까지 제시했다. 이 덕분에 프랑스 와인은 세계적으로 그 품질을 인정받게 된 것이다.

이를 통해 프랑스에서 포도주가 얼마나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것인지도 입증되었다. 초기에는 그저 리스트에 불과했던 와인 품질 등급의 분류 체계는 150년 동안 국제 와인 시장에서 지배적인 위력을 행사하고 있다.


수많은 인명을 앗아가는 전쟁터를 위해 우리의 음식사에 기념비적으로 남을 혁신적인 식품들이 개발되었다는 아이러니가 역사의 단면이 아닐까 한다. 두 명의 나폴레옹들로 인해 병조림과 마가린이 발명되었다는 사실과 이 마가린으로 초일류 기업이 유니레버가 탄생했다는 흥미로운 사실, 알고 계셨나요?


출처: 미식인문학, 전쟁이 요리한 음식의 역사


이범준 교수

미식유산 연구소 소장

제주한라대 호텔외식경영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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