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최고의 외교가 탈레랑과 프랑스 최고의 셰프 카렘
나폴레옹 시대의 또 한명의 앙피트리옹은 "탈레랑" 외무장관이었다. 처세술의 달인인 탈레랑에 대해서는 두가지로 평가가 나뉜다. 혹자는 그를 유럽사에서 가장 뛰어난 외교 전문가로 보지만, 또 다른 혹자는 그를 배신자로 평한다. 그는 앙시엥레짐과 혁명, 나폴레옹과 왕정보고를 차례대로 배반한 노회한 정치가라는 것이다.
나폴레옹은 음식에 일체의 관심이 없었지만 외교에서 미식의 중요성을 일찍이 인식하고 있었기에 1803년에 탈레랑에서 파리 교외에 있는 방대한 사유지인 발라아세성을 매입하라고 큰돈을 건네주었다. 이 성은 당시 외교모임의 중요한 활동 무대가 되었다. 전직 주교 출신의 환속한 외교가 탈레랑에게는 이제 기도가 아닌 '요리'가 인생의 제1의 목적이 되었다.
탈레랑은 발리아세성으로 요리사 카렘을 대동하고 입성했다. 카렘은 후에 프랑스 음식을 체계화한 공로로 요리사들의 요리사로 칭송받는 대요리사가 된 인물이다. 1784년 파리의 어느 초라한 작업장의 가건물에서 태어난 그는 8살이 되던 해에 막노동자였던 아버지로부터 거리에 내버려졌다. 운명의 손길은 그를 허름한 식당으로 인도했고 그는 거기서 처음으로 요리를 배웠다. 그는 천부적으로 요리에 소질이 있었다. 17세에 이미 주목받는 요리인재로 부상한 그는 유명한 페이스트리 상점에 도제 요리사로 근무하였다. 그곳에서 단골손님이었던 탈레랑에게 발탁되었다.
1814년 나폴레옹이 몰락한 후, 오스트리아의 수도 빈은 기념할 만한 연회들의 문대가 되었다. 앙시엥레짐, 혁명, 총재정부, 집정정부, 그리고 현재의 왕정복고를 거치면서도 여전히 건재했던 '절름발이의 악마', 탈레랑은 유럽 역사상 최대 규모의 회의였던 '빈 회의'에 참가한 명사들을 접대하는 유명한 호스트로 다시한번 등장했다.
혁명 때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진 루이 16세의 동생이었던 루이 18세는 자기 형의 처형에 찬성표를 던졌던 탈레랑에게 패전국 프랑스의 운명을 맡기는 아이러니를 만들었다. 루이 18세가 기나긴 추천장 목록을 보내자, 늙은 외교관 탈레랑은
전하, 신은 서면 심리보다는 냄비가 필요합니다!
라고 응수했다고 한다. 이 7개월이 넘는 기간 동안 탈레랑 뒤에는 밤잠을 설쳐가며 유럽 고관대작들의 혀를 사로잡은 중대한 임무를 수행한 '카렘'이 있었다. 매 만찬마다 48가지의 앙트레와 7종류의 구운 고기 요리, 바닷가재, 앙트르메, 마을이나 성의 모습을 한 거대한 페이스트리의 걸작들이 속속 등장했다.
카렘은 자지도 않고 먹지도 않으며 9-10시간 동안 케이크의 초안을 데생하고, 케이크의 비율과 크기 등을 정확하게 계산했다. 그는 자신이 다년간 연구한 성당이나 묘지의 건축으로부터 케이크 디자인의 영감을 받았다고 한다. 그는 후에 자신의 저서에서 아래와 같이 기술했다.
조형예술에는 그림, 조각, 시, 음악과 건축 등 다섯가지가 있는데,
건축의 가장 중요한 분야가 페이스트리다.
1815년 2월, 영국의 웰링턴 공작을 위해 탈레랑이 조직한 연회는 가스트로노미의 정점을 찍은 기념비적인 사건으로 기록되고 있다. 탈레랑은 당시 시계에서 가장 최고의 치즈를 선발하는 경연대회를 주최했다. 그리고 브리산 원반 치즈를 프랑스에서 공수해오도록 했다. 그것은 빈의 명사들의 입맛을 석권한 것은 물론, 프랑스 측에 유리한 정치 협상을 이끌어내는데 지대한 공을 세웠다고 평가 받는다.
*웰링턴 공작은 영국 육군 원수이자 나폴레옹 전쟁 당시 영국 육군 최고의 지휘관으로 워털루 전투에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시대를 끝낸 명장이다. 또한 '비프 웰링턴'를 탄생시킨 장본인이기도 하다. 전장에서 고기가 먹고 싶었지만 다른 군인들 앞에서 먹을 수가 없어서 빵에 싸서 먹었던 것에서 비롯되었다는 설이 있다.
나폴레옹이 완전히 몰락한 후 카렘은 영국으로 건너가 후일 조지 4세인 섭정 황태자의 요리를 전담했다. 이후 영국에서 귀국하자마자 카렘은 러시아 황제 알렉산드로 1세에 초청을 받게 되고 또 다시 파리로 돌아와서는 부유한 유대계 은행가인 로스차일드 남작의 수석 요리사가 되었다. 당시 그의 식탁은 유럽 최고라는 칭송을 받았다. 그는 진정 역사상 최초의 세계적인 스타 셰프였다.
그는 거리의 사람들이 자신을 알아보고 찬미할 수 있도록 자신의 요리책에 본인의 자화상을 삽화로 넣는 주도면밀함을 보이기도 했다. 로스차일드는 그에게 그의 성에서 여생을 마칠 것을 제의했지만 그는 정중히 거절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마지막 소원인 파리의 자택에서 조용히 여생을 보내지 못하고 자신의 저서를 중도에 포기한 채 4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후세 사람들은 유독한 연기를 내뿜는 목탄 위에서 평생을 요리했기에 그의 수명이 단축되었지 않았나라고 추측을 하고 있다.
카렘은 요리사의 모자인 '토크'와 셰프 가운을 개발했으며, 4개의 마더소스를 기본 축으로 모든 종류의 소스를 일목요연하게 분류하는 체계를 수립했다. 카렘의 요리가 '상류층의 요리'에만 국한되어 있다는 평가를 무시할 수는 없지만 프랑스 오트 퀴진의 개념을 정리한 진정한 창시자임에는 분명하다.
그의 생애는 성실과 고귀함의 표본이었다. 그는 돈보다 요리 예술을 가장 우선시했다. 또한, 세련미, 질서, 합리성이라는 3대 원리가 서로 잘 조화되는 최상의 요리를 만들고자 노력했다. 물론 이 뒤에는 카렘에게 허브와 신선한 야채를 사용하고, 가능하면 소수의 엄선된 재료를 사용하며, 소스의 단순화를 추구하라는 대미식가 탈레랑의 수준높은 취향이 한몫을 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이 세상에 좋은 요리가 없다면
문학도, 높고 날카로운 지성도,
우호적인 모임도, 사회적인 조화도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마리 앙투안 카렘)
출처 : 미식인문학
이범준 교수
미식유산연구소 소장
제주한라대학교 호텔외식경영학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