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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옹과 두 명의 미식가들(1)

소식가인 나폴레옹과 대미식가 캉바세레스

by 송지

제가 뭘 잘하는지는 아직 못 찾았지만 좋아하는 게 무엇인지는 꽤 명확합니다. 제가 가장 좋아하는 건 음식이에요. 먹는 행위도 물론이지만 더 좋아하는 건 음식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음식 만드는 방법이나 음식 재료 등에도 호기심이 있지만 저는 언제나 음식의 유래 혹은 음식과 관련된 인물의 이야기가 늘 흥미롭습니다. 오늘은 누구나가 다 아는 프랑스의 영웅 "나폴레옹"과 주변 인물들, 그리고 그들과 얽힌 미식의 역사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려고 합니다.


19세기는 부르주아의 시대였습니다. 프랑스혁명(정치)과 산업혁명(경제)을 통해서 이들 계급이 탄생했고 이들이 사회의 당당한 주역이 되었어요. 그때부터 지금까지 음식과 식탁예절은 "사회소속"을 의미하는 표식으로 자리잡아 왔습니다. 혁명으로 인해 갑자기 부유해진 부르주아들은 레스토랑을 자주 출입하게 되었지만 귀족적인 식도락의 예절이나 올바른 와인 매너는 알지 못했어요. 그래서 미식에 대한 강연 및 문학에 대한 시대적인 요구가 높았습니다. 이런 시대적 상황은 지금도 되풀이 되고 있죠.


나폴레옹은 알렉산드로스, 카이사르와 더불어 서구의 3대 명장이라 불립니다. 1769년 코르시카 섬에서 태어난 그는 24살이 되던 해인 1793년 툴롱 전투에서 영국 함대와 왕당파 반란군을 격퇴한 것으로 시작으로 3년 후에는 이탈리아 원정에 나서 밀라노를 점령하고 오스트리아군을 이겼습니다. 이어 1797년에는 수도 비엔나에 입성해 오스트리아를 항복시키고 1798년 이집트 원정을 떠나 카이로를 점령했고요. 그러나 연일 계속되는 그의 승전에 두려움을 느낀 통령정부가 그를 제거하려 하자 이집트에서 돌아와 1799년 11월 쿠데타로 자신이 새로운 통령이 되어 프랑스의 전권을 차지하게 됩니다. 이후 그는 더욱더 전쟁에 박차를 가해 1800년 이타리아의 마렝고에서 오스트리아군을 완벽히 제압해 라인강 서쪽과 이탈리아 북부 등 많은 영토를 차지했습니다. 이 마렝고 전투에의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탄생한 음식이 바로 '치킨 마렝고(Chicken Marengo)입니다. 이 요리는 올리브 기름으로 튀긴 닭 위에 토마토, 마늘, 양파로 만든 소스와 요리된 가재 등을 고명으로 얹어 완성합니다. 나폴레옹의 요리사 중 한 명인 "프랑수와 클로드기네"가 마렝고 전투의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만들었다고 해요. 후세에 '플레(치킨) 마랭고(poule Marengo)"는 그가 사랑했던 요리 중 하나로 회자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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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옹은 소식가였습니다. "군대는 잘 먹어야 전진한다!"라는 말을 남긴 그였기에 의외로 느껴집니다. 그는 많이 마시지도 탐욕스러운 식도락가도 아니었어요. 코르시카섬 출신인 그는 단순하고 소박한 음식을 좋아했습니다. 그가 좋아했던 요리는 밤 가루로 만든 코르시카식 폴렌타나 고기 스튜인 '팟오푀' 같은 토속적인 음식들이었어요. 특히 그가 좋아했던 메뉴는 고기와 가재류를 마카로니로 감싼 요리인 '탕발 드 마카로니(timbale de macaronis)'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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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그는 전쟁과 국사로 너무 바쁜 나머지 식탁에 한가로이 앉아 즐길 시간적 여유가 없었어요. 그의 의붓자식 결혼식 때도 겨우 피로연에 30분 정도 머무르지 않았고 식사도 하지 못했다고 전해집니다.

그의 부인이었던 '조제핀' 역시 날씬한 몸매를 유지하기 위해서 늘 소식을 했다고 해요. 그러나 그녀는 아이러니하게도 달콤한 과자나 케이크 같은 디저트류는 무척 즐겼다고 하죠. 그녀가 좋아했던 디저트는 파인애플 케이크, '머랭', '일 플로탕트' 등이었어요. 그녀의 초상화 등을 보면 항상 입을 꼭 다물고 있는데 사탕수수를 너무 많이 먹어서 생긴 충치때문이라는 설이 있을 정도로 단 것을 사랑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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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가 된 나폴레옹은 이후에도 여전히 식탁에서 음식을 즐기는 일은 없었습니다. 음식을 급하게 먹기도 했지만 악식을 하는 편이었다고 해요. 특히, 전장에 있을 때는 말에서 내리지도 않고 안장 위에서 15분 만에 점심을 해결하는 일이 부지기수였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외교에서 미식이 차지하는 의미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에 중요한 외빈을 접대하는 중책을 그의 측근인 대서기장 "캉바세레스"와 "외무장관" 탈레랑에게 전적으로 일임했습니다. 이들은 제1제정기 내내 위대한 "앙피트리옹(amphitryon)"이 되었다.(*앙피트리옹 =만찬의 호스트)

만일 소식가라면 우리 집에 오시오.
그렇지만 잘, 그리고 많이 먹기를 원한다면 캉바세레스의 집으로 가시오.

나폴레옹이 제1 집정관 시절에 입버릇처럼 되풀이하던 말이라고 합니다. 나폴레옹과 캉바세레스의 유명한 일화가 있어요. 어느날 공문을 전달하는 전령이 푸아그라나 영계, 마인츠 햄 같은 요리까지 식탁에 배달한다는 소식을 들은 나폴레옹은 전령은 오직 공문서만을 전달해야 한다는 명을 내렸습니다. 그날 저녁 캉바세레스는 나폴레옹에게 면담을 요청했어요.

오늘 우체국장에게 내린 명을 부디 거두어주십시오.
인기있는 요리들을 배달할 수가 없다면 어떻게 친구를 만들 수가 있습니까?
통치는 대부분 식탁에서 이루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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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옹은 외교와 가스트로노미는 긴밀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다는 캉바세레스의 논리에 그만 설득당하고 말았죠. 캉바세레스와 탈레랑은 일주일에 두번씩 40-50명의 손님을 맞이했습니다. 특히 나폴레옹 민법전의 초안자이기도 했던 캉바세레스는 '시간준수'에 매우 엄격했다고 해요. 그의 정찬에 초대받은 자들은 결코 지각이 용납되지 않았습니다. 정확히 5:30에 문에 닫혔고, 6시에 식시가 시작되었습니다. 미식가에게 철저한 '시간엄수'는 가장 중요한 덕목이라는 것이 캉바세레스의 평소 지론이었죠.

그런 그이의 뜻을 받들어 그리모 드 라 레이니는
"진정한 미식가는 절대 지각하지 않는다"
라는 말을 남기기도 했습니다.


캉바세레스와 탈레랑는 가공할 만한 경쟁의식을 가진 라이벌 관계였습니다. 그들은 상대방의 요리사를 뺏앗기도 하고, 프랑스 전역에서 최상의 요리 재료들을 가로채기 위해 서로 다투었고, 걸핏하면 상대방의 식탁을 평가절하곤 했습니다. 흔히 미식분야에서 가장 많이 언급되는 브리야 사바랭과 그리모 드라 레이니에르 같은 문학가와 비평가들은 강력한 미식 후원자인 캉바세레스에게 더할 나위 없은 애정을 보였습니다. 반면에 탈레랑의 요리사인 카렘은 캉바세레스를 중상 비방했다고 해요.


캉바세레스와 추종자들은
그 당시 유명했던 레스토랑 "오 로셰 드 캉칼"에 모여서
레스토랑 주인들이 보낸 음식들을 시식하고 음미하는 행사를
정기적으로 가졌다고 합니다.
심사 위원단은 요리의 맛을 평가하고 최종적으로 인증서를 부여했는데
품평 받은 요리의 명성을 높여주었다고 해요.
마치 지금의 미슐랭 스타 같은 것이 아닐까 합니다.


그 중 낮은 평가를 받은 레스토랑 주인들은 앙심을 품고 이의를 제기하고도 했다고 하죠. 몇몇 심사위원이 사적인 이해관계 때문에 편파적인 판정을 했다는 비난을 받고 법정소송의 위협을 받게 되면서 1812년에 연감 발행의 종지부를 찍게 되었습니다.

제1제정이 몰락한 후에 캉바세레스가 누렸던 호사는 사라졌지만, 그는 여전히 대미식가로 역사 속에 남아 있습니다. 1824년 캉바세레스는 71세의 나이로 가족과 식사하다가 뇌졸중으로 사망했는데 대미식가에게 걸맞는 행복한 최후가 아니었나 합니다.


식탁의 쾌락은 모든 쾌락과 결합할 수 있고
모든 쾌락을 상실한 뒤에
우리를 위안하기 위해 남아 있는 마지막 쾌락이다.
(브리야 사바랭)


출처 : 미식 인문학


이범준 교수

미식연구소 소장

제주한라대학교 호텔외식경영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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