흘러가는 대로

24년, 전국일주를 정리하다 든 생각

by 조삿갓

길을 걸을 때 비로소 살아있다. 이 살아있음이란 하나의 감각이었다. 아무것도 신경 쓰지 않고 '나'와 마주했다.

그 정도로 사색하고 그 정도로 존재하고 그 정도로 경험하고 그 정도로 나다워지는 때는 혼자서 걸어서 여행할 때밖에 없었던 것 같다. 시골 풍경, 계속 이어지는 기분 좋은 전망, 신선한 공기, 왕성한 식욕, 걷는 덕에 좋아지는 건강, 선술집의 허물없는 분위기, 내 예속된 상태와 열악한 상황을 생각하게 하는 것들의 부재. 바로 이런 모든 것이 내 영혼을 속박에서 풀어주고, 사유에 더 많은 용기를 불어넣어 주고, 나를 존재들의 광활한 바다에 빠지게 해 준다. 그 덕분에 나는 그 존재들을 아무 불편함이나 두려움 없이 마음껏 결합하고 선택하고 이용할 수 있다 - 루소


길은 걷는 행위만 허용되는 단순한 장소가 아니다. 사색하고, 존재하고, 경험하며 ‘나’를 발견하는 곳이다. 눈에 보이는 것과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의 모든 존재를 느끼게 될 것이다. 그것들과 마주하고 대화하고 인정할 때 ‘나’를 조금씩 알아간다. 당신은 세상이 규정한 ‘나’의 거짓됨을 알게 될 것이고, 스스로 벗겨낼 것이다. 당신을 감싸던 것이 모두 벗겨진 발가벗은 존재가 바로 ‘나’다.


진정한 ‘나’로서 존재할 때 분명 살아있다는 감각이 깨어날 것이다.



흘러간 것에 이유를 찾고, 후회하면서 시간을 허비하고 싶지 않다. 앞으로 수많은 선택을 하고, 후회하기를 반복하겠지만 그 시간이 잘 지나가기를 기원하기로 했다. 그저 하려고 하는 것에 집중하고 해 나갈 뿐이다


'흘러가는 대로'라는 말이 어떻게 들릴지 모르겠다. 굉장히 무책임하고 진지하지 못한 말로 들릴 수도 있겠지 싶다. 그럼에도 흘러가는 대로 살고자 한다. 앞으로 무엇이 되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앞으로 무엇을 해야겠다고 하지 않을 것이다. 흘러가는 삶은 어디로 갈지 모르는 삶이다. 어디로 갈지 모른다면 나에겐 무한한 가능성이 생겨난다. 무엇이 될지 모르는 삶은 얼마나 재밌겠는가. 지금 내게 주어진 것에 집중하고, 최선이라 생각하는 노력으로 살아갈 것이다. 그럼 흘러간 순간들이 모여 나를 종착지로 데려다줄 것이다. 종착지에 다다랐다면 헛된 시간이 아니게 된다.

나는 자신이 어디로 가는지 모르는 사람, 그래서 자신의 목적지를 정확히 말해줄 수 없는 그런 사람이 더 좋다. 아직 그에게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 끝까지 그의 걸음을 안내하는 것은 ‘운명’이지, 결코 한 과제의 성취가 아니다.(피에르 쌍소, 느리게 산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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