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11 시흥->인천 27km

2,700km 전국일주 여행기

by 조삿갓

차들이 오가는 다리 위, 푸른 표지판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300m. 짧고 간결한 숫자는 단순히 남은 거리였고, 차들은 목적지를 향해 쌩쌩 달렸다. 그것을 보곤 괜히 청개구리가 되고 싶었다. 남들은 저 남은 거리를 향해 달려가지만, 나만큼은 늦춰서 여유를 즐겨보자고. 문득 고개를 들어 올려다본 하늘은 맑고 깨끗했다. 한 점 구름조차 가볍게 흘러가며, 마치 나에게 동조하듯 “조금 천천히 가도 괜찮다”라고 말하는 듯했다.


옆으로 시선을 돌리자 갯벌이 펼쳐졌다. 썰물로 드러난 바닷바닥은 마치 숨을 고르듯 고요히 드러누워 있었다. 얇게 고인 물웅덩이는 하늘을 담았다. 나는 갯벌을 뒤로하고 저 멀리 보이는 바다를 향해 계속 걸었다. 바다는 아직 멀리 있었지만, 이곳에서 이미 바다의 호흡은 시작되고 있었다. 도시의 분주한 시간과는 다른 시간이, 천천히 내 안으로 스며들었다.


여전히 도시를 벗어나지 못한 채 걸었다. 저 앞에 거대한 흰 활 모양의 구조물이 하늘을 가르고 있었다. 그 뒤로는 빼곡하게 들어선 아파트 숲이 줄지어 서 있었다. 비슷한 구조, 비슷한 색을 하고 있지만, 그 안에는 서로 다른 수천 개 삶이 숨 쉬고 있을 것이다. 아침마다 서둘러 문을 나서는 사람들, 창문 너머로 조용히 노을을 바라보는 이들. 나는 그 모든 장면을 상상하며 구조물을 지나갔다.


드디어 익숙한 이름이 새겨진 이정표를 발견했다. 자유공원 660m, 차이나타운 320m, 인천역 200m. 그리고 그보다 조금 더 먼 곳에 적힌 이름, 월미도. 그 단어를 본 순간, 마음이 설렘으로 일렁였다. 이름 속에 이미 바다 냄새가 담겼고, TV에서나 본 풍경이 파도처럼 쏟아졌다. 표지판은 방향만을 알려줬지만, 내겐 하나의 초대장이었다. 잠시 뒤, 웃음과 비명이 한데 섞인 소리가 들려왔다. 월미도의 놀이공원이 눈앞에 펼쳐졌다. 거대한 원형 기계가 천천히, 그러나 위협적으로 하늘로 솟구쳐 오르더니 이내 힘차게 회전했다. 그 순간 환호성과 비명 사이의 외침이 터져 나왔다. 그것은 두려움과 즐거움이 뒤섞인 소리였다. 다른 쪽으로 시선을 돌리니 바이킹이 보였다. 바이킹은 마치 파도처럼 높이 올랐다 깊이 내려앉았다. 그 아래에선 아이들이 솜사탕을 들고 부모의 손을 꼭 잡은 채, 눈부신 순간을 바라보고 있었다. 화려한 네온사인과 기계음, 그리고 아이들의 웃음 속에서, 나는 그 찰나가 가진 아름다움을 단번에 이해할 수 있었다.


놀이공원의 끝에는 파도가 일렁였다. 바다였다. 월미도는 단순한 목적지가 아니었다. 길 위에서 차곡차곡 쌓인 풍경들의 종착지였다. 하늘과 표지판, 이정표와 놀이공원, 갯벌과 바다. 이 모든 조각들이 하나로 이어져 여행의 문장이 완성됐다. 걸어온 모든 길과 마주한 풍경 하나하나가 모일 때 우린 그것을 ‘여정’이라 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