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 에세이 : 요한복음
20년도에 한창 뜨거운 인기리에 방영되었던 드라마이다.
모두가 입을 모아 재미있다고 추천할 때 나는 보지 않는다. 관심도 없는 것처럼.
그리고 사람들이 잊어갈 즈음 나 혼자 만끽하며 본다.
고구마를 막 쪄서 김이 모락모락 나고 뜨거울 때는 먹지 않고 기다렸다가 마지막 남은 온기가 빠져나가려던 찰나를 기다리는 건 아닐까.
나이가 들어서 그런 것인지 설레고 두근거리는 사랑 이야기는 와닿지가 않는다.
사람에 대한 환상, 사랑에 대한 기대가 없어졌다. 어릴 때는 사람이 어떤 존재인지 잘 몰랐었다.
그런데 어릴 때, 젊을 때 보이지 않았던 것들을 보게 되고 생각하게 된다. 나이를 헛먹지는 않은 것 같아 다행이라고 생각해야 하나. 이제 드라마, 소설, 영화를 봐도 씁쓸한 아메리카노 같은 현실을 반영하는 작품들이 내 마음을 위로해 준다. 현실을 외면하게 만드는 거짓말로 나를 초라하게 만들지 않으니까. 물론 현실에 없어도 달콤하고 따뜻한 이야기가 주는 기쁨과 위로도 있다. 하지만 그건 정말 잠깐뿐이다.
이 드라마를 보면서 등장인물들의 대사 한마디 한마디가 참 많은 생각을 하게 해 주었다.
이혼이라는 법적 절차를 밟고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삶을 살아가고 있는 선우와 태오.
그리고 보던 중 12회의 마지막 장면이 마음을 참 아려 오게 했다.
준영이의 옷을 챙기러 온 태오는 선우와 술 한 잔을 함께 하며 조금은 진실한 대화를 시도한다.
태오가 묻는다. "당신한테 결혼은 뭐였어? 사랑은 또 뭐였고."
선우는 "나한테 결혼은.. 착각이었지. 내 울타리. 내 안정적인 삶의 기반. 누구도 깰 수 없는 온전한 내 거라고 믿었으니까. 사랑은 그 착각의 시작이자 상처의 끝이었고."라고 말한다.
울타리. 안정적인 삶의 기반. 누구도 깰 수 없는 나의 행복. (창11:4)
너도 나도 우리 모두는 그런 행복을 좇아 살아간다.
어떤 이는 결혼을 통해, 어떤 이는 직업을 통해, 어떤 이는 부를 통해 얻으려 한다. 모양이 다 달라 보여도 사실 사람들이 원하는 것의 내막은 다르지 않다.
"그 결혼 후회한다고 말해 주면 너도 진심을 말해 줄래?"
태오가 "그 결혼 후회한다"라고 말한 것이 나는 이해가 되었다. 사랑이라고 생각하고 결혼하면 똑같아지고 시들해질 뿐인 것을. 잡을 수 있을 것 같은데 잡으려고 다가가면 사라져 버리는 연기와도 같은 것을.
시기와 질투, 미움, 이기심과 불안감. 온갖 형용할 수 없는 추잡하고 더러운 감정과 생각이 내면을 짓누르고 인생에 뒤엉켜 누구와 줄다리기를 하는지도 모른 채 온 힘을 다해 줄을 잡아당기는 인물들의 모습에서 나의 모습을 본다.
태오는 몰랐던 것이다. 선우도 몰랐다. 다경이도 몰랐다. 다경이와 태오의 결혼을 허락한 여회장도 몰랐다.
그게 사랑일 것이라고. 아마도 행복할 거라고. 아니 분명히 행복할 거라고 시도했던 위험한 모험은 그들에게 칼이 되어 돌아왔다.
우리는 인간의 어떠한 제도와 관계 속에서도 우리의 마음속에서 그토록 목놓아 부르짖는 추상적이지만 실존하는 사랑, 행복, 만족이라는 것을 찾을 수 없다. 잡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그 순간, 순식간에 사라지고 돌아오지 않는다. 모든 것은 다 그림자일 뿐이니까.
그림자는 실체가 있음을 반영하는 증거이다. 영원하고 무한한 사랑이 존재함을 반영하는 그림자.
그 가까이에 실체가 있다.
목이 마른 한 여인은 우물가를 찾아갔다. 아무도 없는 땡볕이 내리쬐는 한낮에 홀로.
그곳에서 물을 달라고 하는 한 분을 만났다. 여인의 부끄러운 과거와 현재를 아는 이 사람은
물을 달라고 하는 이가 누구인지 알았더라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라고 한다.
바다를 집어삼켜도 해소되지 않을 것 같은 인생의 목마름은 예기치 못한 만남을 통해 해갈된다.
(요4:1-42)
그분은 누구신가. 나에게 어떤 분이시며 어떠한 대접을 받으셔야 마땅할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