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의 영역
서울의 봄이 한창이던 1980년. 나는 태릉골 두더지 생도였다. 육사에는 학년별로 부르는 별칭이 있다. 1학년은 눈을 아직 제대로 뜨지 못해 방향감각이 어두운 두더지이고, 2학년은 이 두더지가 제 길을 찾도록 꼬집는 빈대, 3학년은 빈대를 잡는 DDT(이, 벼룩을 잡는 흰색 가루의 살충제 일종), 4학년은 괜히 심술을 부리는 놀부라고 불렸다. 엄하고 힘든 생도생활을 빗댄 이 얼마나 해학적이고 낭만적인 표현이던가.
붉은 장미가 필 때쯤 생도의 날 축제가 열렸다. 이때 두더지들은 빈대, DDT, 놀부들이 주선한 미팅에서 만난 여학생을 초청하여 화랑연병장 파란 잔디 위에서 사교춤을 췄다. 빈대 춤 선생에게 속성으로 배운 형편없는 춤실력은 크게 문제가 되지 않았다. 여학생들도 배워본 적이 없는 춤이었으니 말이다. 중대 대항 춘계체육대회는 꼭 이겨야 하는 전쟁터와 같았다. 권투대회에 나간 나는 4전 2승2패를 했다. 키와 몸무게에 상관없이 맞붙게 한 규정이 내게 불리하게 작용했다. 몸무게 100kg 키 180cm에 육박하는 럭비선수 생도가 커다란 주먹을 휘두르며 들어오는 광경이 눈에 선하다. 가을이 되면 생도 숙소인 화랑관 뒤뜰에 낙엽을 모아 태우며 기타 연주에 맞춰 합창을 하기도 했다. 겨울은 낭만과 치열한 경쟁이 공존했다. 첫눈이 오는 날이면 1학년 두더지들은 어김없이 팬티 바람으로 옥상으로 집합했다. 놀부들 심술보가 터진 것이다. 단련된 혈기왕성한 두더지 근육에 하얀 눈이 떨어져 물방울이 맺히고 사자를 닮고 싶어 하는 야심에 찬 사관들이 혀를 날름거리며 하늘에서 내려오는 첫눈을 받아먹는 광경이란… 그것도 팬티 바람으로… 지구상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진풍경이 벌어지는 것이다. 이때 놀부들은 3년 전 자신의 두더지 시절을 떠올리고 혀를 내민 두더지들은 흘끔흘끔 서로를 보며 웃음보가 터지기 일보직전에 다다른다. 이때 짓궂은 놀부 하나가 찬물을 끼얹는 비장의 카드를 꺼내든다. “자, 어버이 노래를 제창한다. 알겠나? “ ”낳으실 때, 시~작“ ”낳으실 때 괴로움을 다 잊으시고…. 진자리 마른자리…“ 이때쯤 되면 노래는 거의 들리지 않는다. 혹시 사나이들이 훌쩍거리는 소리를 들어본 적이 있는가. 그건 대놓고 우는 소리보다 더 듣는 이의 가슴을 후벼 판다. 재미 삼아 일을 키운 심술쟁이 놀부도 이 지경이 되면 거룩(?)하지만 몹쓸 첫눈 맞이를 마쳐야 할 때임을 직감한다. ”자, 호실로 가서 복장을 갖추고 중대홀로 집합. 전원 위치로!! 옷을 입고 뛰어간 그곳엔 ‘맛동산’, ‘보름달’, ‘초코파이’가 놓여 있었다. 얼굴에 웃음기 가득한 놀부들 앞에…
겨울이 되면 생도대는 스케이트 선수촌이 되었다. 중대홀은 지상훈련으로 쿵쾅거렸고 놀부 이하 생도들은 복도를 다닐 때 스케이트를 타는 자세로 지나다녔다. 물론 경례는 생략되었다. 경기가 열리는 태릉골프장 연못은 200m 트랙이 조금 넘었는데 어슴프레 밝아오는 여명의 새벽바람을 맞는 열혈남아들로 그득했다. 고약한 것은 3주의 짧은 겨울방학을 자르고 조기 복귀하여 태릉선수촌 스케이트장에 가서 연습을 하는 경우도 있었다는 것이다. 그건 어떤 놀부의 묵시적 지시를 받은 DDT들의 과욕에서 비롯된 드문 경우였다. 경기 날이 되면 얼음판은 생도들의 열기로 후끈거렸다. 응원을 보내는 함성소리에 쓰러진 선수생도를 향해 고함치는 소리. 경기 진행을 알리는 핸드 마이크 소리. 태릉골 겨울은 4년 내내 추위에 웅크릴 겨를이 없었다.
10월이 되면 ‘성동원두’라고 불린 동대문운동장에서 육해공사 체육대회가 열렸다. 럭비, 축구, 육상 3 종목을 겨루었는데 골이 들어갈 때 순간적으로 내 입과 또 다른 입에서 동시에 터져 나온 소리가 뭉쳐져 천둥소리가 되어 내 귀에 들려왔다. 그건 귀가 아니라 가슴을 두드리는 소리와 같았다. 그때 소리가 번개처럼 머리부터 발끝까지 통과하여 가슴을 먹먹하게 했던 기억을 잊을 수 없다. 그건 산술적 합 이상의 초월적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폭발적 합이었다. 시위현장, 정치유세현장, 운동 경기장에서 느낄 수 있는 에너지. 군중이 운집하여 발산하는 작은 힘들의 총합 이상의 힘. 그해 성동원두에 그 힘이 있었다.
성동원두에서 이겼든 졌든 경기를 다 마치고 마지막에 다 함께 부른 육사 교가는 두더지들을 점점 육사인으로 거듭나게 했다. 그러면서 빈대가 되어갔다.
두더지 시절 나는 이런 감정의 총합을 겪으면서 어느 날 경우에 따라 감정은 분리되어야 옳다는 생각을 했다.
그 시절 빈대가 두더지들을 자기 방으로 불러 소위 얼차려 교육을 많이 했다.
‘똑똑‘ “들어가도 좋습니까?”
“들어와”
“(구호 없이 경례) ㅇㅇㅇ두더지 생도 ㅇㅇㅇ빈대 생도에게 불려 왔습니다.”
“엎드려. 푸시업 30회 실시!! “
“실시”
“밀어섯!!” “어, 이거 봐라. 상급생도실에 불려 왔는데 넥타이도 삐뚤게 매고… 어, 버클 손질도 안 하고 구두도 안 닦았네.” “다시 푸시업 50회 실시”
“실시”
두더지였던 나는 그때 빈대가 무엇을 잘못하고 있는지 알아차렸다. 하지만 빈대의 지시에 흐트러지지 않는 두더지이기 위해 애썼다.
1년 후 두더지가 내 방에 불려 왔다.
“귀관은 왜 내 방에 불려 왔는지 아는가?”
“네. 구두손질이 불량하여 불려 왔습니다. “
“구두 손질은 잘하였군. 지적을 받았으니 푸시업 30회 실시”
“실시”
“일어섯” “한 가지 충고하겠네. 상급생도호실에 불려 올 때는 넥타이 상태도 보고, 버클 손질도 하고 와야 하네. 다음부터 그리 하게. 알겠나? “
“예. 알겠습니다. “ “ㅇㅇㅇ두더지 용무 마치고 돌아가겠습니다.”
나는 두더지 시절에 빈대는 지적받은 부분만 책임을 묻고 나머지 나중에 눈에 띄는 잘못은 시정할 기회를 주어야 하며 감정을 개입해서는 안된다는 생각을 했었다. 1년 후에야 실현된 것이다.
서울의 봄 때 나는 눈이 어두운 두더지였다. 세월이 지나며 눈을 뜨고 생각이 많아진 노병이 됐다. 서울의 봄 영화를 보는 내내 마음이 무거웠다. 많은 부분이 내 잘못인 듯 다가왔다. 두더지 때 본 빈대처럼 감정 분리가 힘들었다.
하지만 감정 분리가 필요하다고 느낀다. 군인이나 국민이나 마찬가지다. 그때의 군인과 지금의 군인을 구별하고 영화의 감정을 지금의 군대에게 감정이입하는 잘못을 저지르지 말아야 한다. 그래야 나 같은 사람도 스스로 감정을 분리하기가 수월해지지 않을까 한다.
앞이 어두운 두더지 시절 서울의 봄. 그 오래된 얘기가 지금인양 한참동안 내 감정을 흔들어 댔다. 다른 시대 나와 다른 군인들 얘긴데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