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년 전 어느 날, 함께 근무하던 후배 동료 연구원에게 다발성 경화증 증세와 함께 뇌세포와 시신경이 손상되는 증상이 나타났다.
그는 서울에 있는 가족들과 떨어져 대전에 살고 있었는데, 부인과의 관계가 원만치 않아 부인의 도움을 받지 못하는 상태였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뇌세포 30%, 시신경이 40% 정도 손상되어 출퇴근을 할 수 없는 처지가 되었고, 연구원의 많은 사람들은 그를 퇴직시켜야 한다며 그와 그의 부인을 비난했다.
그는 대학 3학년 때 국가장학생으로 선발되어 미국 동부의 유명한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연구원에 취업해 많은 논문을 생산하고 학생을 지도하던 잘생긴 친구였다. 하지만 동료들과의 원만하지 않은 대인관계로 그를 우호적으로 대하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나는 부서장들을 설득해 기숙사 내에 연구실을 마련하여 그가 연구를 계속할 수 있도록 도왔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그의 증세는 점점 나빠지고, 기숙사에서 숙식을 해결해야 하는 어려운 생활을 해야 했다. 나는 주말 오후에 그를 데리고 마트에 가서 일주일 분 장을 보고, 저녁식사를 함께했다. 그는 시력이 좋지 않아 불을 사용하는 음식을 만들어 먹을 수 없었고, 우유, 빵, 치즈, 주스와 같은 조리 없이 먹을 수 있는 재료들을 사 와야 했다. 이외에도 머리를 깎지 않아 산발한 그를 데리고 미용실에 데리고 가고, 손톱 발톱을 깎아주는 네일숍에 데리고 가고, 몇 개월에 한 번 병원에 가서 진료를 받고 약을 받아오는 일들을 도와주었다. 그는 나와 식사하면서 부인의 도움을 받지 못하는 상황에 대해 얘기했다.
어느 날 나는 그의 부인과 통화할 기회가 있었다. 나는 그 친구의 상황을 얘기하면서 부인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말을 했다. 하지만 그녀는 환자인 이 친구를 돌볼 수 없는 상황이며, 연구원에서 받은 스트레스로 인해 남편의 병이 발생한 일임으로 연구원에서 해결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나는 다른 부서장들의 반대와 공격을 받으며 이 친구를 기숙사에서 생활할 수 있도록 도움 준 사람으로서 너무 실망이 컸다. 부부가 서로 적대시하면서 살아왔고 서로 화해할 의지가 없었다. 어느 날에는 어느 부서장이 날 찾아와 만일 그 친구가 기숙사에서 죽게 된다면 그 책임을 누가 질 거냐 라면서 나를 질책한 일도 있었다.
어느 날 토요일 오전, 그로부터 다급한 전화가 왔다. 배가 아파 죽겠다는 것이었다. 나는 기숙사에 가서 그를 태워 동네 병원으로 갔다. 의사는 맹장염인 것 같다면 대형병원으로 가라는 것이었다. 대형병원 응급실에 다 달았을 때 그는 거의 탈진 상태였고 병명은 맹장염이어서 수술을 하게 되었다. 나는 그의 부인에게 전화해서 상황을 설명하고 수술을 위한 보호자가 되었다. 그날 저녁 늦게 그의 부인이 병원에 도착했다. 회복실에 누워 회복하던 그 친구는 부인을 보자 원망의 말들을 하며 소란을 일으켰다.
병원에서 며칠 회복 후 부인이 그를 데리고 서울로 올라갔다. 하지만 이틀 후 기숙사로 내려왔고 부인과 함께 있는 것이 지옥이라고 했다. 부인과의 화해가 어려운 상황을 보면서 여러 가지를 생각했다. 더 이상 이 친구에게 다가가면 안 되겠다. 그 친구의 부인에 대한 적개심, 부인의 남편에 대한 무관심.. 왜 부부로 남아 있을까?
한동안 그 친구를 찾지 않았다. 한 달쯤 지난 어느 날 그 친구가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해서 일과 중 기숙사 문을 두드렸더니, 기척이 없었다. 일과 중에 사람이 없는 적막한 기숙사에서 나는 불길한 생각이 들었다. 문을 열고 들어갔더니 방에 누워 허공만 바라보고 있었다. 온몸은 출혈되어 빨갛게 되어 있었다. 왜 그런가 물었더니 전날 혈액을 묽게 하는 약을 너무 많이 먹어 혈액이 피부 밖으로 출혈되었다는 것이었다. 눈이 보이지 않아 약을 구별하지 못한 결과였다. 나는 즉시 그의 주치의에게 전화했다. 주치의는 약을 끊고 병원으로 보내라고 했다.
나는 택시를 불러 그 친구를 서울의 대학병원으로 보내고 그의 부인에게 그 사실을 알렸다. 나는 그에게 병가를 내어 치료한 후 돌아오라고 신신당부했지만, 그는 이틀을 넘기지 못하고 부인과 헤어져 기숙사로 돌아왔다.
나는 평소 아내에게 이 친구에 대해 얘기했다. 외롭게 투병하며 생존의 큰 짐을 지고 살아가는 그에게 나만이라도 도움을 주어야 한다는 데 일치했다. 가끔 그를 집으로 초대해 고기를 굽고 와인과 함께 살아가는 얘기를 했다. 이렇게 10여 년이 흘렀다.
시간이 흘러 나는 보직을 내려놓고 직장에서 영향력을 잃어가게 되었다. 내가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나? 병원에 보내 치료하고 요양해야 할 사람을 내가 어떻게 감당하나? 환자를 기숙사에 두는 것이 잘하는 일인가? 부인은 뭐 하는 사람인가? 우리의 삶에 대해 생각하는 시간들이었다.
어느 날 아는 신부님을 만날 기회가 있었다. 식사를 함께 하면서 고민을 말씀드렸다. 오래도록 도움을 주고 있지만 회의를 갖게 되고, 직장 내에서 호응은커녕 그를 돕는 것에 공격을 받고 있다고 말씀드렸다. 신부님께서는 개인적 도움도 좋지만, 직장 내 시스템을 통해 도움을 주는 것이 좋겠다고 말씀하셨다.
나는 직장 내 관련 부서장과 팀장과의 회의를 통해, 그가 처한 상황을 설명하고 도움을 줄 수 있도록 설득했다. 행정부에서 기숙사의 위생 상태를 매주 체크하고, 그의 몸 상태에 대해서도 수시로 관찰할 수 있도록 했다. 나는 안도했다. 하느님께서 신부님을 통해 나와 그 친구가 큰 도움을 받는다는 사실이 너무 기뻤다.
지난해 그 친구가 조기퇴직 했다. 나는 그가 가족들에게 돌아가서 평안한 삶을 위해 기도했다. 그 친구가 퇴직한 후, 직장 후배들이 그동안 고생했다며 내게 격려의 말을 전해왔다. 함께 돕지 못해 미안하다고도 했다.
나 자신을 돌아보았다. 내가 어떻게 많은 시간 동안 그 친구를 도울 수 있었을까? 장애인을 데리고 많은 시간을 들여 마트와 식당과 미용실과 병원과 약국에 동행할 수 있었을까? 어려운 사람에 대한 사랑인가? 나의 성격적 결함을 잘 알고 있는 가족과 주위 분들은 이해할 수 있을까? 생존의 무거운 짐을 지고 가는 그 와 함께한 시간들이 새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