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ystem Sunny '써니']

by 소피아

* 본 글은 Apple TV + 드라마 <써니>의 스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본 글과는 크게 관련이 없을 것 같지만 그래도 간단한 줄거리부터 언급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 싶다.

수지는 남편 마사와 아들 젠을 비행기 사고로 동시에 잃은 여자다. 그들이 죽은 후 수지에게는 '써니'라는 이름의 홈(로)봇이 생긴다. 써니를 데려온 사람은 그를 마사가 만들었다 말한다. 하지만 수지는 마사가 냉장고를 만드는 사람인 줄만 알았고, 그가 진짜로 하던 일에 대해 조사하던 중 야쿠자가 마사와 비행기 사고에 얽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거짓말쟁이 마사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준비물이 몇 가지 필요하다. 첫째, 누군가에게 거부 당한 경험이 있는가. 둘째, 그 경험으로 인해 그 사람의 사랑을 강렬하게 원하게 되었는가. 셋째, 끝끝내 사랑을 얻지 못하고 마음의 문을 닫은 적이 있는가.

꽤 거창해 보이지만 사실 이 네 가지는 하나로 요약할 수 있다.


당신은 외로워 본 적이 있는가.



현대인의 고질병이다. 우리는 모두 누군가를 사랑하고 싶어하고, 누군가에게 사랑받고 싶어하며 혼자 있고 싶다가도 누군가 다가와 주었으면,하고 바라게 된다. 그래도 역시 혼자 있는 게 좋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라도 한 번 사랑을 경험한 이상 전으로는 돌아갈 수 없다. 사랑을 알기 시작한 때부터 우리는 외로움을 알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사랑'은 이성간의 사랑, 동성간의 사랑, 가족애, 동물을 사랑하거나 식물을 사랑하는 것, 나 자신을 사랑하는 것 등 다양한 의미를 내포한다. 그렇다면 마사는 아버지가 자신을 혐오한다는 것을 알기 이전 사랑을 경험한 적이 있나. 정답은 yes다. 마사는 어머니가 자신을 사랑한다는 걸 믿었다. 어머니라면. 아버지와는 달리 나를 착한 아이라고 말해 주는 어머니라면. 내가 잡은 딱정벌레에게 줄 사과를 깎아 주시는 어머니라면 나를 사랑하시겠지.

그러나 마사는 배신 당한다. 아버지가 돌아가실 때까지도 아버지와 화해할 기회조차 주지 않는 어머니에게. 마사는 이유도 모른 채 자신이 가장 사랑한 두 인간에게 상처받은 것이다.


이후 마사는 무려 2년이 넘는 기간 동안 방에만 처박혀 히키코모리 (ひきこもり : 은둔형 외톨이)로 지낸다. 방문을 닫고 들어간 그때, 마사의 마음의 문 또한 굳게 닫혔다. 엔지니어 재택근무를 하는 시간을 제외하곤 온종일 게임에 몰두하던 마사는 자신을 그의 친아버지라고 밝힌 히로마사에 의해 거처를 다른 곳으로 옮기게 된다. 마사는 이때 한 번 바깥으로 나오게 되는데 이 외출은 사실상 큰 의미가 없다. 마사 자신의 의지가 아니기 때문에. 인간이 마음을 여는 것은 자신이 아닌 다른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한 일이지만 남이 함부로 내 방문을 따고 들어올 수는 없다. 그건 오히려 역효과만 가져올 뿐이다. 중요한 건 그 사람이 직접 "나가고 싶어."라고 말하는 것이다. 누군가를 상대하는 일은 섬세해야 한다. 그래서 귀찮다. 하물며 내가 나 자신을 돌보는 일도 피곤한데 타인을 챙기는 것이 힘든 건 당연하지 않은가. 거기다 마사는 곧바로 다시 틀어박혔다. 마음의 방 1에서 2로 옮겨간 것뿐인 거다. 결국 마사는 달라지지 않았다.


마사는 새로운 환경에서 새로운 존재를 맞닥뜨리게 된다. 쓰레기를 치우도록 설계된 로봇 '쇼'. 그는 마사의 곁에서 쓰레기가 아닌 것까지 주워다 버리며 끊임없이 그의 신경을 거스르게 만든다. 참다 못한 마사는 쇼를 자신의 방식대로 재설계하기 시작한다. 과정에서 마사는 자신을 필요로 하는 존재를 인식하게 되고, 그 존재와 쌓아올리는 '유대'의 감각을 깨우친다. 생각해 보면 마사는 그동안 곁에 있는 존재에게 자신의 쓸모를 증명할 일이 전혀 없었다. 따뜻한 관심이 필요할 나이에 무관심으로 길러졌고, 아무도 자신을 필요로 해 주지 않았다. 인간은 누군가 자신을 찾아주지 않으면 존재할 수가 없다. 무신경한 태도는 화분의 꽃만 말려 죽이는 것이 아니다. 꽃의 뿌리가 썩듯 인간은 마음부터 썩어 들어간다. 세상 살아 있는 것들은 다 똑같다. 지속적인 애정과 관심이 절실하다.


쇼를 더 나은 로봇으로 개조한 마사는 그에게 말한다. "외출하자"고. 자신의 입으로, 직접 코트를 챙겨 입으며. 드디어 자신의 의지로 바깥에 나가고 싶어진 것이다.


평범한 사람들에게는 큰 의미 없는 '외출'이 아주 커다란 전진이 되는 이들이 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나 또한. 아무도 나를 이해해 주지 않는다면 차라리 그중에서도 나를 가장 이해할 수 있는 나 자신 하나만 데리고 살자. 그렇게 생각했다. 햇빛을 보지 않아 얼굴이 하얘질 때까지 방안에서 나가지 않았다. 그렇게 살다 죽을 작정이었고, 가능하다면 빨리 사라지고 싶은 생각밖에 없었다. 그러다 하루는 친구와 메시지를 주고받다 '만약 태어나는 걸 스스로 결정할 수 있다면'이라는 주제가 나왔다. 나는 당연히 그럴 수만 있다면 태어나지 않았을 거라고 답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친구도 나와 같은 대답을 할 줄 알았다. 사는 게 그다지 즐겁지 않은 것 같다는 이야기를 자주 했었으니까. 하지만 친구는 "그러면 난 어떡해?" 그랬다. 그 문장을 읽는 순간 아차 싶었다. 난 대체 어떤 오만한 생각을 하고 있었던 건지. 나는 오만하게도 친구가 나와 같은 마음일 거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내 삶은 가치가 없을 거라고 생각했고, 그래서 남도 내 인생을 가치 없는 것이라 여길 거라고 생각했고, 나도 모르게 어느새 남의 삶도 내 인생 만큼이나 지루할 거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눈물이 났다. 나를 좋아해 주는 사람이 아직도 있구나. 내가 세상에 존재했으면, 하고 바라는 사람이 있구나. 아주 오랜만에 죽음을 회피하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지옥을 함께 견뎌 줄 사람이 곁에 있다면 천국은 못 되어도 내가 더 아래로 떨어지는 일은 없겠다, 싶었다.


마사도 같은 기분이 아니었을까.


마사는 히키코모리 시절을 영원히 잊지 않는다. 아니, 잊지 못하는 것이다. 살아 있는 존재라면 잊어지지 않는 기억은 있기 마련이니까. 마사에게 그 시절은 좌절이 아니라 자신이 가야 할 일을 알려 주는 이정표 같은 것이 되었다.


외로움을 아는 로봇을 만들자!

외로운 사람이 없는 세상을 만들자!


인간은 강요에 의해 변하지 않는다. 그 사람의 진심을 알아 줄 때 비로소 변할 수가 있다. 가장 듣고 싶어하는 말이 무엇인지, 가장 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가장 먹고 싶은 음식이 무엇인지, 가장 좋아하는 스포츠는 무엇인지. 깊은 공감이 없다면 인간은 결국 언제나 제자리를 배회할 뿐이다.


마사는 누구보다 그걸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말한다 "외로워질수록 도움을 청하기 어려워진다"고. 고립이란 것은 사전적 의미보다 몇 배는 더 어두운 곳으로 처박히는 것이다. 아무리 밝은 곳이라 해도 깜깜하고 깊숙한 곳은 잘 보이지 않는다. 막막한 마른 우물 속과 비슷한 감각이다. 밖에서도 안이 잘 보이지 않고, 안에서도 밖이 잘 보이지 않는다. 사람들의 발길이 닿지도 않는다. 도와달라고 말해 봤자 아무도 듣지 못한다.


그렇다면 고독한 인간은 언제까지고 고독해야 할까. 그렇지 않다. 마사는 자신이 그랬던 것처럼 로봇으로 외로움을 호소하는 이들을 구하고자 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로봇은 그저 고철이다. 냉소적인 그들 자체로는 구원의 손길을 뻗칠 수가 없다. 마사도 그걸 알았을 것이다. 그가 쇼를 인간에게 소중한 가치를 이해할 수 있는 로봇으로 개조한 것을 보면.

그렇게 생각한다면 마사가 끊임없이 연구한 것은 로봇이 아니라 인간일지도 모른다. 좀 더 인간다운 로봇, 인간에 가까운 로봇. 인간의 등을 토닥여 줄 수 있도록. 그들의 마음 속까지 파고들 수 있도록. 그들이 정말 간절히 그리워하는 것을 줄 수 있도록.

하지만 인간이 되기 위해서는 사랑이나 기쁨, 행복 따위의 감정만 가져서는 안 된다. 슬픔, 분노, 배신감 같은 부정적인 감정을 배제하고는 진정한 인간이 될 수 없으니까.


실제로 마사의 로봇들은 저들끼리 사랑을 하기도 하고, 자신의 파트너인 인간과 우정을 쌓으며 그들을 소중히 하는 법을 알고 있다. 그리고 사실상 그건 파멸이기도 했다. 인간이 아닌 것을 인간으로 만들어 인간이 할 수 없는 것을 시킨다 ···. 결국 완벽하게 조종할 수 없는 꼭두각시를 다루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심지어 로봇은 언제 어디에서 바이러스가 침투할지 모르는 존재. 마사의 '돕고 싶다'는 간절하고도 열정적인 갈증은 그 현실을 완전히 간과하고 있었다.


흔히 자연의 섭리를 거스르면 그에 응당한 업보를 받는다. 마사가 만든 로봇들은 지나치게 인간을 닮은 탓에 살인까지 저지르고 만다. 자신이 만든 로봇이 자신이 돕고 싶어했던 사람을 죽였을 때, 마사의 심정을 이해해 보라고 한다면 아무래도 어렵다. 내가 소중히 여기던 일을 나 자신이 전부 망쳐버렸다는 자책과 죄책감 ··· 말로 표현할 수 있는 것이 이 정도, 하지만 틀림없이 그 이상이었을 것이다.


내가 정말 흥미로웠던 건 이 사건 이후 마사의 행보다. 살인을 저지른 로봇을 부숴 버린 마사는 또다시 로봇의 위로에 따뜻함을 느낀다. '나였다면?'이라는 상상을 몇 번씩이나 해 보았다. 과연 나였다면 어떻게 했을까. 난 절망이 특기인 사람이라 일을 그만뒀을지도 모른다. 다시 히키코모리가 되었을지도. 그러나 마사는 절대 포기하지 않는다. 자신과 같은 사람들에게 정말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아는 이상 멈출 수 없다고 생각했을까. 그보다는 한 번 느낀 따스함을 잊을 수가 없어서일까. 친구 '쇼'를 비롯해 가정이 생긴 마사는 사랑받는 법도, 사랑 주는 법도 모두 알게 되어 마음의 문을 닫아버린 이들에게 더욱 손을 내밀어 주고 싶었을 수도 있다.


마사는 자신을 위로해 준 로봇 32호 (三二 = さんに = サニ = 써니)를 아내 '수지'를 위한 선물로 재프로그래밍한다. 수지 또한 마사를 만나기 전까지는 외로운 사람에 속하는 사람이었다. 그와 결혼 후에도 쭉 친구는 마사뿐이었고. 마사 눈에는 '외로움'이라는 무형의 두려움이 보이는 것 아닐까. 외롭다는 생각은 방 밖으로 한발짝도 나오지 않는 사람들만 하는 것이 아니다. 처음에 말했듯 외로움은 현대인의 고질병. 돈이 많든, 친구가 많든, 일이 많든 어느 하나 부족해 보이지 않는 사람 또한 걸릴 수 있는 감기 같은 것이다. 인간은 다양한 감정을 아는 만큼 그것을 다스리는 법도 알아야 하지만 그게 전부 가능하다면 그건 역설적이게도 이미 인간의 영역은 아니다. 그러니 이 세상에 마사가 많아져야만 한다. 누군가를 돕는 건 함부로 동정하라는 것과는 다르다. 타인의 모든 것을 안다고 단정하고 행동하는 건 도움이 아니라 오만이다. 다만, 내가 가진 아픔과 상대의 아픔의 공통분모를 나눈다면 그건 도움이 될 수가 있다.


'극복'이란 것은 기본적으로 고통을 감내해야 하는 과정이다. 마사가 수지에게 준 시련만 해도 그렇다. 야쿠자와 살인 로봇이라는 무자비한 설정이었지만 결론은 그거다. 마사는 수지에게 자신과 아들 이외의 친구들을 만들어 주었다는 것. 비록 자신이 미움을 받더라도 마사는 수지가 행복하길 바랐다. 그는 말한다. 전부 수지 당신을 위한 일이었다고. 미움 받을 용기가 없다면 누군가를 구할 수 없다. 아들이 영영 방 안에서 나오지 않을까 봐, 아들이 평생 자신을 미워할까 봐 적극적으로 나서지 못했던 마사의 어머니 노리코를 보면 알 수 있듯.


마사는 로봇으로 구원받은 자신의 경험을 나누다 극한의 고통을 겪었지만 그럼에도 포기하지 않았다. 타인이지만 자신이기도 한 이들을 구하기 위해서 그는 무던히도 애를 썼다. 비록 한 번 실패했지만 결국은 성공했다. 써니는 영원히 닫혀 있을 것만 같던 수지의 문을 녹였다. (이 대목에서 해와 바람의 내기 이야기가 떠오르기도 한다)


인간은 사회에서 동떨어져서는 살 수 없다. 자존심 상하지만 이게 현실이다. 우리는 서로 도우며 살아가게끔 프로그래밍 되어 있다. 애초 그렇게 태어났다. 세상에는 나와 닮은 사람들이 아주 많다. 마치 마사가 만든 로봇 여섯 쌍둥이처럼. 우리가 서로의 마사가, 서로의 써니가 되어 주면 어떨까. 상대의 외로움을 모른 척하지 않고, 그 사람이 다시 세상 밖으로 나올 수 있도록 묵묵히 인내하며 돌본다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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