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의 양면성
젊은 날의 제게 새벽녘 안개라는 의미는 갈 길을 막아서는 ‘불안’이자 ‘답답함’이었습니다. 하지만 머리칼에 서리가 내려앉은 지금, 저는 이 안개를 보며 오히려 평온함을 느낍니다. 앞이 보이지 않기에 비로소 내 발밑의 흙냄새와 찻잔의 온기에 오롯이 집중할 수 있게 되었으니까요. 이것이 제가 세월을 지나오며 배운 인생의 양면성입니다.
비워짐이 가르쳐준 뜻밖의 충만함
나이가 든다는 것은, 평생 손에 꼭 쥐고 있던 것들을 하나둘 놓아주는 과정인 것 같습니다. 꼿꼿했던 기운이 예전 같지 않고, 소중했던 기억들도 가끔은 안개 너머로 흐릿해지곤 하지요. 드라마로 치자면 화려한 주연의 조명이 서서히 꺼지는 무대 뒤의 시간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참 묘한 일이지요. 손을 비우니 비로소 그 사이로 시원한 바람이 통하기 시작했습니다. 무언가를 잃어간다는 건, 단순히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내면의 공간을 넓혀가는 과정이었습니다. 꽉 채워졌을 때는 보이지 않던 여백이 생기자, 그제야 타인의 아픔이 들어오고 자연의 변화가 눈에 밟히기 시작했습니다. 상실은 결핍이 아니라, 새로운 형태의 채워짐이었습니다.
슬픔의 뒷면에서 발견한 찬란함
인생이라는 드라마 속에서 가장 지우고 싶었던 아픈 장면들을 가만히 돌이켜봅니다. 그 순간에는 그것이 견딜 수 없는 비극인 줄로만 알았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른 뒤 다시 꺼내 본 그 장면의 뒷면에는 예상치 못한 ‘성숙’과 ‘깊이’가 숨어 있었습니다.
슬픔이 깊었기에 아주 작은 기쁨에도 감사하며 웃을 수 있게 되었고, 사무치는 외로움을 겪어보았기에 산장을 찾는 이들의 고독을 조용히 안아줄 수 있는 눈이 생겼습니다. 빛이 강할수록 그림자가 짙어지듯, 제 삶의 어두웠던 그림자들은 사실 저라는 존재를 더욱 선명하게 만들어주고 있었던 셈입니다.
우리들의 드라마는 여전히 방영 중입니다
시니어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인생은 저물어가는 해가 아니라, 내일을 정성껏 준비하는 노을과 같습니다. 노을은 낮의 치열했던 열기를 식혀주고, 우리에게 깊은 안식의 밤을 약속해 줍니다. 한 편의 드라마가 절정을 지나 결말을 향해 갈수록 더 깊은 여운을 남기듯, 우리 인생의 후반전 또한 그 어떤 순간보다 밀도 높은 향기를 품고 있습니다.
오늘도 저는 창가에 앉아 김이 모락모락 나는 차 한 잔을 앞에 두고 저만의 드라마를 써 내려갑니다. 비극과 희극, 상실과 소유가 교차하는 이 무대 위에서 저는 더 이상 완벽한 결말만을 고집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그저 이 양면의 조화가 만들어내는 절묘한 균형을 온 마음으로 즐길 뿐입니다.
여러분의 드라마는 지금 어떤 장면을 지나고 계시는가요? 혹시 지금 어두운 터널을 지나고 있다면, 그 뒷면에 곧 나타날 찬란한 빛을 잊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매주 수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