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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성 Apr 27. 2024

영화 <여행자의 필요> 리뷰

멀어야 볼 수 있는 것들



  영화 <여행자의 필요>는 낯선 장소에서 그들의 삶을 조명하는 이방인의 시선으로 사람들의 일상에 차분히 흘러든다. 초록색과 자연을 좋아하고 막걸리를 좋아하는 이리스(이자벨 위페르)는 서울에서 소수 인원을 대상으로 프랑스어를 가르친다. 언제 왔고 어떻게 왔으며 왜 왔는지도 모를 이 이방인은 프랑스인이라는 것을 제외하면 아무것도 알려진 것이 없다. 심지어 이리스의 프랑스어 교수법조차 정공법이 아니고, 함께 사는 인국(하성국)도 이리스의 지난 행적을 모른다. 그럼에도 그들은 이리스를 받아들인다. 원주(이혜영)의 말처럼 다들 무언가에 홀린 걸까? 아니면, 과거를 밝히지 않고 떠돌아다니는 이 독특한 사람의 태도에 우리가 찾고 있는 무언가가 담겨있고 그것이 우리를 자석처럼 이끌리게 만드는 걸까.


  영화는 마치 소크라테스의 대화법처럼 전개된다. 전반의 구성이 질문과 대답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이는 이리스의 교수법과도 동일하다. 이리스가 프랑스어를 가르치기 위해 하는 것은 학생의 일상에 개입하고, 대화를 통해 내밀한 감정을 끄집어내는 것이다. 하지만 이리스의 개입이 폭력적이거나 무례하지는 않다. 그건 아주 부드럽고 가벼우며 타인의 인생이라는 살갗에 닿는 순간적인 접촉이다. 이리스는 언제나 질문한다. “뭘 느꼈죠?”, “정말 깊은 곳에서는 뭘 느꼈어요?” 이리스의 관심은 행위가 아닌 내면에 있으며 무심한 듯 사려 깊은 목소리는 껍질 깊숙이 숨겨놓은 근원에 닿는다. 


  그런 점에서 스토리의 앞뒤로 대사가 반복되며 전체가 하나의 데칼코마니를 이루는 형식 또한 흥미롭다. 이리스는 그들에게 동일한 질문을 하고, 또 동일한 대답을 얻는다. 영화의 배경이 된 도시를 알고, 나라를 아는 사람들에게는 그들의 통일적 대답이 친숙하게 느껴질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How are you?’에 ‘I’m fine Thank you, and you?’부터 떠올리는 민족이기 때문이다. 학생들의 정형화된 대답은 “매 순간 인생에 진지하고”, 외국어를 배우고 싶다면 그들을 가슴으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여기는 이리스와 더욱 대비적으로 보인다. 영화 속 대립은 표면적으로 이방인 이리스와 현지 사람들을 메인으로 다루지만 그 속에는 가족의 대립, 짐승과 인간의 대립도 있다. 하지만 이 영화가 대립에 대한 영화는 아니다. 더 자세히 말하자면 각자, 개인, 사물 자체들에 대한 소상한 상찰이다. 종과 그룹을 넘어 우리는 개인으로서 땅 위에 있으며, 그 누구도 “그 사람을 정확히 안다”라고 할 수 없고, “나 자신을 안다”라고 할 수도 없다. 우리가 “항상 자신 아닌 다른 사람이 되기 위해서 피곤한” 삶을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이방인의 눈은 영화에서 거울의 역할을 하며, 동시에 고발의 역할을 맡는다. 관객은 이리스의 시선을 통해 자신을 포함한 모두가 ‘진짜’ 나를 깊숙이 숨기고서 내가 아닌 채로 살아가는 모습을 필연적으로 마주한다. 나는 너를 진짜, “진짜” 사랑한다고 소리쳤지만, 너를 전부 안다고는 할 수 없었던 인국 엄마의 절망적인 목소리처럼 한 사람을 전부 안다는 것은 우주를 안다는 것만큼 어렵다.


  <여행자의 필요>에서 시는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내용의 표상으로서 자리한다. 시에는 단어와 운율로 현실을 윤색하는 특징이 있다. 그리고 이 영화에서는 모든 인간이 시적 행위를 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창작의 영역에 대한 것이 아니다. 다른 사람이 보기 좋도록, 혹은 듣기 좋도록 꾸미다. 그것이 중요한 것이다. 이리스가 관심을 가졌던 유명한 시인들은 전부 안타깝게 요절했다. 이리스는 그걸 통해 한 가지 통찰을 얻는다. 우리가 시를 남길 수 없고, 비석에 새겨지지도 않을 것이기 때문에 불행하다는 것이다. “우린 아름답지 않고 서로 불쌍하다고 느끼며 살 뿐이다.” 요절한 시인들은 비석에 남겨진 그들의 시, 즉 꾸며진 모습으로 기억될 테지만 우리는 그럴 수 없다. 표면적 나와 내부의 내가 가지는 간극을 다른 사람들이 눈치채지 않기를 영영 바랄 것이고, 또 가끔 그것은 흘러나올 것이다. 우리는 그렇게 애처로운 존재들이 된다.


  이리스는 앞으로 어떻게 될까? 그들의 일상에서 이리스가 가식적이고 표면적인 것들을 걷어낼 수 있었던 것은 결국 “여행자”의 눈으로 그들을 바라보았기 때문이다. 짐작하자면, 이리스 또한 프랑스에서는 그 속에 섞여 같은 줄기로 살아갔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 사람이 지금까지 살아온 삶”을 알거나 짐작할 수 있는 사람들이 있는 곳에서는 이리스 또한 자유롭지 못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우리가 서로를 불쌍하다고 여기는 이유 아니겠는가? 마지막 장면에서 인국은 이리스에게 집으로 돌아가자고 말한다. 그리고 이리스는 그곳이 나의 집인지 묻는다. 우리는 “뭐든 너무 열심히 하고, 인생을 성찰하며 진지하게 사는” 이리스를 응원할 테지만, 이리스가 여행자로 남기 위해 결국 다른 곳으로 떠날지, 아니면 외출 끝에 여행자의 특권을 벗어버릴지에 대한 것은 영화 이후 우리네 삶에 남겨져 있다. 물론 필자는 친구로서 사랑하는지 묻는 이리스의 눈에서 그 답을 찾아냈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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