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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성 Jun 09. 2024

영화 <존 오브 인터레스트> 리뷰

유령과 양면성 그리고 반딧불이들

      

   우리는 많은 매체, 특히 영상 매체를 통해 아우슈비츠와 피해자들의 참극에 대해 보고 들었다. 우리는 너무 많은 홀로코스트 영화들을 봤다. 내부의 사정을 아예 모르는 독일 시민의 시점에서도 본 적이 있고, 장교의 시점, 죄수의 시점을 넘나들거나, 그들이 암시된 동시대의 유럽상도 이미 익숙하다. 아우슈비츠, 나치와 히틀러, 제2차 세계대전 등 그동안 영화에서 나치의 만행을 보여준 사례는 다채롭다. 그들은 언제나 ‘전쟁의 끔찍함’이나 ‘인간이 이렇게 잔인해질 수 있다니’의 대표격으로 소개되었다. 즉 오늘날 관객들은 ‘선례’를 통해서 영상에 이 “소재”가 사용될 때, 기대하고 예상하는 바가 분명히 있다는 것이다. 



   영화 <존 오브 인터레스트>는 관객의 선례 기억에 의지한다. 영화는 동일 주제의 다른 영화와 달리 암시성으로 이루어져 있다. 우리에게 익숙한 잿빛 하늘과 불심 검문, 감시와 같은 공포적 요소는 제거되며, 그 자리를 푸른 하늘과 강, 가족들의 웃음소리가 채운다. 영화는 아우슈비츠 제3수용소 외곽에 위치한 가정집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그들의 일상은 오늘날 우리의 일상과 별반 다를 것이 없다. 아버지가 출근한 뒤에 아이들이 등교를 하고, 어머니와 일꾼들은 집안일에 집중한다. 아내 헤트비히(산드라 휠러)의 놀라운 감각으로 집의 정원은 각종 꽃과 허브, 가꿔진 잔디로 조경되어있으며, 그들의 집은 누구나 꿈꿀 만한 ‘이상향’적인 집이다. 단 하나, 경계선 너머에서 새어 나오는 소리들이 일상 모든 순간에 배경으로 자리한다는 것만 제외한다면. 

   반복적인 총성과 알 수 없는 기계음은 매 장면의 기저에 웅크리고서, 관객이 이를 잊을 때쯤 더 큰 소리로 발산된다. 가족들의 생활 소음이 그 정체불명의 배경음을 덮으면, 어린 딸의 날카로운 울음소리가 또다시 평화를 방해한다. 그것들은 분명 낙원의 ‘방해 요소’로 그곳에 존재한다. 아기의 울음소리와 반려견의 짖고 낑낑거리는 소리는 관객에게 ‘무언가 잘못되고 있음’을 암시하며 불안감을 조성하지만, 정작 등장인물들은 그것에 익숙한 듯 외면함으로써 평화는 유지된다. 바로 이런 현상으로 인해 역설이 성립되며, 관객은 그들의 공간이 비명과 울음을 짓밟고 서 있음을 깨닫게 된다.

   영화 속 중심인물인 루돌프 회스(크리스티안 프리델)는 가정적인 모습으로 보여지는데, 그가 아우슈비츠의 지휘관인 것을 아는 관객은 스크린 속 평화로운 장면에도 꺼림칙한 기분을 떨칠 수 없게 된다. 그는 표면적으로나 내면적으로나 경계선에 위치하고 있는 인물이다. 카메라는 그의 ‘일하는’ 모습을 절대 제대로 비추지 않는다. 그의 일은 대화로 구성되거나, 소리로 암시될 뿐이다. 그의 행동이 정확히 드러날 때는 오직 가족들과 함께 있으며 ‘가정적’이고 ‘헌신적’인 모습으로 제시될 때뿐이다. 그가 노골적으로 양면성을 가진 인물인 만큼, 작중 회스가 스크린의 중앙이나 선, 경계 사이에 서 있는 장면이 많다. 일례로 그가 강에서 낚시하는 장면은 회스의 양면적 모습과 함께 이후 영화 분위기가 전환됨을 암시한다. 조금 먼 거리에서 아이들이 웃으며 장난을 치고 있고, 모든 것은 평화로워 보이지만 깨끗한 강물로 불순물이(암시와 선례로 관객은 재의 정체를 안다.) 흘러들면서 영화 속 분위기는 변한다. 즉, 중심부에 서 있던 그의 삶에(혹은 악행에) 피해자들이 발생하고, 더 이상 ‘경계’로서의 의미가 희미해진다. 특히 이 장면 이후부터 그들이 노골적으로 ‘가스실’을 언급하고 화를 내거나 가족을 배신하는 행위의 장면이 삽입되는 것을 고려했을 때 이는 더욱 명확하다.

   흥미로운 것은 강가의 낚시 장면 속 건너편은 잡초로 무성하고, 이쪽은 잘 가꾸어져 깨끗하다는 지점이다. 여기서 관객의 위치를 고려하자. 관객은 잘 정돈된 ‘이쪽’에 놓여있다. 카메라는 관객을 ‘이쪽’에 배치함으로써, 관객이 회스와 그의 가족들의 위치에 놓여있음을 암시한다. 

   이러한 배치는 영화 마지막에 조금 다른 형태로 재등장한다. 영화의 후반에서 회스는 계단을 내려간다. 계단 장면에서 회스가 상징하는 경계는 인간의 양면성에서 과거와 현재를 아우르는 시간성으로 확장된다. 그는 점점 아래로(즉, 죽음과 과거로) 내려가고, 중간에 한 번 멈춰서 ‘이쪽’을 바라보는데, 장면은 기념관으로 활용되고 있는 ‘현재’의 아우슈비츠로 전환된다. 그가 보고 있는 것은 미래의 아우슈비츠, 다시 말해 자신들의 만행에 대한 미래의 평가와, 동시에 ‘관객’이다. 그는 홀로코스트를 과거와 소재로서 기억하며, 그 본질적 공포와 고통을 잊어가고 있는 오늘날의 ‘관객’과 ‘현재’를 바라봄으로써 섬뜩한 교훈을 주는 것이다. 영화는 그가 어두운 밑으로 내려가는 장면을 마지막으로 끝이 난다. 그리고 영화가 끝이 나면, 관객은 ‘현재’에 여전히 남아있다.  

   영화 <존 오브 인터레스트>는 결코 관객을 피해자나 제3자의 위치에 배치하지 않는다. 감독은 명확하게 그들이 우리의 일면을 갖고 있으며, 등장인물을 통해서 우리 안의 내재된 양면성을 성찰하도록 영화를 구성했다. 지금도 타국에서 이어지고 있는 전쟁과 박해, 당장 뉴스 속 보도되는 각종 폭력적 행위들을 떠올리자. 그리고 생각해 보자. 이 중 진실로 관심을 가지고 있는 일들이 몇이나 되는가? 조너선 글레이저 감독은 “우리 모두가 비인간화의 희생자”라고 말한다. 여기서 희생자는 우리가 의도하지 않아도 비인간화의 과정에 놓여있음을 뜻한다. 그는 이렇게 질문한다. “우리는 이것에 어떻게 저항해야 하는가?” 

   비인간화는 익숙함과 무감함에서 비롯된다. 오늘날 범람하는 매체 속에서 사건은 쉽게 ‘익숙한 것’이 되어버린다. 우리는 익숙한 것을 경계하고 비인간화에 끊임없이 저항해야 한다. 단순히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인간”으로 존재하기 위한 투쟁이다.      





아래는 역시나 필자가 주목한 지점에 대한 서술이다. 이미 본문의 분량에 지쳤거나, 철학에 관심이 없다면 과감히 생략하시라. 



  영화 속 열화상 카메라로 촬영된 소녀의 존재는 인상적이다. 소녀는 밤마다 몰래 나가서 아우슈비츠 수용자들을 위해 그들의 노동 환경에 사과를 숨겨놓는다. 이는 감독이 실제 사례에 감동받아 구성된 장면으로, 암울한 인간상이 제시되는 영화 속에서 인간 존재의 ‘희망적’ 부분, 다시 말해 선함의 상징으로 제시된다. 


   "단테(Dante)는 <지옥편>의 제26곡에서 빛나는 벌레, 즉 반딧불이의 '약한 빛(luccioa)'에 은근하지만 중요한 운명을 남겨두려 했다." - 조르주 디디-위베르만, ⌜반딧불의 잔존⌟


  조너선 글레이저 감독에 한참 앞서, 홀로코스트 속 이러한 '작고, 선한' 행동을 빛으로 지적한 사람이 있었다. 이탈리아의 영화감독 피에르 파올로 파솔리니(Pier Paolo Pasolini)는 파시즘 속 저항하는 존재들, "인간적인 순결의 신호들"을 반딧불로 묘사한다. 비록 그는 이 단어를 "민중의 정신이 소멸"한 그의 시대를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데 제시했지만, 이후 프랑스의 철학자이자 미술사학자인 조르주 디디-위베르만(Georges Didi-Huberman)이 파솔리니의 '반딧불이'에 영감을 받아 이들을 긍정적으로 재검토했다. 

  위베르만은 반딧불적인 "말"이 사라지거나 소멸되는 것이 아니라고 판단한다. "바르샤바 게토의 일기들과 폭동 일지들, (...) 아우슈비츠의 잿더미에 감춰져 있던 특수부대(Sonderkommando) 구성원들의 육필 원고들"과 같은 '반딧불-말'은 소멸되지 않고 남아있다가, 적당한 시간이 지난 후 다시 발현된다. 예를 들어, <존 오브 인터레스트> '빛'을 가진 '과거' 소녀의 선한 행동을 '현재' 관객이 다시 보는 것이 그것이다. 반딧불이의 빛은 나타나고 사라질 수는 있지만 소멸하지 않는다. 이들은 재현되거나 발굴될 때마다 다시 '빛'으로서 힘을 얻는다. (위베르만은 다양한 분야에 걸쳐 반딧불-말을 사용하지만, 이 글의 목적은 영화 글이기 때문에 영화 이미지와 영향력으로 제한한다.)

   이미 알듯이, 열화상 카메라 속 소녀의 선행은 비인간화에 대한 저항이다. 그리고 영화 장면에 이러한 저항이 삽입됨으로써, 시간과 망각 속에서 꺼져간 빛은 관객에게 전달되며 다시 생명력을 얻는다. 열화상 카메라 자체가 '밝은 빛'으로 대상을 드러내는 도구가 아니라는 점과, <존 오브 인터레스트>의 배경이 반딧불이가 나타나도록 조성하고 있다는 점에서, 소녀의 역할은 단순히 '희망'의 가시뿐만 아니라 비인간화에 대항하는 감독의 은밀한 방책柵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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