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를 여름날에 비할 수 있을까요?
1880년대 프랑스의 식문화와 생활 모습을 그대로 담고 있는 영화 <프렌치 수프>는 유명 요리사인 도댕 부팡(브누와 마지멜)과 함께 일하는 요리사 외제니(쥘리에트 비노슈), 두 사람의 일상을 중심으로 흘러간다. 요리와 주방이 소재인 일반적인 영화들의 분주하고 급박한 속도와 달리, 이 영화는 왈츠처럼 우아하고 효율적인 템포로 전개된다. 고함이나 파열음이 제거된 그들의 주방에서는 오직 요리를 위한 소음과 자연의 소리만이 존재하며 구성원들은 한 몸처럼 각자의 역할을 해낸다. 마치 <프렌치 디스패치>와 <애스터로이드 시티> 등의 영화에서 웨스 앤더슨 감독이 보여주는 낭비 없는 동선과 절제미가 더 고즈넉한 환경으로 이행된 듯이 말이다.
20년간 서로의 곁에서 든든한 조력자이자 동반자가 되어온 도댕과 외제니가 선보이는 요리와 주고받는 눈빛은 관객에게 말보다 더 많은 것을 전달한다. 극 중 외제니가 자신이 요리를 통해 대화에 참여한다고 말하는 대목이 있는데, 이는 사실 외제니의 캐릭터뿐만 아니라 이 영화의 전체를 설명하는 대사이다. 관객은 대사보다 스크린 속의 손끝과 동작, 시선을 통해서 캐릭터들의 감정을 따라간다. 외제니와 도댕이 보여주는 로맨스에는 청춘의 서투름, 치열함과 같은 게 없지만, 대신 도댕이 그들을 수확의 계절 “가을”에 비유한 것처럼, 그들의 감정은 절제 속에 단단히 영글어있다. 특히 도댕이 온몸으로 호소하는 사랑의 감정은 애틋하기까지 한데, 이런 효과는 오히려 그가 말로써 ‘당신을 사랑한다’고 고백하지 않음으로써 더욱 부각된다.
그들의 사랑은 뭉근한 불에 정성으로 오래 끓여서 깊은 맛이 나는 수프와 닮아있다. 영문으로는 <The Taste of Things>인 영화의 제목이 <프렌치 수프>로 번역된 것은 이러한 이유 때문일 것이다. 수프를 끓이는 불이 너무 세면 수프 맛이 거칠어지거나 타버리듯이, 외제니는 서두르거나 앞서지 않고, 도댕은 재촉하지 않는다. 도댕이 외제니를 대하는 방식은 우리가 너무 소중한 무언가를 대할 때, 마치 그들이 깨지거나 사라질까 노심초사하는 것과 유사하다. 누구나 알고 있듯이, 사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상대에 대한 존중이다. 모두가 알지만 쉽게 잊는 사실을 영화는 두 사람을 통해서 다시 꺼낸다. 도댕과 외제니가 서로를 존중으로 대하는 모습은 격정적이지 않아도 충분히 큰 울림을 준다.
인생을 계절에 빗대어 표현하는 방식은 클래식하지만, 영화 <프렌치 수프>에서는 다른 맛을 낸다. 극에서 외제니는 도댕의 청혼을 받아들이며 자신의 시간은 “여름”에 있으며, “한여름의 뜨거운 열기”를 사랑한다고 말한다. 그들의 나이와 청혼의 시기를 “가을”에 빗댄 도댕의 비유에 대해 말한 것이다. 그런 외제니에게 도댕은 자신은 “모든 계절의 처음”을 사랑한다고 말하지만, 어쩌면 도댕이 외제니를 “가을”에 두고 싶어 한 것은 셰익스피어의 시처럼 “여름의 머무름이 너무 짧기” 때문 아니었을까? 실제로 영화는 축복 속에 이루어졌을 가을 결혼식을 보여주지 않는다. 외제니가 알 수 없는 병으로 인해 영영 여름에 머물게 되었기 때문이다. 불타는 숯을 동경했던 파트너의 죽음은 도댕에게 치명적인 사건이었다. 그는 떠난 외제니의 흔적을 붙잡고 무너진다. 자연과 열정으로 활기 넘치던 주방은 순식간에 꺼진 재와같이 고요해졌다. 하지만 도댕을 다시 일으키는 것 역시 외제니의 흔적이다. 외제니가 요리를 가르치고 싶어 했던 특별한 소녀 ‘폴린(보니 샤그노-라부아르)’을 도댕이 거두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로써 주방의 꺼진 불은 다시 타오른다.
봄의 계절을 살고 있는 폴린으로 인해 도댕은 다시 매 순간의 “처음”을 맞이할 것이다. 그리고 외제니는 그녀의 레시피와 주방 곳곳에 남은 흔적을 통해 영원히 살아있을 것이다. 이쯤에서 외제니를 생각하는 도댕을 떠올리며 셰익스피어의 소네트를 다시 인용할 수밖에 없겠다. “하지만 그대의 영원한 여름은 시들지 않으며, 그대의 아름다움은 사라지지 않으리.” 왜냐하면 외제니의 치열했던 흔적과 사랑은 도댕과 폴린의 가슴에 남아 결국 “그대를 영원히 살게 할” 테니까.
여기까지 읽으신 분들을 위해 영화의 비하인드 하나를 제공하겠다.
<프렌치 수프>는 작가 마르셀 루프의 소설 「도댕 부팡의 삶과 열정」을 각색해 제작한 영화이다. 소설은 외제니의 죽음 이후 도댕의 삶을 조명한다. 흥미로운 것은 영화 속 멜로의 주인공들로 나오는 도댕 역의 배우 브누아 마지멜과 외제니 역을 맡은 쥘리에 비노슈가 과거 실제 부부였고, 결별 후 20년 만에 이 영화에서 합을 맞췄다는 사실이다. 필자는 이 사실을 안 이후 비명을 지르며 박수를 칠 수밖에 없었다. 프랑스 영화가 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