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오니소스적 충동과 청춘
들어가기에 앞서, 이 영화에는 곳곳에 폭력적인 장면이 존재하며 중간에 이러한 특징이 두드러지는 구간이 있음을 명시한다. 연출에 따른 감독의 의도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으나, 우리는 여성 관객으로서 느끼는 불쾌함을 단순히 예술적 허용으로 무마할 수 없는 시대에 살고 있음 또한 인지해야 한다. (물론 이 영화는 1985년 개봉한 영화이다. 이와 관련한 비판은 본문에서 다뤄진다). 혹 평소에 이러한 영화를 기피한다면, 관람을 권하지 않는다.
침체되어 있던 일본 영화에 새로운 생명력을 불어넣었던 <태풍 클럽>이 40년 만에 돌아왔다. 1985년에 처음으로 개봉된 영화 <태풍 클럽>은 격동 속에 놓여있던 1980년대 일본 사회 속 방황하는 청소년들의 모습을 그려낸다. 영화는 일본의 시골을 배경으로 하며, 태풍으로 인해 학교라는 울타리 내부에 고립된 학생들의 혼란과 갈등, 그리고 그 속의 성장을 묘사한다.
“농부의 아이들”이라는 소재에도 불구하고 영화에는 편견 속 시골 마을의 평화와 조용함 같은 것이 없다. 오히려 그 아래 잠재된 것은 ‘불안’이다. 그들의 ‘서툶’은 아이들의 ‘때 묻지 않음’을 대변하지만 동시에 잠자리의 날개를 찢는 무구함만큼이나 위협적이다. 이러한 양가성은 시퀀스로 부각된다. 야간의 학교 수영장에서 노래에 맞춰 춤을 추는 여학생들이 동급생을 물에 빠뜨려 위험에 처하게 만드는가 하면, 수업 중의 과한 장난은 기어이 피를 낸다. 관객들은 등장인물들의 설익은 행동들이 폭력적으로 치환되는 과정을 반복해서 목격하면서 결국 그들을 마냥 웃으며 지켜볼 수 없는 위치에 처하게 된다. 이러한 분위기는 아마도 영화가 배경으로 하는 1980년대 사회 경제의 불안한 기조에 연결되어 있을 것이다. 게다가 그들이 ‘중학생’인 것을 고려하면, 우리는 인물들의 충동성을 더욱 유연하게 이해할 수 있다.
학교와 학생들을 구심점으로 하는 일반적인 영화가 그렇듯이, 이 영화에서도 선생님의 역할이 중요하게 작용한다. 다만, <태풍 클럽>에서 선생님은 인솔자의 역할보다는 전제적인 어른들을 대변하고, 학생들과 대립 관계로 부각된다. 수학을 담당하는 우메미야 선생(미우라 토모카즈)은 연인과의 “개인적 문제”로 인해 수업 중 불미스러운 소동을 일으키며, 우등생인 오마치 미치코(오니시 유카)를 비롯한 학생들에게 신용을 잃는다. 또한 “나중에 설명하겠다”는 그의 말은 임기응변에 불과한 것으로 묘사되고 결국 지켜지지 않으며, 고립된 학생들이 도움을 요청할 때 그는 취한 상태로 미카미 쿄이치(미카미 유이치)와 논쟁을 벌이기도 한다. 여기서 그는 자신을 부정하는 미카미의 말에 “너도 18년이 지나면 나와 똑같아질 것”이라며 선언하는데, 미카미는 “절대 당신과 같은 어른이 되지 않을 것”이라는 대답으로 반목한다.
등장인물 중 가장 조숙하게 그려지는 미카미의 대답은 권위에 저항하는 청소년이 느끼는 미래(어른)에 대한 절망을 담고 있다. 이러한 지점에서 미카미의 죽음은 겨우 당신과, 혹은 우리들과 같은 어른이 되지 않겠다는 선언이자 결정이다. 그러나 감독은 결코 그것을 미화하며 ‘순교’로 두지 않았다. 오히려 미카미가 흙탕물로 처박힌 듯한 연출을 통해서 그의 죽음을 우스꽝스럽게 만들었고, 이는 무릇 죽음이란 결코 아름다울 수 없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미카미의 죽음 자체가 무의미하다고 단언할 수는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 영화를 보고 있는 관객들은 ‘속세에 찌들기 전의 순수한 모습으로 영원히 남는’ 것에 대한 추동을 이해하고 있으며, 어쩌면 일부분은 그 순수성을 동경할 것이기 때문이다.
소마이 신지 감독의 <태풍 클럽>은 청소년들의 욕망과 성적, 폭력적 행동을 노골적으로 담은 연출로 인해 당시 일본 사회에서 비판받았지만, 현재는 꾸밈없는 청소년 영화이자 후대 감독들에게 큰 영향을 준 영화로 중요하게 평가된다. 의미 있는 1980년대 영화가 재개봉하는 것은 영화 팬들에게 분명히 환호할 소식일 것이다. 그러나 그 반가움이 영화가 1980년대 영화이기 ‘때문에’ 도리어 허용되는 장면들과, 현대인의 시각에서는 분명히 보이는 비판점들까지 가려 주지는 못한다. 여전히 오늘날 이 영화를 재개봉하는 것이 옳은가에 대한 의문이 남아있지만, 각 시대상에 따라서 무한히 재평가되는 것 또한 예술의 특권일 것이다. 그러므로 이 영화의 재개봉은 담론을 형성하고 새로운 의미를 도출한다는 점에서 ‘명작’으로서의 명예를 지키는 걸 수도 있겠다.
이하 간단한 예술 철학 얘기가 이어진다.
영화를 보았고, 철학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아마도 상영 내내 필자와 같은 생각을 했을지도 모르겠다. 이를테면 '감독이 니체에 영향을 받았나?' 같은 것 말이다. 영화 속 아이들의 사회에 대한 반항적인 태도와 예측할 수 없는 원초적 충동성에 대한 묘사는 니체가 말하는 디오니소스적 충동을 연상케 한다.
그리스 비극을 통하여 자신의 예술철학을 개진한 니체는 그의 저서 『비극의 탄생』에서 두 가지 예술적 충동에 대해 다뤘다. 니체에 의하면 원초적 예술충동은 아폴론적인 것과 디오니소스적인 것으로 구분할 수 있다. 아폴론적인 예술충동은 현실을 구성하는 충동이며, 이성적인 것, 아름답고 조화로운 형태를 포함한다. 반면에 디오니소스적인 것은 감정과 광란, 흥분과 밀접하며 개인의 의식보다 집단 무의식에 연결된다. 니체는 그리스 비극이 이 두 가지 예술충동을 적절히 다루고 있다고 보았고, 그것이 그가 그리스 비극을 예술철학의 토대로 삼은 이유이다.
이쯤에서 영화 속 반복해서 등장하는 아이들의 '춤'을 보자.
교복이 가진 신분과 상징성을 모두 벗어던진 채 춤을 추는 아이들의 모습이 디오니소스를 숭상하는 여신도들, 마이나데스와 닮지 않았는가? 특히 이 광란의 순간, 그들이 사회적 규범으로 통제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신화에 따르면, 마이나데스는 오르페우스를 살해한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다양한 해석이 존재하지만, 그들이 오르페우스를 잔인하게 찢어 죽이는 결말은 동일하다. 마이나데스의 광기는 자유이자 두려움이다. 그들의 폭력성은 집단 외의 사람에게 공포가 되기 때문이다.
영화 속 강조된 미카미의 죽음을 이러한 맥락과 연관 지었을 때, 본문과 또 다른 해석이 가능하다. 미카미는 학생 중 가장 이성적이고 침착한 모습을 보이는 인물이다. 어떤 장면에서는 구성원의 일탈에 동참하는 반면, 또 어떤 장면에서는 그들로부터 떨어져 있다. 그들이 함께 있을 때 집단은 자유를 표명하는 듯 보이지만, 미카미가 그 집단에서 벗어나는 순간 그는 이방인이 되어 비이성적인 태도들에 대한 공포를 마주하게 된다.
앞서 말했듯이, 니체는 그리스 비극에서 아폴론적인 것과 디오니소스적인 예술충동의 조화를 보았다. 그에 의하면 어느 한쪽에 치우친 삶은 결코 건강하지 않으며, 그러한 예술 또한 마찬가지이다. 그러므로 미카미의 죽음은 영화 속 예술충동의 조화를 위한 사건이다. 그건 태풍과 밤의 학교가 야기하는 아노미를 깨뜨리는 장치이자, 디오니소스적인 혼란이 물러난 후 떠오르는 '이성'의 태양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