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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써니 Apr 02. 2021

메추리알의 문제가 아니다.

어느 날 아들이 말했다.


"엄마 학교 급식에서 메추리알 장조림 나올 때가 있어요."

"그래? 메추리알 장조림 먹고 싶어?"

"아니요. 꼭 그렇다는 게 아니고. 먹으면 좋긴 하겠지만."


아들은 요즘 먹고 싶다는 말을 이런 식으로 한다. 그냥 먹고 싶다고 해도 되는데 꼭 먹고 싶다는 것은 아니란다. 암튼 아들의 마음이 그렇다니 당장 만들기로 했다. 학교도 자주 못 가는 데다 학교 가는 날도 급식을 안 먹고 오는 아들이 먹고 싶다는데 망설인다는 것 또한 불충이다. 마침 남편이 퇴근할 시간이 가까워졌다.

'여보 퇴근할 때 새농에서 깐 메추리알 2봉만 사 오세요. 아드님 드시고 싶다세요.'

남편에게 톡을 보냈다.


퇴근한 남편이 내놓은 것은 메추리알 2판이다.


"여보 내가 깐 메추리알이라고 톡 보내지 않았어?"

"응. 그렇게 보냈는데 내가 그냥 이거 사 왔어?"

"도 대 체 왜~~?"


남편이 묘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그냥 내가 메추리알 까는 재미를 좀 느껴보고 싶어서."


뭣이라!

그런 재미도 있었나?


순간 단전에서부터 짜증이 내리눌러도 아랑곳 않고 올라왔다.


"그런 재미를 왜?"


나는 어금니 꽉 웃음으로 말했다.


"히히 새농에 약품을 안 쓰고 깐다고 쓰여 있긴 했는데 정말 메추리알 까는 재미 좀 느껴보려고 산거야. 인터넷에 보니까 까는 방법이 나오더라고."


그렇겠지. 나는 스마트폰이 없기도 하고, 네이년을 몰라서 메추리알을 까는 방법도 재미도 모르는 거겠지. 설마 귀찮아서 깐 메추리알을 사 오라는 거냐고 돌려 말하는 건가? 심호흡 한 번으로 일단 메추리알을 무사히 냉장고에 넣는 것까지 성공했다.


저녁 준비가 끝날 무렵, 남편이 메추리알을 냄비에 넣고 삶기 시작했다. 굳이 지금? 저녁상 다 차렸는데. 다시 올라온다. 짜증과 분노 중간 그 무언가. 그래도 나는 묵묵히 밥을 먹었다. 남편은 밥을 먹으면서도 냄비에서 익어가고 있는 메추리알을 챙겼다. 중간에 일어나서 메추리알을 찬물에 담그고 저녁을 마저 먹었다.


본격적으로 메추리알 까는 재미를 즐기기 시작했다. 하나하나 양끝을 깨 주고 통에 넣더니 마구 흔든다. 아들에게 신나게 춤추면서 흔들라고 넘겨주기도 한다. 둘은 아주 신이 났다. 나는 짜증이 났다.


"오! 완전 잘 까지네. 쉬워. 여보 이거 봐. 정말 깨끗하게 잘했지?"


통에서 꺼낸 메추리알을 하나씩 까면서 남편이 말했다.


"그러네."


최대한 영혼 없이 대답했다. 남편은 메추리알은 얌전하게 반찬통에 담아서 냉장고에 넣어두었다. 마치 어머니의 고등어처럼.


다음날 아침, 냉장고에서 까지 않은 한판의 메추리알을 보고 다시 올라왔다. 우씨 왜 한판은 안 깐 거냐? 남편이 한판은 내일 해야겠다며 냉장고에 넣어뒀던 게 생각났다. 그렇게 재미있는데 내일로 미루다니 남편은 자제력이 좋은 사람이다. 또 남편의 퇴근까지 기다리느니 해치우는 게 나을 것 같았다. 나는 메추리알 한판을 삶고 껍질을 벗기고 장조림을 만들었다. 아들이 맛있게 먹어 주니 명치끝에서 어찌할 바 모르던 짜증이 쑥 내려갔다. 퇴근을 한 남편이 말했다.


"한판은 자기가 껍질 벗겼어? 내가 하려고 했는데. 내가 한 방법으로 했지? 엄청 쉽지?"

"응. 엄청 쉽더라. 그런데 다음부터는 메추리알 안 사려고."

"왜? 내가 껍질 다 깔게. 걱정하지 마."


할많하않.

나는 어금니 꽉 웃음을 머금고 말했다.


"괜찮아. 이제 계란 장조림만 하려고."


메추리알 껍질을 벗기는 일이 절대 할 수 없을 만큼 힘든 일은 아니다. 그렇다고 그 재미를 즐겨 볼 만한 일은 더 아니지 않나? 아무리 재미있어서 죽겠다고는 하지만 퇴근한 남편에게 메추리알 몇 판을 맡길 수는 없다. 그건 정말 내가 생각해도 조금 비열하다. 그렇다고 내가 하나씩 껍질을 벗기면서 메추리알 장조림을 하기는 힘들 것 같다. 메추리알 껍질이 손톱 밑으로 자꾸 들어가려고 하는데 못 견디게 아프지는 않지만 진짜 짜증날만큼 신경을 건드리기 때문이다. 군밤 먹을 때 속껍질 벗길 때처럼 별거 아니지만 감내하고 싶지 않은 불쾌감이다.


음식을 먹으면서 손톱 밑을 찌르는 고문까지 견디고 싶지 않다. 그래서 인터넷에서 메추리알 껍질 벗기는 방법을 찾아서 해본 적도 있었다. 열심히 흔들다 보니 한두 개의 메추리알이 터져서 노른자가 가루가 되어 있었다. 나머지는 멀쩡하고 그 방법이 조금 쉽기는 하지만 결국 마무리는 일일이 손으로 해야 했다. 메추리알 한두 개 버리는 것쯤 아무것도 아닐 것 같은데 이상하게 그게 또 싫었다. 정말 완벽하고 깨끗하게 하고 싶었는데 현실은 자꾸 조금씩 부족했다. 그게 싫어서 메추리알을 안 사기 시작했다. 아들이 메추리알 장조림을 말하기 전까지. 그래서 약품처리 없이 껍질을 벗긴다는 친환경 깐 메추리알을 샀으면 했던 것이다.


 사실 메추리알의 문제가 아니다. 이것은 나의 문제다. 작은 것 하나가 거슬리면 그 일 전체를 포기하는 내 성격이 문제다. 남편은 아니 고작 그것 때문에?라고 하겠지만 나는 그 고작이 그 일이나 상황의 전부가 될 때가 많다. 산책을 하다가 애완견의 치우지 않은 배설물을 보면 나는 그 산책 전체를 포기한다. 한번 본 눈은 산책 내내 다른 배설물과 마주칠까 봐 심하게 흔들린다. 가끔은 천둥소리 때문이 아니라 들릴 듯 말듯한 모기소리 때문에 잠을 잘 수 없는 것처럼 아주 작은 것이 가장 치명적일 때가 있다.


 20년이 넘게 남편에게 이 사소하지만 무엇보다 위험한 것들에 대해 말해왔지만 남편은 도저히 이해하지 못했다. 역시 내가 문제인 것이다. 나는 음악을 들을 때 볼륨이 꼭 짝수여야 하고, 길을 걸을 때는 꼭 상대가 나의 오른쪽에서 걸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음악소리는 더 이상 음악이 아니고, 길을 걷다가 자꾸 휘청거린다. 이런 작지만 다른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하는 것들이 애석하게도 나라는 존재다. 그 사실을 너무 정확하게 아는데 남편에게 메추리알 껍질을 벗기는 부업까지 시킬 수는 없다. 이제 메추리알 장조림은 끝이다. 대신 껍질이 손톱 밑으로 들어가지 않는 계란, 너에게 모든 것을 맡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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