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드디어 근로계약서를 쓰는 날이다. 시청이 집에서 30분 거리라 차를 가지고 가야 했다. 며칠 전에 남편이 계약서 쓰러 가는 길에 주유를 해야 한다고 했다. 연탄 봉사하러 갔다 오는 길에 주유 깜빡이가 들어왔다고 했다. 남편은 주말에는 주로 내 차를 이용한다. 아이의 카시트가 내 차에 설치되어 있기 때문이다. 평상시에는 남편이 주유를 해주는데 그날은 눈이 많이 오고 차가 미끄러져서 그냥 집으로 왔다고 했다. 나는 그날부터 긴장하기 시작했다. 주유할 생각을 하니 며칠 전부터 신경이 쓰였다.
운전을 한 지 20년이 다 되어가는 내가 고작 주유 때문에 긴장해야 하다니 자존심이 상하지만 어쩔 수 없다. 내가 이 동네에 이사를 오고 가장 충격을 받은 것이 주유였다. 이 동네에 있는 거의 모든 주유소가 셀프주유소다. 예전에 살던 곳에서는 셀프주유가 어쩌다 눈에 띄는 정도라면 이 동네에서는 셀프주유가 아닌 곳을 찾기 어려웠다. 나는 셀프주유를 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주유소에 가는 것이 두려웠다. 그래서 남편이 주말에 차를 쓸 때 주유를 해주는 방식이었다.
그럼에도 어쩔 수 없이 주유를 해야 할 때가 있어서 셀프주유소에 갈 때는 등골이 서늘하게 식은땀이 났다. 처음에는 카드가 이상하게 자꾸 튀어나오거나 다시 시작하라고 하는 바람에 직원 호출 버튼을 눌렀다. 직원분이 나오셔서 그림에 나오는 대로 따라 하면 된다고 하고 들어가셨다. 어쩔 수 없이 쩔쩔매면서 기계가 시키는 대로 비굴하게 첫 셀프주유를 마쳤다.
두 번째로 셀프 주유를 했을 때는 주유구에 주유기를 넣는 데까지는 성공했다. 그런데 기름이 안 나오는 것 같았다. 다시 직원분을 불렀다. 직원분은 한심하다는 눈빛(내 열등감이었을 테지만)으로 나를 보면서 주유를 도와주셨다. 두 번의 강렬한 셀프주유 후에 나는 주유소에 가는 것을 더 싫어하게 되었다. 왜 모든 주유소가 셀프만을 추구하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셀프주유와 일반 주유를 선택할 수라도 있었으면 좋겠다는 나의 바람과는 무관하게 셀프주유소는 이제 당연한 것이 되어버렸다.
지난 가을, 오랜만에 언니들과 여행을 가는 길에 기름이 간당간당해서 주유를 해야 했다. 나름 머리를 썼다. 그래 휴게소는 대부분 셀프가 아닐 거야 하는 생각에 일부러 휴게소에서 주유를 하기로 했다. 그런데 맙소사 휴게소도 셀프였다. 나는 바들바들 떨면서 뒤에 줄 서있는 차들의 커다란 눈을 의식하면서 어렵게 주유를 했다. 휴게소를 빠져나오면서 배신감에 치를 떨었다. 휴게소 너마저.
오늘의 주유를 위해 나는 근처에 있는 주유소를 검색했다. 셀프가 아닌 곳을 찾기 위해서였다. 짐작은 했지만 없었다. 맘 카페를 뒤졌다. 혹시라도 나처럼 셀프주유를 두려워하는 사람을 위해 셀프가 아닌 곳을 올려주신 분이 있을까 찾았지만 셀프를 두려워하는 사람은 세상에 아마 나 혼자인 것 같았다. 할 수 없이 나는 부딪쳐보기로 했다. 시동을 걸자 띠링띠링하고 주유 경고음이 얄밉게 울렸다. 그래 나도 할 수 있어. 호기롭게 출발했다.
시청으로 가는 방향으로 우리 집에서 가까운 주유소는 두 군데였다. 일단 첫 번째 주유소는 대놓고 크게 셀프라고 쓰여 있었다. 일단 패스하기로 했다. 다음이 셀프가 아닐 수도 있으니까 일단 다음 주유소에서도 셀프면 그때 주유하자 싶었다. 두 번째 주유소는 셀프라는 팻말이 없다. 고 생각했지만 일단 들어가자 작은 글씨로 셀프라고 쓰여 있었다. 제길!
일단 시동을 끄고 내렸다가 아차 싶어서 다시 차문을 열었다. 주유구를 안 열었다. 주유구 버튼이 어디 있더라. 일 년에 고작 두세 번 주유하다 보니 주유구 버튼이 자꾸 헷갈린다. 거대한 주유기 앞에 섰다. 뭐부터 해야 하더라 망설이고 있는데 "시작을 누르세요."라는 말이 들렸다. 내손이 어찌할지 모르고 헤매는 모습에 직원분이 멀리서 외치는 소리였다. 시작을 눌렀다. 정전기 방지 버튼도 시키는 대로 눌렀다. 카드를 꼽고 유종을 선택하고 어쩌고 저쩌고 하는 동안 내 손은 여러 번 허공에서 멈췄다.
갑자기 내 옆에서 빛이 났다. 아까 그 직원분이 얼마 주유하세요?라고 물어보시고 금액을 입력하셨다. 주유기를 뽑아서 내차 주유구에 꼽았다. 내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 바로 주유기를 차에 꼽는 것이다. 이때부터 나는 벌서는 것처럼 주유기를 들고 있어야 했다. 그런데 이 분은 주유기를 안정되게 꼽아주고는 무심하게 퇴장하셨다. 멋졌다. 마치 서부의 총잡이 같았다. 주유가 끝나고 나는 주유구의 뚜껑을 닫았다. 드드득 소리가 날 때까지. 그리고 다시 드드득 확인하듯 뚜껑을 돌렸다. 시동을 걸기 전에 나는 다시 영수증을 확인했다. 혹시 휘발유차에 경유를 주유한 것은 아닌지 확인하기 위해서이다. 확인하고 또 확인하고 확인만이 살길이다.
차를 출발하면서 나는 멀리 세차를 안내하고 계신 그분에게 큰 소리로 감사합니다 하고 주유소를 빠져나왔다. 마치 귀인을 만난 것처럼 마음 한 구석이 벅차올랐다. 특별히 친절한 말을 한 것은 아니지만 무심하게 베풀어주신 친절 앞에서 나는 감동했다.
남들에게는 아무것도 아닌 셀프주유가 나한테는 정말 떨리고 어렵다. 얼마 전에 취업을 위해 면접을 보러 갈 때도 이렇게까지 떨리지는 않았다. 어차피 내가 할 수 있는 것만 하고 오면 된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런데 주유는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하는 것이 아니었다. 할 수 없는 것도 어쨌든 해내야 하고 그러지 않으면 차가 길에서 멈출 수도 있는 두려움을 견뎌야 한다. 주유를 하고 오른쪽으로 바짝 당겨진 바늘을 보니 기분이 좋았다. 내가 주유한 것도 아니면서 괜히 뿌듯하기도 했다. 면접보다 떨렸던 셀프주유, 다음에도 난 거대한 주유기 앞에서 한없이 작아질 것이다. 하지만 언젠가는 나도 차에 주유기를 꼽고 두 손 놓고 있을 날이 올 거라고 믿고 싶다. 아마 시간이 많이 필요하겠지만 다음에는 더 용기 있게 셀프주유를 해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