퉤퉤퉤를 위하여

by 써니

영하로 떨어진 날씨지만 햇볕이 비치는 따뜻한 집에서 뒹굴거리던 어느 날의 일이다. 이불 밖은 위험하다는 신념으로 살아가는 나를 벌떡 일어나게 하는 일이 생겼다. 퉤퉤퉤의 눈 한쪽이 떨어지고 없었다. 퉤퉤퉤는 10년째 우리 집 벽에 있는 클레이로 만든 인형이다. 생긴 것은 귀엽다기보다는 괴기스러운 모습이지만 이사를 하면서도 차마 버리지 못하고 데리고 온 인형이다. 그런 인형의 눈 한쪽이 사라져서 외눈박이가 된 것이다.

"아들! 퉤퉤퉤 눈이 하나 없어졌어."

"어? 그러네."

"아들, 퉤퉤퉤 눈도 떨어지고 했으니까 이제 그냥 버릴까? 아니면 문방구에서 눈을 사서 붙일까?"

"에이 버리는 건 좀 그렇죠. 다시 눈을 붙여주는 게 좋을 것 같은데."

"그래? 그럼 눈 사 와서 다시 붙이자."


어릴 때부터 아들은 섬세했다. 나는 교육에는 무관심하지만 놀이에는 극성이라 아이가 6개월일 때부터 문화센터 놀이프로그램을 신청해서 다니기 시작했다. 놀이체육이나 촉감놀이를 하면서 아이의 감성이 풍부해지기를 바랐다. 아들은 4살이 될 때까지 아무것도 만지지 않았고 어떤 놀이도 무서워서 시작하지 못했다. 다른 아이들은 옷이 흠뻑 젖도록 만지고 입에 가져가기도 하는 찰흙이나 두부, 미역 같은 것들을 아들은 만지려고도 하지 않았다. 놀이체육 시간에도 발에 닿는 느낌이 조금이라도 낯설면 아들은 거부했다. 프로그램을 하는 동안 아들은 줄곧 내 품에 안겨 있었다. 그래도 나는 매번 프로그램을 신청하고 아들과 강좌에 참석했다. 아들이 직접 만지고 뛰어놀지 못하지만 다른 친구들이 하는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좋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런 아이가 조금씩 놀이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한 것이 4살 무렵이었다. 퉤퉤퉤는 아들이 4살 때 처음으로 아이클레이로 만든 인형이다. 아들은 평소와 다르게 조심스럽게 클레이를 만져보고 뭔가 어설프게나마 만들어 보였다. 그리고는 퉤퉤퉤라고 이름을 붙여주었다. 아들에게 왜 퉤퉤퉤라고 이름을 지었는지 묻자 아들은 퉤퉤퉤하고 침을 뱉어서 퉤퉤퉤라고 했다. 4살 아들의 손에서 처음 만들어진 존재, 퉤퉤퉤는 4살 아들에게 어떤 존재였을까? 아들의 상상 속에 퉤퉤퉤를 내가 다 알기는 어렵다. 하지만 여전히 퉤퉤퉤는 아들에게 버릴 수 없는 존재로 남아있다.


아들과 나는 한쪽 눈이 사라져서 안쓰럽기도 하고 무섭기도 한 퉤퉤퉤에게 새 눈을 달아주었다. 10년 세월에 색이 바랜 얼굴과 달리 퉤퉤퉤의 눈은 생기를 띠고 빛이 났다. 눈을 붙이고 나서 아들에게 물었다.

"아들, 왜 퉤퉤퉤한테 눈을 다시 붙이면서까지 안 버리는 거야?"

"에이, 이름이 있는 인형을 버리는 건 좀 그렇죠."

요즘 아들은 자세한 이야기를 하지 않고 좀 그렇죠라고 말할 때가 많다. 아들에게 퉤퉤퉤는 자기가 이름을 붙인 자신만의 특별한 존재가 된 모양이었다. 이미 중학생이 된 나이에도 아들에게 친구로 남아있는 특별한 존재.

"그런데 엄마 이제 진짜 함부로 이름 붙이지 말아야겠어요. 이름 붙이고 나니까 함부로 대하거나 버리기가 힘들어요."

아들의 말에 그동안 퉤퉤퉤가 우리 가족과 언제나 함께 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설명이 됐다. 이름을 붙인다는 것은 관계를 맺는다는 의미인가 보다. 이름을 붙인다는 것은 책임을 진다는 의미인가 보다. 마치 김춘수 시인의 시 '꽃' 에서처럼 퉤퉤퉤는 아들에게 와서 잊히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었나 보다.


생각해 보면 이름을 지어준다는 것은 참으로 묘한 일이다. 길에서 만나 이제는 나와 함께 살고 있는 몽땅이도 시작은 장난스럽게 지어준 이름이었다. 그때는 산책길에 몽땅이 외에 다른 길고양이들을 자주 만났다. 나는 평소 고양이에게 관심이 없어서 그냥 지나쳤는데 몽땅이는 우리 가족이 지나가면 야옹 소리를 내거나 길 한복판에 누워서 피하지 않았다. 그때 나는 꼬리가 짧은 이 고양이를 다른 고양이와 구별하기 위해 몽땅이라고 불렀다. 다른 길고양이 몇 마리에게도 이름을 지어줬다. 그리고는 산책할 때마다 이름을 지어준 그 고양이들이 어떻게 지내나 궁금해하고 만나면 반가워서 이름을 불러줬다. 그러다가 지금 몽땅이는 우리 집에서 살게 된 것이다. 처음 입양을 왔을 때 너무 장난스럽게 이름을 지은 것 같아서 몽땅이의 개명에 대해 가족회의를 했었다. 그런데 아들과 남편이 이미 몽땅이라는 이름이 우리 가족에게 더 의미가 있다고 해서 개명은 하지 않기로 했다. 그렇게 몽땅이도 우리 가족에게 와서 잊히지 않는 소중한 존재가 되었다. 이름이 가지는 무게가 새삼 무겁게 느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