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의 중학교 입학식

by 써니

아들이 드디어 중학생이 되었다. 아침에 교복을 차려입고 집을 나서는 아들을 보는데 괜히 뿌듯하고 뭉클 비슷한 게 올라왔다. 아직 내 눈에는 애기티가 남은 아들이지만 사진을 찍을 때는 제법 얼굴 선이 굵었다. 엄마의 시시한 농담은 무표정하게 넘기거나 그만하세요라고 정색하기도 하는 아들의 모습에서 이제는 더 이상 애가 아니라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그런 아들이 중학교 첫 등교를 위해 힘차게, 아니 어색하게 집을 나섰다. 아이를 키운다는 것은 아이가 자라는 만큼, 딱 그 정도의 속도로 나도 크는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나는 마치 내가 중학생이 된 것처럼 중학생의 마음으로 긴장하고 설레었다. 중학생 입학식이라 그런지 코로나 영향인지는 모르겠지만 학부모는 참석하지 않고 입학식을 한다고 했다. 이제는 부모의 그늘이 아니라 혼자서 해나갈 많은 일들의 시작을 알리는 것처럼.


초등학교를 졸업하기도 전에 나는 아들이 배정받게 될 중학교를 걱정했다. 아이가 배정받을 학교는 두 곳이었다. 아파트에서 횡단보도만 건너면 되는 학교와 걷기에는 멀고 버스를 타기에는 애매한 거리의 학교다. 버스가 간헐적으로 오는 동네 특성상 최소 40분이나 한 시간 전에는 집에서 나가야 한다. 그 시간이면 학교까지 걸어서 갈 시간, 다시 말해서 걸어도 40분, 버스를 타도 40분 거리의 학교에 배정될 수도 있었다. 다행히 아들이 바로 집 앞에 배정받았다. 중학교 배정을 통보받고 얼마나 기뻤는지 아들이 대학에라도 붙은 것처럼 여기저기 자랑을 해댔다. 나는 학교는 집에서 가까운 곳이 좋다는 쪽이다. 초등학교 때 걸어서 거의 한 시간 거리를 걸어 다녔다. 중학교는 버스로 30분, 고등학교는 버스로 1시간 30분이었다. 대망의 대학은 전철과 버스로 2시간, 이 모든 것이 왕복이 아니다. 하루에 1시간에서 길게는 4시간을 차에서 보냈던 나는 먼 거리 학교는 아무리 좋은 학교라고 해도 백해무익하다고 생각한다.


등교준비를 하면서 어젯밤에 입학안내문을 다시 찾아봤다. 초등학교때와 특별히 다른 것은 없었다. 실내화와 필기구, 책가방, 교과서가 준비물이었다. 다른 점이라면 교복착용과 단정한 두발로 등교하라는 안내문이었다. 초등학교 때는 교복을 안 입어서였을까? 단정한 두발이라는 말은 없었던 것 같다. 그런데 중학교는 단정한 두발이라는 준비가 필요했다. 교복을 착용하는 것만으로 도저히 단정하지 않을 수 없을 것 같은데 특별히 단정한 두발까지 챙기란다. 나는 괜히 그 안내문에 반발심이 생기는 것을 느꼈다. 도대체 언제까지 학교가 학생들의 머리모양까지 신경 쓸 생각일까 싶었다.


다행히 요즘은 두발 자유화라고 귀밑 3센티라는 말도 안 되는 규정은 없었다. 내가 학교에 다닐 때는 귀밑 3센티가 아니면 선생님이 가위로 머리를 자르거나 교문 앞에서 전교생이 등교하는 모습을 지켜봐야 했다. 귀밑 3센티라는 규정을 만든 사람은 알고 있는지 모르겠다. 귀밑 3센티가 단정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말이다. 찰랑찰랑 직모인 여학생이면 모를까 곱슬머리에게 그 머리는 단정이 아니라 환장이다. 미용실에서 규정에 맞게 잘라준 그 머리는 곱슬거리면서 위로 바짝 올라가서 귀밑 1센티도 어렵다. 게다가 사방으로 뻗쳐나가서 자유롭기 그지없는 단발이 되는 것이다. 그나마 한동안은 곱슬머리를 배려해서 단발머리 규정에 곱슬머리인 학생은 긴 머리를 묶고 다니게 한 적도 있었다. 그러던 것이 지금은 단정한 두발이 규정인 모양이다. 긴 머리는 인정하지만 파마를 하거나 빨갛고 파란 컬러 염색은 인정하지 않겠다는 의미일까?




중학교 입학을 앞두고 아들의 교복을 맞추고, 체육복을 샀다. 오늘 등교하는 아들이 교복을 입는 모습을 보면서 새삼 옛날 생각이 났다. 교복을 입고 첫 등교를 할 때의 설레고 긴장되는 마음이 떠오른 것이 아니다. 도대체 저 교복이라는 것은 세월이 아무리 지나도 도무지 편하게 만들어지지 않는구나 하는 생각이었다. 3년 동안 입을 교복을 초등학교를 갓 졸업하고 맞추다 보니 많이 크게 맞추지 않았는데도 커서 덤벙했다. 셔츠에 조끼, 넥타이에 재킷까지 갖춰 입으니 귀엽기는 했다. 하지만 아들은 최대한 줄인 바지가 자꾸 내려가는지 연신 허리춤을 올렸다.


나는 처음부터 교복을 반대했다. 6년 동안 교복을 입고 다니면서 교복은 춥거나 덥고, 불편한 옷이라는 생각을 떨쳐낼 수가 없었다. 그래도 시간이 지났으니까 교복 소재가 많이 좋아졌겠지 생각했는데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좋아지지 않은 것에 놀랐다. 정말 놀라운 일관성이었다. 게다가 나는 여학생 교복이라 남학생 교복의 세계는 처음이다. 역시 남학생 교복도 많이 엄청 매우 불편했다. 3학년까지 입기 위해 바지 양쪽에 늘리거나 줄일 수 있는 훅 같은 것을 달았는데 편해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셔츠나 바지는 신축성이라고는 조금도 없이 조금 뻣뻣한 소재였다.


나는 아들이 교복을 입지 않고 학교에 다니게 되지 않을까 내심 기대했었다. 교복을 반대하는 사람들이 많을 거라는 순진한 생각을 한 것이다. 내 주변에서 교복을 반대하는 사람은 나 혼자였다. 내가 아는 사람들의 의견이라 객관적이지 않지만 아마도 교복 찬반에서 찬성이 90프로는 훨씬 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이유다. 사람들이 교복을 이렇게 좋아하는 줄 몰랐다. 아마도 그 사람들은 어린 시절 더 소재가 좋고 예쁘고 편한 교복을 입은 것 같았다.


사람들이 교복을 찬성하는 이유는 이랬다. 첫째, 교복을 입으면 단정하고 학생답다는 것이다. 교복 입고 딴짓하기는 사복보다는 힘들 것이고 행동도 조심하게 될 거란다. 나는 궁금했다. 도대체 학생답다는 것은 무엇일까? 학교에서 원했던 단정한 두발에 이제는 회사원들도 안 하는 곳이 많다는 넥타이를 매고 공부해야겠다는 학구열에 불타서 학교로 향하는 학생들이 학생다운 것일까? 학생은 학생다워야 한다는 그들은 어른이니까 어른다운 사람으로 살고 있을까? 나는 47년을 살았어도 아직 내가 어른답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어른답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도 아직 모르겠다. 그런 내가 아들에게 아들답게, 학생답게를 요구할 수는 없을 것 같다.


나는 아들이 열네 살다웠으면 좋겠다. 갑자기 머리를 파마해 달라고 졸랐으면 좋겠고, 찢어진 청바지를 입고 등교하겠다고 했으면 좋겠다. 빨간 후드티를 입고 학교에 가는 아들이 교복을 입고 가는 아들보다 좋다. 머리를 파란색으로 염색한다고 하면 어떤가. 그 나이니까 더 예쁘지 않을까? 아이들의 자유로운 스타일이 아이들을 불량하게 만든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내가 학교 다닐 때를 생각하면 단정하게 교복 입은 청순가련한 이미지의 일진 여학생이 제일 무서웠다.

교복이 좋은 점 두 번째는 교복을 입으면 위화감이 없어진다는 것이다. 누구나 똑같은 옷을 입으니까 더 좋은 옷을 입은 학생을 부러워할 일이 없다는 것이다. 그럴까? 교복을 입기 때문에 다른 것에 더 돈을 쓰게 되지 않을까? 학생들은 비싼 가방과 비싼 운동화, 심지어 여학생들은 비싼 지갑으로 자신을 과시하고 싶어 한다. 시골에서 고등학교에 다니다가 경기도에 있는 학교로 전학을 왔을 때 나는 시골에서보다 더 큰 빈부격차를 교실에서 느꼈다. 교복 위에 입을 겨울 코트도 사기 힘들었던 나와는 달리 반 친구 중에는 휴대전화를 가지고 다니는 친구가 있었다. 대학교 때 처음으로 삐삐를 샀던 나였다. 삐삐도 흔하지 않은 시기에 휴대전화라니. 쉬는 시간에만 켜서 사용하던 휴대전화를 구경하느라고 그 아이 주변은 가끔씩 시장통이 되기도 했다. 위화감, 그것은 교복 하나로 절대 없앨 수 없다. 아마도 모두가 똑같은 옷을 입고 있기 때문에 다른 물건들로 더 자신을 과시하려고 할 것이다.


교복을 찬성하는 또 다른 이유는 교복을 입어야 옷 신경 안 쓰고 공부에 집중할 수 있다는 것이다. 교복을 입으면 공부에 더 집중하게 된다는 것은 무슨 논리일까? 요즘 학생들은 전교 1등인 학생도 등교 전에 머리를 드라이하고, 화장을 하고 등교한다. 아무리 공부를 잘해도 스타일을 포기하고 살지 않는다는 것이다. 지인의 자녀는 내신성적 1등급, 전교 1~2등을 다투는 학생이다. 중학교를 졸업하면서 강남에서 성형수술을 하고 고등학교에 진학했다. 시험을 보는 날에도 머리를 드라이하고 화장하는 것을 빼놓지 않는다고 한다. 그게 요즘 학생들이다. 교복 입었다고 신경 안 쓸 거라는 생각은 부모들의 바람이다. 교복을 입기 때문에 똑같아 보이지 않으려고 더 신경을 쓰고 등교할지도 모른다.


학생답다는 틀에, 학생이라는 신분에 아이들을 가두고 싶지 않았지만 나는 학교 규정을 지키며 살자는 주의라 아들은 교복을 갖춰 입고 등교했다. 교복을 입은 아들은 학생다운 것이 아니라 어른의 옷을 빌려 입은 꼬마 같았다. 그래도 교복을 입은 아들의 모습은 귀여웠다. 마치 돌잔치 때 입은 작은 연미복 같은 느낌이었다. 앞으로 3년, 고등학교까지 6년을 아들은 교복을 입을 것이다. 교복 제도가 사라지기를 아들이 초등학교에 다닐 때부터 바랐지만 전혀 그럴 기미가 안 보인다. 앞으로도 아마 교복은 한동안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유독 학생들에게만 학생답기를 바라는 사회는 자기들이라면 입지 않을 소재의 바지와 셔츠를 입는 학생들이 너무 당연한가 보다. 아니면 교복회사에 소재에 대한 민원이라도 꾸준히 넣어주면서 교복예찬을 했으면 좋겠다. 어차피 입을 교복이라면 좋은 소재의 더 예쁜 디자인으로 만들어달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