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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써니 May 12. 2024

지하철의 온도

시골스러운 풍경을 좋아해서 광명에서 남양주로 이사를 한 나는 처음에 적응하기 쉽지 않았다. 운전을 하지만 대중교통을 많이 이용해서 주차장에 세워둔 차가 방전되는 일도 있을 정도로 대중교통에 의존해 살았다. 그런데 지금 사는 곳은 대중교통이 많이 불편하다. 지금은 지하철이 생겨서 많이 좋아졌지만 처음 이사했던 8년 전에는 버스를 타면서 생긴 말도 안 되는 에피소드들이 많았다. 10킬로 거리를 1시간 30분 버스를 타고 갔던 일이나, 버스를 탔는데 차고지로 들어가서 다시 버스를 타고 나왔던 일들이 그런 일이었다.


내가 사는 곳은 전철역도 종착역이지만 버스도 거의 종점이라 차가 돌아나가는데 잘못 타면 동네를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종점을 돌아 차고지로 들어가는 것 같았다. 그걸 알리 없는 나는 밤 10시가 넘은 시간에 기사님과 단둘이 가로등도 별로 없는 산길을 버스를 타고 차고지로 간 적이 있었다. 이사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길도 잘 몰라서 버스번호만 보고 탔다가 수십대의 버스가 세워진 차고지에서 공포에 떨어야 했다. 그래서 이사 온 후로 가까운 거리도 걷거나 운전을 해서 다니게 되었다. 버스를 타는 일은 일 년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했다. 걸어서 40분 거리의 도서관이 버스를 타고 가면 40분이 걸리기 때문이다. 운행버스가 다양하지 않아서인지 한 버스가 동네 구석구석을 다 돌아가기 때문에 가까운 거리도 멀리 여행하듯 갈 수밖에 없다. 그런 우리 동네에, 그것도 집에서 걸어갈 수 있는 거리에 전철역이 생겼다. 이로써 나는 숲세권과 역세권을 동시에 누리는 생활을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오늘은 도서관에 강의가 있어서 전철을 타고 이동했다. 차를 가지고 가면 조금 더 빨리 갈 수도 있지만 운전하는 것보다 전철 타는 것을 좋아해서 아침 일찍 집을 나섰다. 주말이라 전철 안은 한산했다. 여행을 가는지 커다란 트렁크를 끌면서 탄 여자분이 맞은편에 앉았다. 자전거를 접어서 들고 탄 나이가 지긋한 부부는 다정해 보였다. 전철을 타고 보니 아침을 부지런하게 시작하는 사람들의 표정이 보였다. 하루에 대한 기대와 뭔지 모를 설렘이 느껴졌다. 나도 그들 속에 한자리를 차지하고 앉아있다는 것이 뿌듯하고 대견했다. 서울역에서 1호선으로 갈아탔다. 주말이라 빈자리가 있었다. 그렇듯 나는 지하철에 사람들을 보면서 갔다. 휴대폰을 보면서  타고 내리는 사람들, 사람들이 놓치고 싶지 않은 휴대폰 속 세상이 궁금해서 혼자 상상할 때가 많다. 작정하고 보지 않아도 스치면서 보이는 화면은 어느 날은 웹툰, 어느 날은 유튜브 뉴스, 어느 날은 여행예약사이트다.


 다음 역은 대방, 대방역입니다. 내리실 문은.... 이 열차는 서동탄으로 가는 열차입니다. 지하철에서 늘 듣던 상냥한 기계음 뒤에 육성으로 남자분이 다시 안내해 주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다음 역에서 이번 역은 신길역입니다. 이 열차는 서동탄행입니다. 이번 역은 영등포... 이 열차는 서동탄 방면으로 가는 열차입니다. 이번 역은 신도림.... 이 열차는 서동탄 방면으로 가는 열차입니다. 계속해서 남자 역무원의 목소리가 들렸다. 서동탄 방면으로 가는 열차라는 것이 뭐가 그렇게 중요하다고 계속 방송하는 건지 나중에는 궁금해졌다. 그리고 다음 역에서 그 의문이 풀렸다. 이번 역은 구로, 구로역입니다. 이 열차는 서동탄 방면으로 가는 열차입니다. 다음 역은 가 산 디 지 털 단 지 역입니다.라고 또박또박 안내해 주는 방송이 들렸다. 그리고 내 앞자리에 앉은 아주머니가 갑자기 벌떡 일어나더니 급하게 내렸다.


1호선은 구로에서 갈림길이 생긴다. 인천 방향으로 갈 것인지 수원 방향으로 갈 것인지 결정을 해야 하는 마지막 역이 구로역이다. 실수로 인천방향으로 가야 하는데 수원 방향의 전철을 탔다면 구로역에서 내려서 전철을 바꿔 타면 된다. 그런데 자기가 잘못 탄 것을 모르고 계속 가면 가산디지털단지나 더 멀리 갔다가 돌아 나오는 불편을 겪게 된다. 그런 불편을 겪지 말라고 역무원이 대방역에서부터 어느 방향으로 가는 전철인지 친절하게 알려주신 것이다. 그러고도 모자라 구로역, 바꿔 탈 기회는 지금밖에 없다고 느리고 또렷하게 한번 더 안내해 주셨다는 것을 알았다. 생각 없이 앉아있다가 안내방송을 듣고 벌떡 일어나 내리시던 그 아주머니 같은 분을 위한 역무원의 배려라는 것을. 순간 전동차 안에 따뜻한 온기가 도는 것 같았다.


전철을 잘못 타서 불편을 겪는다고 해도 그것은 본인의 실수일 뿐이다. 전철을 탈 때 어느 방향으로 가는지 크게 쓰여 있으니까 보고 타면 된다. 그럼에도 실수한다. 나도 그렇게 실수해서 돌아 나온 적이 몇 번 있다. 그래서 얼굴 없는 역무원의 안내방송에 담긴 배려의 의미를 알 것 같았다. 이런 따뜻함, 낯설지가 않았다. 우리 집 앞 전철역은 종착역이다. 어느 날 전철을 타고 오는데 종착역을 알리는 안내방송과 함께 '오늘도 저희 도시철도공사를 이용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늘 하루도 정말 고생하셨습니다. 이 전철을 이용하시는 분들에게 지금이 즐거운 시간이었기를 바라겠습니다.'라고 역무원이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때도 오늘처럼 따스한 바람이 마음으로 훅 불어오는 것 같았다. 커다랗고 차가운 기계덩어리인 줄 알았던 지하철에 이런 따스한 심장을 가진 목소리가 있었다. 그리고 그 목소리가 나에게 그랬던 것처럼 다른 누군가에게도 위로와 즐거움을 주었을 것이다. 아침부터 기운 나는 하루의 시작을 주신 얼굴 없는 목소리에 마음으로 감사함을 보냈다.


강의가 끝나고 전철을 타고 오는 중간에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비예보가 있었는데도 아침에 급하게 나오느라 우산을 가지고 오지 않았다. 내가 내리는 역에 편의점이 있으니까 우산을 사야겠다고 생각했다. 종착역에서 내리고 나는 편의점으로 가다가 걸음을 멈췄다. 공유우산이라는 안내문과 함께 여러 개의 우산이 꽂혀있었다. 누구나 필요하면 쓰고 다시 갖다 놓으라고 했다. 세상에 이게 무슨 일인가. 전철역이 언제부터 이렇게 배려 넘치고 따뜻했지? 이런 배려가 없어도 나는 우리나라 전철을 좋아하는데 이렇게까지 하면 헤어 나오기 힘들겠다 싶었다. 나는 편의점으로 가려던 마음을 접고 공유우산 하나를 들고 밖으로 나왔다. 비가 엄청나게 쏟아지고 있었다. 바람도 세게 불었다. 비가 와서인지 5월답지 않게 날씨도 제법 쌀쌀했다. 그래도 오늘 하루 깊고 어두운 공간을 달리는 지하철이 내게 준 온기 덕분에 춥지 않았다. 비 맞지 않고 걸어오는 길이 빗길이 아니라 따스한 봄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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