낮에는 더워서 밖에 나갈 엄두가 안 나서 집에서 뒹굴거리던 아들은 밤이 되면 산책 가자고 한다. 운동을 목적으로 하는 산책이 아니라 그냥 도란도란 이야기하면서 걷는 것이 목적인 산책이다. 아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느긋하게 걸으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이다. 중2, 어느 시기보다 부모와 거리두기 한다는데 아들은 아직 나와 외출하는 것을 꺼리지 않는다. 그래서 항상 고맙고 행복하다. 오늘은 밖에서 간단히 김치말이국수를 먹고 들어오다가 아들이 또 산책을 제안했다. 아빠는 피곤한지 집에 먼저 가고 둘이 걸었다. 절기가 무섭다고 입추가 지나서인지 밤더위가 한풀 꺾였다.
"엄마랑 내가 싸우면 어떨지 상상이 안 돼요."
아들이 뜬금없는 이야기를 했다.
"우리가 왜 싸워?"
"아니 꼭 싸운다는 게 아니라 엄마랑 싸우면 어떻게 싸우게 될지 궁금해요. 한 번도 엄마랑 싸운 기억이 없어서요."
"그랬나? 그래도 엄마가 가끔 정색하고 혼낸 적은 있는 것 같은데? 그때마다 네가 대들지 않고 인정해서 싸울 필요가 없었고."
"그건 내가 혼날만해서 혼난 거니까. 그런 거 말고 정말 터무니없이 혼내야 싸움이 되는데 우리는 그런 사건이 없었던 것 같애요."
"아~ 그래서 서운하구나. 알겠어. 앞으로 기대해."
"아 엄마 그런 말이 아니에요. 진짜 우리 싸우면 무슨 일로 어떻게 싸울지 궁금해요. 엄마가 나한테 쌩트집을 잡으면 싸움이 될 것 같은데 엄마는 그러지 않으니까 싸움이 안 돼요."
"아들아 그게 아니야. 아무리 합당한 이유로 혼나도 니가 반항하면 서로 화가 나서 싸우게 되지."
"엄마 만약에요. 내가 시험을 정말정말 못 보면 어떻게 할 거예요?"
"어떻게 하긴. 왜 틀렸는지 확인하라고 하겠지. 틀렸다고 너를 혼낼 거라는 환상은 버리는 게 좋을 거야. 엄마는 너만 할 때 더 많이 틀렸어."
"아, 그럼 내가 게임을 엄청 많이 하면요?"
"그때는 아들아 게임시간이 너무 길다. 이러겠지. 그런데 너는 게임시간 때문에 엄마한테 화난 적 없었어?"
"있죠. 내가 십분 뒤에 끄려고 했는데 엄마가 아들 그만해야지 하면 갑자기 기분이 나빠지는 것 같애요. 그러면 갑자기 짜증 나서 게임이 재미없어요"
"그래? 그럼 그냥 엄마한테 말하면 되지. 십 분 뒤에 끄려고 했어요. 이렇게. 니가 그냥 게임 끄니까 엄마는 니 마음을 모르지. 앞으로는 말로 해주면 좋겠어."
"아 이야기가 딴 데로 갔어요. 엄마가 언제 나한테 진짜 생트집 한번 잡으면 어때요?"
"그거야 쉽지. 너 지금 말투가 매우 거슬려. 걷는 것도 마음에 안 들고."
"엄마! 그렇게 대놓고 하시면 싸움이 안 되죠. 엄마가 장난치는 거 다 보이거든요."
"아들! 내가 장난하는 걸로 보여?"
"네. 심하게 장난으로 보여요."
"히히. 맞아 장난이야. 다음에 심각하게 한번 해 보자."
아들과 나는 언젠가 있을 엄마의 생트집과 그 쌩트집을 이유로 붙게 될 한판 싸움을 예약하면서 약한 바람이 부는 밤산책을 즐겼다.
아들이 이렇게 나한테 결투를 신청한 것은 최근에 아들 주변에서 일어난 일련의 사건들과 연관이 있는 것 같았다. 기말고사가 끝나고 아들의 채팅방이 시끄러웠다. 아들의 친구 6~7명이 하는 채팅방에는 채팅방커플이 있었다. 지역이 다른 이 커플은 채팅으로 이야기를 나누다가 일 년에 두 번 있는 정모에서 만나 커플이 됐다고 한다. 만나는 횟수는 적어도 전화통화는 자주 하는 소위 롱디커플이었다. 그런데 남자아이의 엄마가 아들의 연애사실을 알고 시험성적이 떨어지면 여자친구와 헤어지라고 했다. 시험성적이 80점을 넘지 않으면 헤어지는 조건이었다. 남자아이는 자신만만하게 그러겠다고 했다. 그 친구는 중간고사에서 네 과목 중 단 한 개만 틀렸다. 그러니 80점 넘는 것은 식은 죽 먹기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런데 기말고사에서 그 친구가 평균 85점을 받은 것이 문제였다. 그 친구는 80점이 넘었으니 헤어질 필요가 없다고 했다. 그런데 엄마는 그래도 여자친구와 헤어지라고 했단다. 시험 성적이 많이 떨어졌다는 것이 이유였다. 그 친구는 엄마와 크게 싸우고 가출을 하겠다고 채팅방에 글을 남겼다. 그러면서 엄마와의 싸움을 실시간 중계하는 것도 모자라 엄마와의 채팅내용을 캡처해서 올리기까지 했다. 그런데 대화상황이 심각했다. 아들은 가출하겠다고 하고, 엄마는 현관 비밀번호를 바꿔버린 것이다.
아들은 친구의 모자대첩을 보면서 이해하기 힘들어했다. 먼저 성적이 떨어졌다고 해서 화를 내는 엄마가 이상했을 것이다. 초등학교 때도 성적 때문에 혼나는 친구들의 이야기에 아들은 놀라워했다. 그런데 중학생이 되면서 단순히 혼나는 수준을 넘어서 성적 때문에 친구들이 많은 것을 포기하는 모습을 보고 아들은 충격에 빠지는 날이 많았다. 줄넘기를 정말 좋아했던 친구는 2학년이 되면서 줄넘기를 포기하고 학원을 늘렸다. 중간고사에서 전체 네 과목에서 3개를 틀린 친구는 학원도 모자라 인강을 추가등록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성적 때문에 여자 친구와 헤어지라는 엄마의 강요 때문에 힘들어하는 친구의 사연을 듣게 된 것이다.
아들을 놀라게 한 다른 이유는 바로 약속을 지키지 않는 엄마의 말이었다. 분명 80점만 넘으면 된다고 했는데 성적이 떨어졌으니 안된다는 말만 되풀이하는 채팅내용에 고구마 먹은 것 같다고 했다. 다른 친구들도 약속을 지키지 않는 친구의 엄마에 대해 이해하기 힘들다는 반응이라고 했다. 같은 엄마로서 아들과의 전투상황이 적나라하게 공개되고 논쟁이 되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지 나는 안타깝기만 했다. 또 한편으로는 왜 약속을 안 지키는지 나도 납득이 되지 않았다. 아이를 키우면서 아들과 한 약속을 한 번도 어기지 않을 수는 없을 것이다. 만약 약속을 어겨야 할 일이 생기면 솔직하게 말하고 이해를 구하면 된다. 막무가내로 아들에게 자신의 생각을 강요하는 것은 오히려 부작용만 키운다. 가출을 한 친구는 할머니의 도움으로 자정 무렵에 집으로 돌아갔다고 한다. 그러고도 며칠을 엄마와의 냉랭한 분위기가 채팅방을 뜨겁게 달궜다.
아들은 친구들이 성적이나 스마트폰, 여자친구문제 때문에 엄마와 겪는 갈등을 보면서 한 번도 제대로 싸워본 적 없는 무미건조한 우리 모자사이를 생각했던 것 같다. 아들의 꿈은 평범하게 사는 것이다. 그 평범함이라는 것이 얼마나 이루기 어려운 삶이라는 것을 아들은 어렴풋이라도 알고 있는지 모르겠다. 비슷한 의미로 중2아들과 갱년기 엄마가 무미건조하다 못해 지루하게 보내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아들이 알까? 그러기 위해 아들도 엄마의 꾸중에 때로는 짧은 짜증으로, 때로는 능청스러운 애교로 넘기느라 무던히 애를 쓰는 것이 아닐까? 내가 가끔씩 욱하고 올라오는 버럭을 장난기 서린 발차기로 날리고 있다는 것을 아들은 알까? 나는 아들의 용기 있는 도전에 답하기 위해 언젠가 생트집 제대로 한번 잡아볼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