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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지어가 있는 방

by 써니

학교문을 나서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해영이었다. 망설이다가 지현은 통화버튼을 눌렀다.

“지현아 어디야?”

“나 일이 있어서 잠깐 나왔어. 너는 어디?”

전화기 너머에서 들리는 밝은 해영의 목소리에 지현은 학교에서 나오는 길이라고 솔직하게 말하지 못했다. 지현이 민혁의 학폭 문제로 학교에 다녀온 것이 일주일 전이었다. 일주일 만에 다시 다른 학폭 가해자로 민혁이 신고를 당했다는 것을 말하고 싶지 않았다. 지현은 굳이 말하지 않아도 며칠 후면 해영의 귀에도 들어가겠지만 지현의 입으로 아들의 순탄치 못한 학교생활을 드러낼 필요까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 커피 못 마시겠네. 나 커피 마시려고 집 앞에 나왔는데. 혹시 너도 집에 들어오는 길이면 같이 커피 한잔 할 수 있어?”

“집에 가는 길이긴 한데 나 커피 마시고 오는 길이야.”

“그럼 다른 음료 마시면 되지. 지현아 일단 카페로 와.”

“응? 그 그래.”

지현은 자신도 모르게 약속을 하고 말았다. 번번이 해영의 제안을 거절하지 못하는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해영은 갑자기 커피가 마시고 싶다거나 와인 한잔 하자며 종종 지현에게 전화를 했다. 지현의 대답이 매번 망설이는 듯한데도 해영은 도무지 눈치를 채지 못하는 것 같았다. 카페로 가는 동안 지현은 민혁의 일을 생각하느라 해영과의 편하지 않은 약속에 대해 생각하지 못했다. 일주일 전 민혁은 자기보다 두 살이나 많은 3학년에게 시비를 걸고 욕을 했다는 이유로 학폭 가해자가 되었다. 심의 끝에 사안이 많이 심각하지 않고 중학교에 올라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일어난 일이라 사건을 키우고 싶어 하지 않는 학교 측의 배려로 크게 처벌을 받지 않고 끝났다. 그런데 이번에는 사안이 달랐다. 얼마 전에 민혁이 자정이 다 되도록 집에 오지 않아 집 근처를 찾아다닌 적이 있었다. 그때 지현은 끝내 민혁을 찾지 못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낯선 번호의 전화가 걸려왔다. 불길했다. 그리고 불길함은 현실이 되었다. 민혁이가 길에서 만난 모르는 아이들과 싸움을 벌인 것이었다. 민혁의 친구들 네 명이 함께 있었지만 폭력을 쓴 것은 민혁뿐이었다. 나머지 친구들은 민혁에게 맞는 피해학생을 영상으로 찍고 있었다. 피해학생이 이가 부러져서 피를 많이 흘리자 사태의 심각성을 알고 친구들이 민혁을 말렸다고 했다. 민혁의 말에 의하면 십 분도 되지 않는 시간 동안 이백차례 정도 그 아이의 얼굴을 때렸다고 했다. 그날밤 경찰의 전화를 받고 파출소에 갔을 때 민혁의 얼굴은 의외로 깨끗했다. 사건의 전말을 설명하는 경찰의 말을 듣고도 지현은 믿을 수가 없었다. 민혁이처럼 체구가 작은 아이가 처음 보는 아이의 이를 부러뜨릴 정도로 때릴 수 있다는 것이 가능한가 의문이 들었다. 하지만 지현도 알고 있었다. 아마도 경찰의 말은 모두 사실일 것이다. 초등학교 6학년이 되면서 민혁은 심심찮게 학폭 가해자가 되어 지현을 학교로 불러냈다. 처음에는 선생님들 보기가 부끄럽고 죄스러웠다. 하지만 사과도 익숙해지니까 담담해졌다. 어느새 지현의 얼굴에 진심 어린 미안함은 사라졌다. 그저 얼른 이 자리가 빨리 끝나기를 바랄 뿐이었다. 그래도 지금까지는 가벼운 욕이나 어깨를 밀치면서 시비를 거는 정도였다. 이번 건은 가볍게 넘어가지 않을 것 같았다. 피해자 부모의 표정이 차가웠다. 아직 어린 아들의 이가 부러졌으니 이해할 수 있는 반응이었다. 그래도 원만한 해결을 위해 지현은 진심이 담기지 않았지만 진심을 다하는 표정으로 사과를 했다. 사과를 하면서 피해자의 치료비가 얼마나 많이 나올지를 걱정했다.


카페에 들어서자 해영이 커피를 마시면서 책자를 넘겨보고 있었다. 지현은 해영이 있는 자리로 다가가면서 인사를 했다. 해영이 고개를 들고 지현을 보면서 환하게 웃었다. 잡티하나 없는 하얀 얼굴에서 빛이 났다. 세련된 스타일로 드라이한 윤기 있는 긴 머리가 잘 어울렸다.

“뭐 보고 있어?”

“응? 이거? 오늘 백화점 갔다 오는 길에 길에서 아프리카 아이들 후원 신청을 받더라고. 그래서 후원신청하고 왔어. 이건 그 안내 책자. 여기 사진 좀 봐. 너무 말라서 뼈밖에 없어. 너무 불쌍해서 보고 있으니까 눈물 날라 그래. 지현아 너도 후원해라.”

“응? 생각해 보고.”

“생각해 볼게 아니라 후원해야지. 어디선가 이렇게 어린아이들이 굶어 죽어가고 있다고 생각하면 너무 마음 아프잖아.”

“그렇긴 한데 난 멀리 있는 아이보다 우리 주변을 먼저 생각해야 되는 거 아닌가 싶어서.”

“무슨? 우리 주변에 굶어 죽는 애가 어디 있다고. 근데 어디 갔다 오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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