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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onto Mar 08. 2022

#1. 그녀에게 차이고 찾은 그 '찻집'

'동방미인'과 함께한 하소연의 시간과, 나를 받아준 공간

11월 말, 그 아이에게 더 이상 만날 수 없다는 카톡을 받은 다음날.


잠을 이룰 수가 없어서 뜬 눈으로 밤을 지새우고, 몽롱한 정신으로 집에서 나왔다. 추운 겨울날 정처 없이 걸었기에 몸의 온도는 빠르게 식어갔음에도, 그 사실을 잊은 채 몇 시간을 걸었다. 그리고 예약했었던 찻집에 갈까 말까 고민했던 건, 오후 2시가 다 되고 나서였다.


여자애가 차를 좋아한다는 이유로, 그래서 그녀에게 잘 보이겠다는 일념 하나로 무수한 검색과 시간을 들여 찾은 공간. 하지만 같이 갈 사람이 사라졌기에, 지금이라도 취소하고 가지 말까라는 생각이 맴 돔에도, 왠지 가지 않으면 그녀의 거절 때문에 아무런 일도 못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 같아서, 그 찻집으로 향했다.


안녕하세요! 3시에 예약하신 분 맞죠?


그 따뜻한 환대에, 한 명만 왔습니다라고 기어들어 가듯이 대답을 했다. 찻집 사장님(앞으로는 쌤이라 적는다)과 나, 둘만 있는 그 정적인 공간이 사람을 차분하게 만들었고, 주변을 둘러볼 생각은 하지 못한 상태로 앉아만 있었다.


물 끓는 소리만이 울려 퍼지는 그 정적이 깨진 건, 10분 후 다른 여자 선생님이 들어오고 나서였다. 방앗간 들르듯이 이곳에 온다는 이야기를 덧붙이시며 자리에 앉으신 그 선생님은, 쌤에게 친환경 세제를 싸왔다며, 이른 크리스마스 선물이라며 이야기를 이어나가며 연말의 분위기를 몰고 왔다.


이런저런 오가는 안부와 이야기들. 살아가는 이야기들이 한두 차례 오간 후 쌤은 자리에 앉으셨고, 상자 하나씩을 내주셨다.


"오늘은 따로 준비한 다회가 아니니, 간단한 다식을 준비했어요. 그리고 차 역시도, 특별히 순서를 짜서 내는 게 아니라, 마시고 싶은 걸 꺼내서 마시도록 할게요."


저 간단함이 간단함이 아님을 나중이 되어서는 알았지만, 그 당시에는 전혀 알지 못했고, 차 역시도 잘 몰랐기에(지금도 잘 모른다) 그냥 따뜻하게 마실 수 있는 거면 된다는 말을 나는 덧붙였다. 팽주(烹主:찻자리에서 차를 우려서 내어놓는 사람)를 맡으신 쌤은 절제된 손놀림으로 차를 우리며 마실 차에 대해서 설명해주셨지만, 몇 달이 지난 지금, 사실 기억이 나진 않는다. 따뜻한 차가 내 속에 들어오는 기분을 제외하고는.


"제가 좀 정신이 없는 시간이라, 아무 말이나 할 수도 있어요. 죄송해요."

 

죄송하면 하지 말아야지. 차와, 쌤의 정겨움에 감정이 달아올랐기 때문일까. 지난 1년간 있었던 일들에 대해서 쏟아내기 시작했다. 울분의 감정도 있었고, 억울함도 있었다. 그녀에게 하지 못한 이야기들이 처음 보는 사람들 앞에서, 정리되지 않은 채, 두서없이 내뱉어졌다.


"다식도 먹어가면서 차를 마셔요. 그리고 다른 차를 우려 볼까요?"


주절주절 이어져나가는 내 이야기에도, 멈추지 않고 듣고 계신 쌤. 중간중간 맞장구도 쳐주셨지만, 결국은 내 이야기가 다 흘러나오길 바라시는 듯한 표정을 짓고 계시다가, 그 끝에 차를 하나 꺼내오셨다.


"동방미인이라고 들어봤어요? 청차 계열이고 대만에서 나온 차예요. 이름의 유래가 재미있어요. 영국 빅토리아 여왕이 마셔보고 동쪽에 이런 아름다운 차가 있다니!라는 감탄을 했다고 해요. 그래서 붙여진 명칭이 'Oriental beauty', 동방미인입니다. 다른 여왕이라는 이야기도 있지만, 무엇이든 어때요? 그 이야기가 재미있으면 되었지."


차에 대한 설명과 함께 우려진 차 향이 화사하게 퍼져나갔다. 그 코끝을 간질이는 은은한 향이 마실 때까지 이어져서 시끄럽게 울렁이던 내 속을 달래주었다. '동방미인'을 몇 잔 더 마시고 난 후, 속의 이야기가 모두 나오고 나서야, 주변을 둘러볼 수 있는 정신이 돌아왔다.


이런 공간이었구나. 하나부터 열까지 쌤의 손길이 담아진 공간. 진열되어있는 자사호와 그릇, 그리고 포장되어있는 차들. 7평 남짓한 그 조그마한 공간이, 그제야 나에게 다가왔다. 누군가의 취향이 가득 담긴 공간에 속이 복잡한 내가 찾아갔다가 차를 한참 마신 후에야 그걸 알아볼 수 있었다.


아...... 이 공간을 사랑할 수 있겠다. 이런 공간이라면 나를 받아 줄 수 있겠다. 차와 다우들, 그를 담고 있는 공간이 그 순간 벅차게 다가와서, 순간 좋아했던 그 아이의 모습이 흐릿해졌다.


우리 자주 봐요.


동방미인의 향이 나를 되돌린 것인지, 아니면 그 이름 때문에 순간 정신이 팔려서인지, 아니면 다른 차를 마셨더라도 똑같이 그 공간을 느낄 수 있었을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그 장소를 떠날 때 아쉬움만은 확실했고, 나오는 순간 해주셨던 쌤의 말에, 확신했다.


난 이 공간에 금방 돌아올 거고, 그때 또 다른 차를 마실 수 있겠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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