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년 차 딩크부부의 명절
올해 설처럼 연휴가 길 때면 보통 우리는 어떻게든 여행을 떠났었다. 이직 이슈로 연차가 부족해 이번 명절은 집에 있기로 했다.
(연차가 부족하지만 올해 이미 4건의 항공권 예약은 되어 있는 상태다ㅎㅎ)
# 심심할 것 같았던 설 연휴.
한 달 전부터 여행을 좋아하는 지인과 약속을 잡았다. 지인 부부와 술 한잔 하며 시작한 연휴였다.
서로 올해는 어디 여행을 계획하고 있는지, 작년에 누가 더 많이 갔는지, 서로 더 많이 갔다며 자제하라는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계산해 보니 두 집 똑같이 작년에 8번의 해외여행을 갔다.ㅋㅋ
두 집 모두 일 년에 한 번 여름휴가로 9일짜리 여행을 떠나는데 우리는 올해 6월 남프랑스를 예약해 두었으나
지인네는 아직 정하지 못했다고 한다. 얘기를 듣자마자
" 언니! 언니네도 6월에 같이 니스 가면 어때요?! "
" 엇! 니스도 후보에 있긴 했는데 "
" 그럼 고민 좀 해봐요. 같이 가면 좋겠다!ㅎㅎ "
네 명 중 가장 연장자가 지천명이 되었을 때, 동갑 둘이 환갑이 되었을 때, 막내인 내가 환갑이 되었을 때 기념 여행을 하자는 이야기로 깔깔거리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과연 우리는 올해 6월 다 같이 남프랑스 여행에 가게 될까?ㅎㅎ
# 설 전 날, 친정에 다녀왔다.
보통 당일에 시댁과 친정을 모두 가는데 올해는 시간이 남아서 각각 가기로 했다. 낮부터 가서 오랜만에 전을 부쳤다. 그런 나를 보고 작은 엄마가
" 결혼하니까 전도 잘 부치네 "
" 결혼하고 몇 년 쉬어서 그렇지, 초등학생 때부터 했으니까 거의 30년 차 경력자예요 "
우리 집은 큰집이고 제사를 지내서 어릴 적부터 엄마를 도와 전, 튀김은 언니와 나의 담당이었다. 오히려 나는 제사를 안 지내는 시댁 덕분에 결혼과 동시에 명절 음식 스트레스에서 해방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음식 준비가 끝나니 식사 준비가 시작되었다. 30년 전의 엄마의 명절 모습과 현재가 크게 달라지지 않은 것 같다. 다행히 음식 가짓수는 줄었고 사 오는 음식들도 생겼다.
친정에서는 남편이 아빠와 술친구가 되어준다. 남자들끼리 한잔을 하다가 아빠가 남편한테 김을 먹어보라며 권했다.
"이거 김 먹어봐. 맛있지? "
아빠 친구가 명절 선물로 김을 보내줬는데 자랑하고 싶었던 것 같다. 그런데 속이야기를 들어보니...
친구 어머니가 집에서 한 동치미가 먹고 싶다고 하는데 와이프가 싫어해서 말을 못 하고 있다는 얘기를 듣고 우리 엄마가 한 동치미를 갖다 줬다고 한다. 고마운 마음에 고급 곱창김을 보내주셨다고.ㅎㅎ
김장을 해도 딸들만 주지, 어머니는 안 챙겨서 서운하다는 친구의 말을 얘기하며 너무하지 않냐고 공감해 주길 바라는 아빠였다.
나는 이럴 때 T 성향이 튀어나온다.
" 아빠, 다 업보야. 옛날 할머니들이 며느리들한테 못되게 했으니까 늙어서 대우 못 받는 거야. "
어쩌면 아빠는 엄마한테 하고 싶은 얘기일 수도 있다. 우리 엄마는 혹독한 시집살이와 고부갈등의 주인공이었고, 70살이 가까워오는 지금도 매주 요양원에 있는 할머니의 반찬을 한다. 억지로 해서인지 이제 할머니가 좋아하는 음식들은 아예 안 한다.
할머니가 우리 엄마한테 잘해줬었다면 지금 할머니가 좋아하는 음식들을 더 많이 하지 않았을까?
명절 스트레스는 우리의 엄마들 세대가 가장 크게 받았을 것 같다. 요즘은 여행 가는 집들도 많고 제사를 없애는 집들도 많기 때문에 또래 중에서는 편히 명절을 보내는 경우도 꽤 많이 보인다.
상대적으로 시댁, 명절 스트레스 없는 나는 먼 미래에 시어머니가 좋아하는 음식을 해드릴까?
# 명절 당일, 시댁에 다녀왔다.
날라리 며느리라 6년 동안 시댁 가서 차려준 밥 먹고 설거지도 한 적이 없다. 어제 친정에서 엄마들이 안타까운 마음이 생겨서 이번엔 음식을 준비했다.
언니네 가게에서 가져온 타코 밀키트 세트가 있어서 간단하게 준비하기 좋았다. 추가로 같이 곁들일 소스만 하나 만들고 새우 종류를 하나 더 늘렸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후다닥 준비해서 접시에 세팅까지 끝내고 가져가는 길에 문득 와인이 생각났다.
" 오빠, 와인이랑 같이 먹어야 더 맛있을 것 같은데 "
" 엄마 집에 와인 없을걸? 울 집에도 없으니까 패스해 "
포기하지 않고 가는 길에 편의점에 들러서 쇼비뇽블랑 한 병을 샀다. 시댁에 도착하자마자 타코 준비해 왔다며 와인이랑 같이 세팅을 했다.
어머니는 내가 좋아하는 새우튀김과 어머니가 좋아하는 LA갈비를 준비하셨다.
아침부터 와인 마시겠다고 사온 며느리의 제안의 모두 흔쾌히 타코와 와인부터 한잔하기 시작했다. 다행히 우리 시댁은 새로운 음식을 경험하는 것을 좋아하고 가리는 음식이 거의 없다.
덕분에 명절 아침을 타코, 새우튀김, LA 갈비와 와인 한 병으로 모두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좋아하시는 모습을 보니 가끔은 한식 외에 다른 음식들을 준비해 가 보면 좋겠다 싶었다.
아마도 이런 마음이 드는 것이 시댁, 명절 스트레스가 없어서 아닐까?
여행 가지 않고 여유롭게 보낸 이번 명절은 나름 뜻깊은 시간들이었다. 우리 부부는 더 뜻깊은 명절을 보내기 위해 올해 추석 여행 비행기표 예약을 마쳤다.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