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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L May 30. 2023

펭귄

세상의 끝, 어떤 것의 시작

세상의 끝은 어디일까요? 무엇을 기준으로 삼느냐에 따라 다를 수도 있겠지만, 세상의 끝이라고 주장하는 두 도시를 알고 있습니다. 하나는 아르헨티나 티에라델푸에고(Tierra del Fuego)섬의 가장 큰 도시, 우수아이아(Ushuaia)입니다. 남위 55도, 수치상으로 남미의 최남단에 위치하고 있죠. 또 하나는 인접 국가, 칠레의 작은 항구도시 푼타 아레나스(Punta Arenas)입니다. 남위 53도, 우수아이아보다는 조금 위쪽에 자리 잡고 있는데요. 대신 남미 대륙에 붙어 있어 육로로만 따진다면 푼타 아레나스가 세상의 끝인 셈이죠. 게다가 이곳은 또 다른 세상을 향하는 관문이기도 합니다. 지구에 남은 유일한 미지의 영역, 남극으로 가는 비행기가 뜨거든요.     


2017년 겨울, 남극으로 들어가기 위해 푼타 아레나스를 찾았습니다. 남극 세종기지 30주년을 맞아 다큐멘터리를 제작하기 위해서였죠. 나를 포함한 네 명의 제작진까지 총 10명이 동행했는데요. 인천공항에서 스페인을 경유해 칠레까지 쉼 없이 날았습니다. 푼타 아레나스에서 하루 머문 다음, 칠레 공군기를 타고 남극으로 들어가는 여정이었죠.        


대서양과 태평양을 잇는 마젤란 해협의 끝에 있는 푼타 아레나스는 한때 크게 번성했던 항구도시였습니다. 기회의 땅, 캘리포니아를 향하는 배들의 중간 기착지였거든요. 하지만 1914년 파나마 운하가 개통되면서 사정이 달라졌습니다. 주요 뱃길이 바뀌면서 배들도 사람도 더는 푼타 아레나스를 찾지 않게 되었죠. 쇠락한 도시가 되어 버렸지만 도심 곳곳에는 과거의 영광을 보여주는 멋진 건물과 구조물들이 많이 남아 있습니다. 사람이 별로 없어 썰렁하긴 해도, 많은 이야기를 품고 있는 그 도시가 나는 마음에 들었습니다. 하루만 머물기에는 조금 아쉽더라고요.     


“비행시간이 바뀌었어요. 오후까지 기다려 봐야 해요!

“오후 몇 시쯤?”

“그건 가서 대기해봐야 할 것 같아요!”          


다음 날 아침을 먹고 있는데, 비행 일정이 미뤄졌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이유는 기상 악화!     

     

“여기는 날씨가 화창한데요? ”

“비행기가 뜨기만 하면 뭐 합니까, 착륙을 못 하는데!”       

   

하루에도 몇 번씩 바뀐다는 남극 날씨가 발목을 잡더군요. 문명의 세계를 벗어나 미지의 세계로 들어가는 길인데 이 정도 고생쯤은 감내해야죠. 남극으로 가는 여정이 너무 순탄하기만 하면 재미없잖아요.      


점심을 먹고 나니 예정대로 비행기가 뜬다더군요. '드디어 남극에 들어가는구나!' 다시 한번, 가슴이 벅차오르던 순간, 찬물을 끼얹는 한마디!         


“그런데 남은 좌석이 6개뿐이에요”

“네? 그럼 나머지 네 사람은요?”

“다음 비행기를 타야죠.”

“그게 언제일까요?”

“현재 일정상 내일이네요!”

“내일도 남극 날씨가 안 좋으면요?”

“못 들어가는 거죠. 만약 내일도 비행기가 못 뜨면 한 3~4일은 꼼짝없이 기다려야 할 겁니다!”      

    

분명 몇 달 전에 예약한 좌석인데 나도 모르게 취소되고, 비행시간은 수시로 변동됩니다. 한국 같았으면 여행사에 대고 거세게 항의라도 할 수 있겠지만, 여기서는 소용이 없습니다. 남극은 원래 그런 곳이거든요. 변화무쌍한 날씨 때문에 비행 일정도 자주 바뀌고 그러다 블리자드라도 불어닥치면 며칠씩 푼타 아레나스에 발이 묶여 버리죠. 그래서 남극 연구원들이나 월동대원들은 처음부터 일정을 넉넉하게 잡고 남극행을 준비합니다. 문제는 짧은 일정으로 머물다가는 취재진인데요. 하루 이틀은 마음의 여유를 갖고 기다린다 해도, 3~4일이 넘어가면 입남극을 포기하고 귀국하는 사람들도 많다고 합니다. 빡빡한 일정으로 사는 도시인들은 남극 취재 말고도 해야 할 일이 많거든요. 일정이 연기될수록 늘어나는 체류비용 역시, 개인에게는 큰 부담입니다. 그러니까 오늘 남극에 들어가지 못한 나머지 네 명은, 이대로 한국으로 돌아가야 할지도 모른다는 의미죠.     


고심 끝에 이번 비행을 통해 남극에 반드시 들어가야만 하는 다섯 명, 그리고 다큐멘터리 제작진 중에서는 PD만 카메라를 들고 비행기에 올랐습니다. 나를 포함한 나머지 네 사람은 푼타 아레나스에 남아 남극의 날씨가 잠잠해 지기만을 기다려야 했지요. 이 도시에 하루만 머물다 가기엔 아쉽다는 생각이 이런 서글픈(?) 결과를 불러올 줄은 미처 몰랐답니다. 비행 일정이 잡히기 전까지 기다리는 것 이외에는 다른 할 일이 없었습니다. 숙소가 도시 중앙에 있어 조금만 걸으면 시내 곳곳을 둘러볼 수 있었는데요. 발길 닿는 데로 걷다 보니 항구가 보이더라고요. 처음 해변에 도착했을 땐 깜짝 놀랐습니다. 바닷가에 펭귄이 떼를 지어 앉아 있더라고요. 설마, 이 도시에 펭귄이 사는 건가 싶었는데요. 안내문을 확인해 보니 황제 가마우지라고 합니다. 가마우지조차 펭귄을 닮은 것을 보니 남극에 얼마나 가까이 왔는지 실감할 수 있었습니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여기까지 왔는데 이대로 돌아갈 순 없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남극에 들어가야 해!’  


비장하게 결심했지만 사실 뾰족한 수는 없었습니다. 그저 약간의 운에 기대 보기로 했죠. 그래서 푼타 아레나스 중심가에 있는 아르마스 광장으로 달려갔어요. 그곳에는 인류 역사상 최초로 세계 일주에 성공해, 지구가 둥글다는 사실을 증명했다는 한 남자의 동상이 있거든요. 이름은 페르디난도 마젤란, 포르투갈 출신의 항해사였습니다. 수많은 역사책에 이름을 올리고, 그의 이름을 딴 해협이 생기기까지 얼마나 많은 행운이 함께 했을까요? 그래서 그의 동상을 만지면 좋은 일이 생기거나 혹은 다시 이곳에 올 수 있다는 속설이 있습니다. 덕분에 관광객들의 필수 코스가 되었죠. 현장에 가보니 공원 중심부에 거대한 조각상이 있었습니다. 우선 대포를 딛고 서서 바다를 바라보는 위풍당당한 모습의 마젤란이 눈에 띄었고요. 그 아래는 원주민으로 보이는 건장한 두 남자가 칼을 들고 호위하듯 앉아있습니다. 그중 한 남자의 발이 이미 수많은 사람의 손길로 반질반질하더군요. 그래서 나도 그 행운의 발가락에 살포시, 그러나 여러 번 손을 얹었습니다. 동상인데도 왠지 모를 온기가 느껴졌던 것은 기분 탓이었겠죠.         


다음 날, 바람도 잔잔하고 하늘도 화창했습니다만 비행기가 뜬다는 소식은 아직 들려오지 않았습니다. 아침을 먹고 다시 한번 아르마스 광장에 들렀는데요. 플리마켓이 열렸더라고요. 주민들이 나와 다양한 기념품을 팔고 있었어요. 역시나 펭귄 관련 제품이 압도적으로 많았습니다. 그중에서 내 눈길을 사로잡은 것은, 한 할머니께서 직접 만들었다는 펭귄 뜨개 인형이었어요. 젠투 펭귄을 닮은 오렌지빛 주둥이가 인상적이더군요. 서툰 바느질 솜씨를 보니 우리 할머니가 떠올라 더 마음이 갔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핸드메이드치곤 가격도 저렴했어요. 사지 않을 이유가 없었죠. “그라시아스(고마워요)” 라며 활짝 웃는 할머니에게 손을 흔들며 호텔로 돌아왔습니다. 녀석의 볼록한 배를 만지작거리니 심경의 변화가 생기더군요.     


‘이걸로 충분하다.’               


PD가 남극으로 들어갔으니 장비나 인력, 상황이 열악하더라도 다큐멘터리는 만들어질 테고, 남극 땅은 밟지 못했으나 이 아름다운 도시에서 이틀을 머물렀고, 펭귄은 만나지 못했으나 세상에 단 하나뿐인 유니크한 펭귄 인형을 얻었으니 더 바란다면 그건 욕심이 아닐까? 이대로 집으로 돌아간다고 해도 이제는 괜찮겠다 싶었던 순간, 호텔 로비에서 활짝 웃고 있는 일행을 만났습니다. 어떤 행운은 모든 걸 내려놓은 후에야 슬그머니 찾아오나 봅니다. 


그렇게 우리는 미지의 세계로 향했습니다. 남극 땅을 밟자마자 격하게 환영 인사(?)를 하는 펭귄과 마주했고,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무사히 2부작 다큐멘터리를 만들었죠. 개인적인 보람도 있었습니다. 남극을 다녀온 후, 그림책 학교에 입학해 본격적으로 그림공부를 시작했고, 펭귄을 주인공으로 한 그림책을 완성했습니다, 원주민의 발을 여러 번 만지작거린 것이 효과가 있었던 걸까요? 운이 좋게 상을 받았고, 출판사와 계약도 하게 되었죠. 올해 하반기 출간을 목표로 부지런히 작업 중입니다.           


마젤란 동상도 일정 부분 역할(?)을 했겠지만 나는 푼타 아레나스에서 겪은 여러 행운의 지분이 이 특별한 펭귄 인형에 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녀석이 내 손에 들어온 순간부터 모든 것이 좋은 방향으로 흘러간다는 기분이 들었거든요. 이 신비로운 감정을 어떻게 하면 오래도록 간직할 수 있을까 고민하다가 녀석을 그려보기로 했습니다. 그림을 배우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스타일도, 요령도 없었던 때였는데요. 좋아하는 것을 그리는 작업이다 보니 인형에 묻은 티끌 하나도 놓치고 싶지 않더라고요. 마치 물감과 붓으로 인형을 짜는 것처럼 한 올 한 올 실타래를 더듬어가며 그림을 그렸습니다. 그렇게 실물에 가까운(?) 펭귄 인형 그림을 완성할 수 있었죠.                


완성된 작품이 완벽하다고 말할 수 없겠지만, 내 마음에는 쏙 들었습니다. 왠지 모를 안도감이 느껴지기도 했어요. 언젠가 시간이 흘러 인형은 사라질지 모르지만, 푼타 아레나스에서 마주했던 아름다운 풍경과 추억, 당시 느꼈던 감정, 그리고 작은 행운들이 이 그림 속에 깃들어 영원히 내 곁에 남아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그때, 좋아하는 것을 온전히 내 것으로 만드는 근사한 방법을 알게 되었습니다. 바로 ‘진심과 애정을 담아 좋아하는 대상을 직접 그려보는 것'이었어요. 그렇게 나만의 그림 에세이 프로젝트가 시작되었답니다. 아무도 봐주지 않는다고 해도 그저 내가 좋아서 하는 일이라면 꾸준히 할 수 있겠다는 자신감도 생겼는데요. 세상의 끝에서 시작된 나의 이야기가 과연 어디까지 흘러갈지 사뭇 궁금해지는 밤입니다.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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